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맹姜希孟의 훈자오설訓子五說(담사설膽蛇說)

 

 

훈자오설訓子五說이란 자식을 훈계한 다섯 가지 이야기로 도자설盜子說(도둑의 아들), 담사설膽巳說(뱀을 잡아먹음), 등산설登山說(높은 산에 오름), 삼치설三雉說(꿩을 잡는 이야기), 요통설曜通說(오줌통의 이야기)을 말한다.

담사설膽蛇說

명주溟州지역에 선약仙藥이 많이 생산되니 약국藥局에서 2년마다 의원醫員을 파견하여 약을 채취했는데, 한 의원이 이 임무를 도맡아 자주 명주를 왕래하였다. 이 의원이 처음 도착했을 때 채약꾼들이 자신의 무리 중에 한두 명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들은 뱀을 먹는다” 하고 너나없이 냉소冷笑하면서 식사할 때에도 그릇을 빌려주지 않고 앉을 때에도 같은 자리에 앉지 않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다음 2년 만에 갔을 때에는 조소嘲笑하는 자들이 줄어들어 전일에 뱀을 먹는다고 냉소하던 자들과 친근해져 혐오감이 없어졌고, 또다시 2년 만에 갔을 때에는 마을에 뱀을 먹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어져 조소하는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차분하게 살펴보니, 사람마다 머리가 두 갈래로 갈라진 목궁木弓과 시위를 멘 조그만 굽은 나무를 가지고 긴 숲속 큰 골짜기로 들어가 약초를 캐다가 뱀을 만나면 크고 작은 것을 가리지 않고 두 갈래로 벌어진 목궁으로 뱀의 머리를 누르면 뱀이 머리를 추켜들고 입을 벌렸다. 그러면 굽은 나무의 활시위로 잡아당겨 뱀의 이빨을 모두 제거한 다음 손으로 껍질을 벗겨서 화살 통에 넣어 두었다가 밥이 다 될 무렵 뱀에다 소금을 쳐서 구워놓고 서로 앞 다투어 남김없이 먹어 치우는 것이었다. 장기간 이렇게 하자 중독이 되어 죽은 사람이 줄을 이었다.

아! 뱀은 꿈틀거리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보기 흉한 파충류여서 비록 어리석은 사람도 모두 뱀을 천하게 여기고 미워하며 피할 줄을 안다. 만일 뱀이 가까이 접근하면 너나없이 구역질이 나오고 전율을 느끼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 사람의 타고난 성품이 그런 것이다.

명주 사람들이 처음에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배척했던 것은 그때까지는 타고난 성품을 그대로 간직한 사람이 많은 때문이었고, 중간에 가서는 배척하는 사람이 적어지고 뱀을 먹는 사람이 많아졌으나 혹 타고난 성품을 그대로 간직하여 세속에 물들지 않은 자가 있었다. 그러나 종말에는 온 고을이 잘못된 것임을 알지 못하여 조소가 일체 끊기고 더러운 풍속에 안주하였다. 이 지경에 이르면 인성人性이 모두 가려져 다시는 시시비비를 논할 수 없게 된다.

어떻게 한 고을의 백성들이 모두 타고난 성품을 상실하여 깨닫지 못하였겠는가? 필시 어떤 사람이 처음에 그런 짓을 하여 오도誤導했을 것이다. 처음에 오도할 때에 반드시 “뱀도 물고기와 같은 종류이다. 고기가 살지고 향기로우며 사람의 주변에 있어 잡기도 쉬운데다가 그 모양을 따져 보면 가물치나 다름없다. 가릴 것이 뭐 있겠는가?”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에 몇 사람이 시험 삼아 고기를 맛본 결과 해독害毒이 없으므로 점차로 마음에 익숙해져 혐오감이 없어졌다. 이렇게 세월이 쌓이다 보니, 점점 뱀을 먹는 풍속이 이루어져 버젓이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이다. 이때에 그들이 뱀을 먹는 것이 부끄러워할 만한 일임과 해독이 두려울 만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전날에 비난하던 자들까지도 뒤따라 본받으며 말하기를 “저들도 사람이므로 입맛이 다르지 않을 터인데 유독 뱀을 즐겨 먹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필시 그 속에 지극한 맛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전일에 그들을 비난한 것이 망령에 가깝지 않음을 어떻게 알며, 그들이 즐기는 바가 소견이 없다는 것을 또 어떻게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상호간에 점점 물들어 그릇된 행위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불쌍하다.

