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왕유王維의 춘계문답春桂問答을 읽다

 

 

問春桂문춘계: 봄 계수나무에게 묻기를

桃李正芳華도리정방화: 복숭아와 오얏나무 이제 막 향기로운 꽃 피워

年光隨處滿연광수처만: 봄빛이 곳곳에 가득하거늘

何事獨無花하사독무화: 무슨 일로 홀로 꽃이 없소 하니

春桂答춘계답: 봄 계수나무 대답하기를

春華詎能久춘화거능구: 봄꽃이 어찌 오래갈 수 있으리

風霜搖落時풍상요락시: 바람과 서리 몰아칠 때에는

獨秀君知不독수군지불: 나 혼자 빼어난 줄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앞서 소식蘇軾의 춘야행春夜行을 올렸는데, 소식이 봄날의 밤에 가는 봄이 아쉬워서 춘야행을 읊었다면 왕유王維(699?~759)는 봄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이 시를 읊었습니다.

우선 시가 쓰인 때가 안사의 난이 중국 전체를 회오리바람으로 휘몰아칠 때였습니다.

안록산安祿山이 난을 일으켰을 때 많은 사대부들이 그에게 협력했습니다.

양귀비楊貴妃의 양자였던 안록산은 한때 궁정에서 크게 세력을 떨쳤으나, 결국 아들의 손에 살해되어 씁쓸한 삶을 마감했습니다.

왕유도 한때 안록산의 군대에 붙잡혔으나, “약을 먹어 벙어리가 되었다”고 하면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시로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현종은 귀비 양옥환楊玉環(양귀비)을 총애하여 정치를 보살피지 않았고 이임보李林甫와 양국충楊國忠이 차례로 집권하던 때였습니다.

중국 역사에서 환관이 나라를 망친 때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이때에도 환관 고력사高力士가 정치에 개입하여 정치가 몹시 부패했습니다.

호족 출신의 안록산은 세력을 키워 정치적으로 양국충과 대립하였고,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755년(천보 14)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먼저 낙양을 점령하고 대연황제大燕皇帝라 칭한 후 장안을 공격하자 현종은 창황히 사천으로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현종은 도중에 양귀비를 자살하게 하고 영무靈武에서 숙종에게 양위하여(756) 안사의 난을 평정하도록 했습니다.

왕유는 시인이자 화가로도 유명합니다.

그의 자字는 마힐摩詰인데, 유維와 자字 마힐은《유마경維摩経》에 나오는 거사居士 유마힐維摩詰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왕유는 어려서부터 시詩와 서書, 음곡音曲 등에 뛰어난 재주를 나타냈으며, 9살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15살에 당唐나라 수도였던 장안長安(지금의 서안西安)으로 유학 가서 황실皇室에까지 이름을 떨쳤습니다.

현종玄宗(재위 712∼756) 말기에 이부낭중吏部郎中과 급사중給事中 등의 요직要職을 역임했습니다.

75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나고, 756년 장안長安이 점령되자 왕유는 반란군에 사로잡혀 뤄양洛陽으로 끌려갔으며, 그곳에서 안녹산으로부터 벼슬을 받았지만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남전藍田(陝西省 長安 동남의 縣)의 중난산終南山 기슭에 세운 망천장輞川莊에 머물며 시詩로서 자신의 마음을 나타냈습니다.

758년 현종玄宗의 뒤를 이은 숙종肅宗(재위 756~762)이 반란군을 물리치고 장안과 뤄양을 탈환한 뒤 왕유는 안녹산에게 벼슬을 받은 일로 문책을 받았지만 사정이 인정되어 사면赦免받았습니다.

그리고 태자중윤太子中允으로 등용된 뒤,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 중서사인中書舎人, 급사중給事中을 거쳐 상서우승尙書右丞이 되었습니다.

시인으로서 왕유는 시선詩仙이라 불리는 이백李白(701~762),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두보杜甫(712~770)와 함께 중국의 서정시 형식을 완성한 3대 시인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왕유는 그림에도 뛰어나 송宋나라의 소식蘇軾(1036~1101)은 왕유의 시와 그림을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평했습니다.

왕유는 정건鄭虔, 오도자呉道子 등과 함께 중국 남종화南宗畵의 개조開祖로 여겨지고 있으며, 문인화文人畵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인물이나 꽃, 대나무, 산수山水의 정경 등 다양한 소재를 그림으로 나타냈는데, 특히 수묵水墨 산수화山水畵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왕유는 자연을 소재素材로 한 오언五言 율시律詩와 절구絶句에 뛰어난 성취를 보여 육조六朝 시대부터 내려온 자연시自然詩를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당나라 시대의 자연시 전통을 대표하는 인물을 왕맹위유王孟韋柳라 부르는데, 왕유와 위응물韋應物(737~804), 맹호연孟浩然(689~740), 유종원柳宗元(773~819)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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