고려高麗시대의 무당
무당이 인귀人鬼가 병의 원인이라 말했다는 것은 고구려 초에 이미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긍徐兢(1091-1153)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다음의 내용이 있습니다.
“고려의 오랜 풍습은 사람들이 병들어도 약으로써 다스리지 않고, 오직 귀신을 섬기고 저주와 염승厭勝만을 일삼았다.”
염승厭勝은 주술적呪術的 도구 등을 사용하여 사악한 기운을 꺾는 방술로 압승壓勝이라고도 합니다.
전 40권의 『고려도경』은 1123년(인종 1년) 송宋나라 사신단의 일원으로 고려에 온 서긍의 고려견문록을 말하며, 원래 글과 그림이 있어 도경圖經이라 했으나 현재 그림은 전하지 않습니다.
『고려도경』의 내용으로 미루어 고려에 무풍巫風이 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무당의 말에 따라 둑을 허물기까지 했는데, 이는 오늘날 세속에서 동토動土하여 살煞을 범하는 것을 꺼리는 것의 연원입니다.
동토動土는 태세신太歲神이 머무는 방향에서 땅을 파거나 집을 지었을 때 생기는 재앙으로 태세신은 12년을 주기로 동-서-남-북으로 순환합니다.
태세신은 처음에는 하늘의 별로 여겨졌으나 후대에는 지하에 머무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태세 관념은 중국의 선진시대에 이미 확인되며, 동토를 우리 민간에서는 흔히 동티났다고 합니다.
살煞은 재앙을 가져다주는 사악한 기운을 말합니다.
『고려사高麗史』 인종세가에 따르면 인종仁宗 24년(1146년), 왕이 병이 들어서 척준경拓俊卿을 다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복직시키고, 그 자손을 불러 관직을 주었는데, 이는 척준경의 원혼이 병의 빌미가 되었다는 무당의 말에 의한 것입니다.
또 무당의 말을 듣고 내시 봉열을 보내 김제군金提郡에 신축한 벽골지碧骨池의 둑을 허물었습니다.
척준경拓俊卿은 인종 때 이자겸李資謙의 난亂에 가담해 대궐大闕에 불을 질렀으나, 인종의 권유로 1126년(인종 4년) 이자겸을 몰아내는 데 앞장섰고, 그 공으로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사同中書門下平事가 되었습니다.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줄인 것이 문하시랑이며, 중서내하성中書內下省의 정2품 벼슬입니다.
그러나 척준경은 이듬해 정지상에게서 과거 대궐을 범한 죄를 탄핵당해 결국 유배되었으며, 1144년(인종 22년) 고향 곡주에서 등창으로 죽었습니다.
척준경에 의해 제거된 이자겸은 1126년(인종 4년) 12월에 유배지 영광에서 죽었습니다.
사람들을 홀리는데 공창무격空唱巫覡이 가장 심했습니다.
공창무격空唱巫覡은 말을 하지 않는데도 공중에서 소리가 들리도록 하는 술법을 사용하는 무당을 말합니다.
공창은 입술과 이를 놀리지 않고 전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일종의 복화술複話術로 요즘은 개그맨들이 주로 사용합니다.
조선 초기에 공창의 풍습이 성행했으며, 고려시대부터 전해진 것입니다.
『고려사高麗史』 「안향전安珦傳」에 따르면 충렬왕忠烈王 원년(1275년), 원元나라에서 성리학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한 안향安珦(1243-1306)이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부임했습니다.
이때 여자 무당 세 사람이 있어 요사스런 귀신을 받들고 사람들을 현혹시키면서 협주陜州(오늘날의 경남 합천군)에서부터 여러 군현을 거쳐 갔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의 소리가 났는데 공중에서 은은하게 길을 비키라고 외치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달려가 다투어 제사를 지냈으며, 감히 남보다 뒤처지려 하지 않았고, 비록 고을의 수령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상중에 이르렀을 때 안향이 매를 때리고 칼을 씌우니, 무녀들은 귀신의 말을 빙자하여 화복으로서 겁을 주었습니다.
상주 사람들이 다 두려워하였으나, 안향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며칠을 넘기자 무녀들이 애걸하므로 풀어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