사군자士君子가 재리財利와 성색聲色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탐욕과 방탕이 천하게 여길 만한 일임과 오욕汚辱과 패망敗亡이 두려울 만하다는 사실을 그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한번 마음에 겪어 보고는 결국 부끄러움을 망각해 버리니, 어찌 조소하는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너는 마땅히 그 기미를 살펴 소홀히 여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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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나推拿가 무엇입니까?

 

 

추나推拿(밀 추, 잡을 나)는 고대에 안마按摩(누를 안, 문지를 마), 안교按蹺(발돋움할 교)라 했다. 아직도 중국에서는 안마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소아추나방맥활영비지전서小兒推拿方脉活嬰秘旨全書》,《소아추나비결小兒推拿秘訣》등에서는 안마를 추나로 표기했다. 이러한 명칭의 변화는 치료법의 발전과, 수기手技를 이용한 치료방법에 대한 재인식의 기회가 되었다. 초기 안마의 치료법은 극소수의 질병치료에만 사용되었고, 치료방법으로 수법手法의 종류도 비교적 적어, 상용하는 것이 안按과 마摩의 두 가지 수법이였다. 안법按法은 단순히 아래로 힘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소위 안이유지按而留之, 즉 ‘누르고 지나간다’는 의미였고, 마법摩法은 인체 표면에서는 원형의 마찰摩擦로서 평동平動의 범주에 속했다. 이후 추나의 치료범위가 확대됨에 따라, 수법 역시 상응하는 발전을 했고, 치료방법도 상대적으로 발전했으며, 힘의 방향과 강약에 따라 치료효과가 달라짐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기초하여 안마는 더욱더 명확한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렇게 명확한 치료개념으로 자리 잡은 안마는 추나로 불리게 되고, 추나 발전의 중요한 기틀이 되었다.

추나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치료요법 중 하나다. 인류의 탄생과 함께 사람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끊임없는 노동에 종사해야 했으며, 각종 자연계의 불리한 요소들과 투쟁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인체의 손상과 질병은 사람들의 생활에 가장 큰 위험이 되었고, 사람들은 점점 안마가 통증을 감소, 제거시켜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기반 위에서 점차적으로 안마가 인체에 대한 치료작용을 인식하게 되었다.

2000여 년 전 선진양한先秦兩漢 시기 두 편의 의학걸작으로《황제내경皇帝內經》,《황제기백안마십권皇帝岐伯按摩十卷》에서 처음 완전한 중의학中醫學의 이론체계를 정립했다. 인류 최초의 치료수단은 물리성질을 이용한 요법으로 추나, 열부熱敷(펼 부), 침구鍼灸(침과 뜸) 등이었다. 사회가 발전함에 다라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자연약물自然藥物의 치료를 발견했고, 진일보한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이러한 토대 위에서 화학약물化學藥物이 탄생하게 되었다. 중국 명조의 연단술煉丹術은 화학약물의 발전의 기초가 되었으며, 근대에 이르러 생물약물生物藥物도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자연약물과 화학약물, 생물약물은 의료과학의 진일보한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이런 약물들은 모두 여러 부작용이 뒤따랐다. 과학기술이 끊임없이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점차 약물 부작용의 위해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가시적으로 국제의학계에서는 전통 물리성질을 응용한 치료방법에 한층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는데, 이러한 치료법이 인체에 부작용이 없고, 효과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추나는 의학계의 또 하나의 커다란 발견이며, 이를 계승, 발전시키는 일이 전통의술에 대한 단순한 모방이나 복고가 아닌 정리와 발전을 시키며 미래의 특별한 의료과학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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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왕유王維의 춘계문답春桂問答을 읽다

 

 

