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주의식 반유대주의의 주축

 

 

 

이슬람세계 전역에 확산되고 있는, 정치적인 동기를 띠지만 종교로 승화된 반유대주의의 실상은 유럽의 반유대주의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로 이어졌다는 점을 일깨워주어야 마땅하다. 따라서 이슬람세계의 반유대주의는 향후의 범죄 예방을 위해 연구해야 할 프로젝트로 간주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이슬람주의식 반유대주의가 전통적인 유대인혐오증과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슬람교가 유대인들을 신앙인으로 존중하고 그들을 경전의 사람(아흘 알키타브)으로 추앙함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을 둘러싼 편견은 이슬람세계에서 오랫동안 존재해왔다. 중세에 유대 민족의 종교생활을 허용한 이슬람교의 전통적 관용은 인정하지만— 중세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을 학살한 것과 비교해볼 때 이 같은 관용은 찬사를 받아 마땅하지만— “관용” 의 기준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 는 안 될 것이다. 요즘 2류신도이자 보호대상인 소수의 유일신을 믿는 소수집단(딤미) 취급을 받고 싶어 하는 유대인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 이는 명백한 차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슬람교의 샤리아를 둔, 팔레스타인 구역에서 딤미의 지위를 인정한다는 조건하에 유대인의 자유를 허용하자는 하마스의 온건파들이 장려하는 의견을 이스라엘 국민이 거부하는 것도 당연하다. 이는 시민 사회의 준거와는 대립되는 제안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세계의 질서를 저해하기 위한 모략의 일환으로 유대인의 대리인 역할을 한다며 이슬람주의자들이 세속적인 아랍 및 터키 민족주의자들을 비난할 때 그들은 세속 민족주의자들도 반유대주의에 빠져든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만다. 그러나 세속 민족주의자들과는 달리, 이슬람주의자들은 이 같은 이데올로기에 종교를 입힌다. 사이드 쿠틉이 기틀을 잡고, 조직체(하마스 등)의 독트린을 갖춘 채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온 이슬람화된 반유대주의는 유대교와 이슬람교 간의 끝없는 증오심이라는 그릇된 전통을 빚어냈다. 이슬람화된 반유대주의의 주축을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의혹으로요약할 수 있다.
이 같은 신념 때문에 이슬람주의식 반유대주의가 이슬람주의의 반시온주의 및 반미주의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슬람세계에서 유대인혐오증은 반유대주의가 아니라, 반시온주의에 기반을 두었거나 이스라엘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일컫는다고 서방세계에서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슬람주의자들의 대립된 주장과 씨름해야 할 것이다.

결론은 다음 세 가지로 압축된다.

1. “세계적이고 사탄적인 유대인의 악성” 을 둘러싼 믿음은 제2의 홀로코스트를 동조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사악한 피조물은 인간이 아니므로 그들을 전멸시키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타당하고 꼭 그래야 마땅하다. 이 같은 사고가 얼토당토않다는 것은 대번 알겠지만 이슬람주의가 출현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사상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2. 사이드 쿠틉과 무슬림 형제단(몇몇 정책입안자들은 “온건파 이슬람주의자” 로 간주한다)이 주창한 이슬람교화한 반유대주의는 새롭게 발전하고 있다. 이는 “인종차별적인” 아랍 민족의 반유대주의와는 사뭇 다르다.

3. 이슬람화된, 즉 종교화된 반유대주의는 이슬람교 고유의 무언가가 있다는 진정성을 내세워 이슬람 민족의 관심을 더 끌 수 있으므로 인종차별적인 반유대주의보다 더 위험하다.

 

그렇다면 서방세계는 어떻게 이슬람세계와 작별을 고하지 않고 반유대주의 병폐와 맞닥뜨릴 수 있단 말인가? 이슬람주의식 반유대주의와 맞서는 최선의 방편은 그것이 이슬람 사상 및 전통과는 거리가 먼 데다 진정성도 인정할 수 없다는 소신을 지키는 것일 것이다. 스페인에서 유대인과 무슬림의 관계가 가깝고, 무슬림인 이븐 루슈드와 유대인 철학자 모세스 마이모니데스가 서로 뜻이 맞는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는 진보주의 무슬림은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동포에게 밝혀야 한다. 무슬림과 유대인의 역사적 관계는 그리 이상적이진 않지만 (세계적인 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 끊임없는 전시상황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전통의 긍정적인 측면은 이슬람주의 아젠다에 맞서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협력하여 부활시켜야 마땅하며, 반유대주의가 이슬람주의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슬람주의의 대안으로, 지금은 묻혀버린 이슬람교의 인본주의 전통을 소생시킴으로써 이슬람주의를 배격하는 문화적 공생관계 안에서 마이모니데스와 이븐 루슈드 등 저명한 철학자들을 연합시켜야 할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유대인혐오증을 법으로 금지한 유일한 아랍・이슬람 국가인 모로코는 이처럼 긍정적 전통을 보전하고 있다. 2009년 7월, 나는 다문화주의와 다원주의에 관한 세계회의Congres Mondial sur Multiculturalisme et Pluralisme에 참석차 모로코의 페즈에 있었는데, 현지 정치인과 학자들이 다원주의와 다양성을 두고 공개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교환하는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모로코 문화의 유대적 원천” 도 인정을 받았다. 모로코 국립 라디오 방송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민간 이슬람 문화에 찬사를 보내면서 이를 다른 아랍・무슬림들의 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을 주장했다. 이런 인터뷰는 이집트와 시리아를 비롯하여 다른 중동 국가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국가에서는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탓에 이를 반대했다가는 대역죄로 몰리기 십상이다. 과거 엘리트에 국한되었던, 범아랍 반유대주의와는 달리, 새로운 이슬람주의식 반유대주의 사상은 민중으
로 구성된 조직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이미 뿌리를 내린 데다 국민이 선택할 수 있는 사상으로 격상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반유대주의를 법으로 금하는 것을 이슬람혐오증의 표현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반유대주의를 둘러싼 법적 조치는 중세 이슬람식 인본주의 속에서 피어난 전통 사고방식인 “유대교 및 이슬람교의 공생 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2011년, 아랍의 봄이 이슬람교의 인본주의에 의해 벌어졌는가?” 라는 물음으로 이 장을 마칠까 한다. 권위주의 정권이 붕괴하고 아랍의 봄이 일어나면서 새로운 자유가 도래했지만 그렇다고 긍정적 감정만 나타난 건 아니다. 2011년 9월 중순경, 카이로의 타리르 광장에서 시위를 벌이던 몇몇 군중은 반유대주의 감정을 물리적인 공격으로 표출하기 위해 이스라엘 대사관을 찾았다. 이는 AKP가 집권한 터키가 이스라엘 대사를 추방한 지 일주일이 지난 뒤의 일이다. 그러고 난 후에는 이슬람주의자인 터키 총리가
유대인에 맞선 무슬림 지도자를 자처하기 위해 카이로를 밟았다. 그는 반유대주의 슬로건을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반이스라엘 카드를 이용했다. 독일 『디 벨트』지의 중동 특파원 미샤엘 보그스테데는 “무바라크 정권이 와해된 이후 이집트 국민은 소신을 자유롭게 털어놓고 있다. 그런데 표현의 자유를 뜯어보면 반유대주의와 유대인혐오증이 다수를 차지한다” 고 술회했다. 이 장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한나 아렌트의 입장— 모든 반유대주의는 전체주의라는— 을 감안해볼 때, 이슬람주의자들의 지위를 격상하기
위한 아랍의 봄 운동은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이슬람의 인본주의 정신도 기대하기 어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