問春桂문춘계: 봄 계수나무에게 묻기를

桃李正芳華도리정방화: 복숭아와 오얏나무 이제 막 향기로운 꽃 피워

年光隨處滿연광수처만: 봄빛이 곳곳에 가득하거늘

何事獨無花하사독무화: 무슨 일로 홀로 꽃이 없소 하니

春桂答춘계답: 봄 계수나무 대답하기를

春華詎能久춘화거능구: 봄꽃이 어찌 오래갈 수 있으리

風霜搖落時풍상요락시: 바람과 서리 몰아칠 때에는

獨秀君知不독수군지불: 나 혼자 빼어난 줄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앞서 소식蘇軾의 춘야행春夜行을 올렸는데, 소식이 봄날의 밤에 가는 봄이 아쉬워서 춘야행을 읊었다면 왕유王維(699?~759)는 봄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이 시를 읊었습니다.

우선 시가 쓰인 때가 안사의 난이 중국 전체를 회오리바람으로 휘몰아칠 때였습니다.

안록산安祿山이 난을 일으켰을 때 많은 사대부들이 그에게 협력했습니다.

양귀비楊貴妃의 양자였던 안록산은 한때 궁정에서 크게 세력을 떨쳤으나, 결국 아들의 손에 살해되어 씁쓸한 삶을 마감했습니다.

왕유도 한때 안록산의 군대에 붙잡혔으나, “약을 먹어 벙어리가 되었다”고 하면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시로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현종은 귀비 양옥환楊玉環(양귀비)을 총애하여 정치를 보살피지 않았고 이임보李林甫와 양국충楊國忠이 차례로 집권하던 때였습니다.

중국 역사에서 환관이 나라를 망친 때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이때에도 환관 고력사高力士가 정치에 개입하여 정치가 몹시 부패했습니다.

호족 출신의 안록산은 세력을 키워 정치적으로 양국충과 대립하였고,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755년(천보 14)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먼저 낙양을 점령하고 대연황제大燕皇帝라 칭한 후 장안을 공격하자 현종은 창황히 사천으로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현종은 도중에 양귀비를 자살하게 하고 영무靈武에서 숙종에게 양위하여(756) 안사의 난을 평정하도록 했습니다.

왕유는 시인이자 화가로도 유명합니다.

그의 자字는 마힐摩詰인데, 유維와 자字 마힐은《유마경維摩経》에 나오는 거사居士 유마힐維摩詰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왕유는 어려서부터 시詩와 서書, 음곡音曲 등에 뛰어난 재주를 나타냈으며, 9살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15살에 당唐나라 수도였던 장안長安(지금의 서안西安)으로 유학 가서 황실皇室에까지 이름을 떨쳤습니다.

현종玄宗(재위 712∼756) 말기에 이부낭중吏部郎中과 급사중給事中 등의 요직要職을 역임했습니다.

75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나고, 756년 장안長安이 점령되자 왕유는 반란군에 사로잡혀 뤄양洛陽으로 끌려갔으며, 그곳에서 안녹산으로부터 벼슬을 받았지만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남전藍田(陝西省 長安 동남의 縣)의 중난산終南山 기슭에 세운 망천장輞川莊에 머물며 시詩로서 자신의 마음을 나타냈습니다.

758년 현종玄宗의 뒤를 이은 숙종肅宗(재위 756~762)이 반란군을 물리치고 장안과 뤄양을 탈환한 뒤 왕유는 안녹산에게 벼슬을 받은 일로 문책을 받았지만 사정이 인정되어 사면赦免받았습니다.

그리고 태자중윤太子中允으로 등용된 뒤,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 중서사인中書舎人, 급사중給事中을 거쳐 상서우승尙書右丞이 되었습니다.

시인으로서 왕유는 시선詩仙이라 불리는 이백李白(701~762),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두보杜甫(712~770)와 함께 중국의 서정시 형식을 완성한 3대 시인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왕유는 그림에도 뛰어나 송宋나라의 소식蘇軾(1036~1101)은 왕유의 시와 그림을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평했습니다.

왕유는 정건鄭虔, 오도자呉道子 등과 함께 중국 남종화南宗畵의 개조開祖로 여겨지고 있으며, 문인화文人畵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인물이나 꽃, 대나무, 산수山水의 정경 등 다양한 소재를 그림으로 나타냈는데, 특히 수묵水墨 산수화山水畵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왕유는 자연을 소재素材로 한 오언五言 율시律詩와 절구絶句에 뛰어난 성취를 보여 육조六朝 시대부터 내려온 자연시自然詩를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당나라 시대의 자연시 전통을 대표하는 인물을 왕맹위유王孟韋柳라 부르는데, 왕유와 위응물韋應物(737~804), 맹호연孟浩然(689~740), 유종원柳宗元(773~819)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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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소식蘇軾의 춘야행春夜行을 읽다

 

 

春宵一刻直千金춘소일각치천금: 봄날, 달밤의 한때는 천금의 값어치가 있구나.

花有淸香月有陰화유청향월유음: 꽃에는 맑은 향기가 있고, 달은 흐려져

歌管樓臺聲寂寂가관누대성적적: 노래하고 피리 불던 누대도 소리가 없어 적적하고

鞦韆院落夜沈沈추천원낙야침침: 그네만 걸려 있는 안뜰에 밤만 깊어간다.

 

 

요즘은 새벽에 일어나 우리나라와 중국 고전을 읽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고전을 가까이 하다보면 옛 사람들도 동시대인처럼 생각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진솔한 삶에 있어서는 그 생각이나 이상이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제 지인들과 꽃박람회에 간 뒤 토종닭에 누룩막걸리를 먹으면서 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은 고요한데 변덕스러운 내 마음만 있을 뿐이라고.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의 내 마음에 따라서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도, 장자도, 공자와 맹자도 그리고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읽는 순간의 마음에 따라서 달리 해석됩니다.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장도 미술품도 물 자체로 변함이 없지만, 읽는 이, 보는 이의 마음의 변덕에 따라서 달리 해석되고 달리 느껴집니다.

금년에는 유난히 봄을 즐기고 있습니다.

다양한 많은 꽃을 구입하여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면서 생명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우아하고 화려한 장미로부터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작은 야생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명의 모습은 그야말로 신기롭기만 합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소동파의 춘야행을 읽으며 그가 어디에서 무슨 마음으로 이 시를 썼는지 가늠이 됩니다.

물론 술을 마시고 기분이 한창 고조된 가운데 썼겠지요.

술을 마시고 귀가하던 중에 누대를 지나 안뜰을 걸으면서 봄밤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 과장해서 천금을 주어도 못 살만큼 아름답고 값어치가 있다고 노래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시간을 묶어둘 수 없어 봄의 순간을 천금에 비유한 것입니다.

소식을 머리에 떠올릴 때에는 삼국시대의 영웅 조조 3부자가 생각납니다.

소씨와 조씨 집안에서는 한꺼번에 명문가가 셋이나 출현한 것입니다.

한 집안에서 한꺼번에 두 사람의 문장가가 출현하는 건 우리나라에도 종종 있는 일입니다.

조선 중기 선조 때의 허난설헌許蘭雪軒과 그녀의 동생 허균許筠도 그러합니다.

많은 문장가들이 불운한 시대를 살았듯이 허씨 남매도 불운한 시대에 살았고, 허난설헌은 27세에 요절했습니다.

허균은 소동파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분은 텅 빈듯하면서도 한없이 넓은 마음씨로서 사람들과 경계를 다투지 않으셨다. 현명하거나 어리석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즐겁게 어울렸으니 유하혜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의 풍모를 갖춘 분이었다. 나는 그분을 본받고 싶지만 역부족이다.”

허균이 본받고 싶어 했던 송宋나라의 문장가 소식蘇軾(1037~1101)의 자는 자첨子瞻,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로 소동파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아버지 순洵, 아우 철轍과 함께 3소三蘇라 불리며, 모두 당송8대가의 영광스러운 반열에 올랐습니다.

소식은 시, 사, 문, 음악, 서법 등에 깊은 조예가 있었고, 정치에도 높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21세 때 진사가 되어 벼슬길에 들어섰으나, 북송 때의 격렬한 변법운동變法運動 및 신구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몇 차례 좌천당하는 등 정치적으로는 불운을 겪었습니다.혁신 정치세력에 밀려 항주杭州, 밀주密州(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제성諸城), 서주徐州(지금의 강소江蘇), 호주湖州(지금의 절강浙江) 등의 지방관을 주로 역임했습니다.

휘종徽宗이 왕위를 이은 뒤에 귀양으로부터 풀려나 수도로 돌아가는 도중 상주常州에서 병사했습니다.

소동파는 그네만 걸려 있는 조용한 안뜰을 바라보며 춘야행을 썼는데, 그의 시를 나는 어둠 속에 침잠한 밤섬을 바라보며 읽습니다.

쓴 이나 읽는 이나 봄날, 달밤의 한때를 천금의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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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주의식 반유대주의의 주축

 

 

 

이슬람세계 전역에 확산되고 있는, 정치적인 동기를 띠지만 종교로 승화된 반유대주의의 실상은 유럽의 반유대주의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로 이어졌다는 점을 일깨워주어야 마땅하다. 따라서 이슬람세계의 반유대주의는 향후의 범죄 예방을 위해 연구해야 할 프로젝트로 간주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이슬람주의식 반유대주의가 전통적인 유대인혐오증과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슬람교가 유대인들을 신앙인으로 존중하고 그들을 경전의 사람(아흘 알키타브)으로 추앙함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을 둘러싼 편견은 이슬람세계에서 오랫동안 존재해왔다. 중세에 유대 민족의 종교생활을 허용한 이슬람교의 전통적 관용은 인정하지만— 중세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을 학살한 것과 비교해볼 때 이 같은 관용은 찬사를 받아 마땅하지만— “관용” 의 기준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 는 안 될 것이다. 요즘 2류신도이자 보호대상인 소수의 유일신을 믿는 소수집단(딤미) 취급을 받고 싶어 하는 유대인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 이는 명백한 차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슬람교의 샤리아를 둔, 팔레스타인 구역에서 딤미의 지위를 인정한다는 조건하에 유대인의 자유를 허용하자는 하마스의 온건파들이 장려하는 의견을 이스라엘 국민이 거부하는 것도 당연하다. 이는 시민 사회의 준거와는 대립되는 제안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세계의 질서를 저해하기 위한 모략의 일환으로 유대인의 대리인 역할을 한다며 이슬람주의자들이 세속적인 아랍 및 터키 민족주의자들을 비난할 때 그들은 세속 민족주의자들도 반유대주의에 빠져든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만다. 그러나 세속 민족주의자들과는 달리, 이슬람주의자들은 이 같은 이데올로기에 종교를 입힌다. 사이드 쿠틉이 기틀을 잡고, 조직체(하마스 등)의 독트린을 갖춘 채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온 이슬람화된 반유대주의는 유대교와 이슬람교 간의 끝없는 증오심이라는 그릇된 전통을 빚어냈다. 이슬람화된 반유대주의의 주축을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의혹으로요약할 수 있다.
이 같은 신념 때문에 이슬람주의식 반유대주의가 이슬람주의의 반시온주의 및 반미주의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슬람세계에서 유대인혐오증은 반유대주의가 아니라, 반시온주의에 기반을 두었거나 이스라엘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일컫는다고 서방세계에서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슬람주의자들의 대립된 주장과 씨름해야 할 것이다.

결론은 다음 세 가지로 압축된다.

1. “세계적이고 사탄적인 유대인의 악성” 을 둘러싼 믿음은 제2의 홀로코스트를 동조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사악한 피조물은 인간이 아니므로 그들을 전멸시키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타당하고 꼭 그래야 마땅하다. 이 같은 사고가 얼토당토않다는 것은 대번 알겠지만 이슬람주의가 출현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사상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2. 사이드 쿠틉과 무슬림 형제단(몇몇 정책입안자들은 “온건파 이슬람주의자” 로 간주한다)이 주창한 이슬람교화한 반유대주의는 새롭게 발전하고 있다. 이는 “인종차별적인” 아랍 민족의 반유대주의와는 사뭇 다르다.

3. 이슬람화된, 즉 종교화된 반유대주의는 이슬람교 고유의 무언가가 있다는 진정성을 내세워 이슬람 민족의 관심을 더 끌 수 있으므로 인종차별적인 반유대주의보다 더 위험하다.

 

그렇다면 서방세계는 어떻게 이슬람세계와 작별을 고하지 않고 반유대주의 병폐와 맞닥뜨릴 수 있단 말인가? 이슬람주의식 반유대주의와 맞서는 최선의 방편은 그것이 이슬람 사상 및 전통과는 거리가 먼 데다 진정성도 인정할 수 없다는 소신을 지키는 것일 것이다. 스페인에서 유대인과 무슬림의 관계가 가깝고, 무슬림인 이븐 루슈드와 유대인 철학자 모세스 마이모니데스가 서로 뜻이 맞는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는 진보주의 무슬림은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동포에게 밝혀야 한다. 무슬림과 유대인의 역사적 관계는 그리 이상적이진 않지만 (세계적인 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 끊임없는 전시상황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전통의 긍정적인 측면은 이슬람주의 아젠다에 맞서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협력하여 부활시켜야 마땅하며, 반유대주의가 이슬람주의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슬람주의의 대안으로, 지금은 묻혀버린 이슬람교의 인본주의 전통을 소생시킴으로써 이슬람주의를 배격하는 문화적 공생관계 안에서 마이모니데스와 이븐 루슈드 등 저명한 철학자들을 연합시켜야 할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유대인혐오증을 법으로 금지한 유일한 아랍・이슬람 국가인 모로코는 이처럼 긍정적 전통을 보전하고 있다. 2009년 7월, 나는 다문화주의와 다원주의에 관한 세계회의Congres Mondial sur Multiculturalisme et Pluralisme에 참석차 모로코의 페즈에 있었는데, 현지 정치인과 학자들이 다원주의와 다양성을 두고 공개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교환하는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모로코 문화의 유대적 원천” 도 인정을 받았다. 모로코 국립 라디오 방송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민간 이슬람 문화에 찬사를 보내면서 이를 다른 아랍・무슬림들의 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을 주장했다. 이런 인터뷰는 이집트와 시리아를 비롯하여 다른 중동 국가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국가에서는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탓에 이를 반대했다가는 대역죄로 몰리기 십상이다. 과거 엘리트에 국한되었던, 범아랍 반유대주의와는 달리, 새로운 이슬람주의식 반유대주의 사상은 민중으
로 구성된 조직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이미 뿌리를 내린 데다 국민이 선택할 수 있는 사상으로 격상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반유대주의를 법으로 금하는 것을 이슬람혐오증의 표현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반유대주의를 둘러싼 법적 조치는 중세 이슬람식 인본주의 속에서 피어난 전통 사고방식인 “유대교 및 이슬람교의 공생 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2011년, 아랍의 봄이 이슬람교의 인본주의에 의해 벌어졌는가?” 라는 물음으로 이 장을 마칠까 한다. 권위주의 정권이 붕괴하고 아랍의 봄이 일어나면서 새로운 자유가 도래했지만 그렇다고 긍정적 감정만 나타난 건 아니다. 2011년 9월 중순경, 카이로의 타리르 광장에서 시위를 벌이던 몇몇 군중은 반유대주의 감정을 물리적인 공격으로 표출하기 위해 이스라엘 대사관을 찾았다. 이는 AKP가 집권한 터키가 이스라엘 대사를 추방한 지 일주일이 지난 뒤의 일이다. 그러고 난 후에는 이슬람주의자인 터키 총리가
유대인에 맞선 무슬림 지도자를 자처하기 위해 카이로를 밟았다. 그는 반유대주의 슬로건을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반이스라엘 카드를 이용했다. 독일 『디 벨트』지의 중동 특파원 미샤엘 보그스테데는 “무바라크 정권이 와해된 이후 이집트 국민은 소신을 자유롭게 털어놓고 있다. 그런데 표현의 자유를 뜯어보면 반유대주의와 유대인혐오증이 다수를 차지한다” 고 술회했다. 이 장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한나 아렌트의 입장— 모든 반유대주의는 전체주의라는— 을 감안해볼 때, 이슬람주의자들의 지위를 격상하기
위한 아랍의 봄 운동은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이슬람의 인본주의 정신도 기대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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