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땅 시나이 산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국경 타바에서 까다로운 수속을 마치고 이집트 땅을 밟았다.
여행사의 안내인이 버스를 대기시켜놓고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끝이 없어 보이는 황막한 광야를 가로질러 달렸다.
나무도, 풀 한 포기도 보이지 않는 광야다.
모세가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횡단한 광야라고 생각하면서 당시의 고난을 상상해보았다.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막막한 사막과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며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북쪽은 바위로 된 광야요, 남쪽은 홍해로 이어진 광야다.
조그마한 오아시스들이 군데군데 있는 것이 보이는데, 열대 식물들도 보이고 유목민 베두인족들이 양떼를 몰고 다니는 것도 눈에 띄었다.

우리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데 새벽 2시 30분에 시작되는 시나이 산 등정을 기다리느라고 그랬기도 하지만 성지에 와있다는 사실 자체가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등정을 알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이 캄캄한 밖으로 나서니 차가운 새벽공기에 몸이 으스스하다.
버스에 올라 불과 400m쯤 오르니 ‘성 카타리나 수도원’ 광장이 보인다.
그곳에 이드로의 우물과 모세가 하느님의 음성을 듣던 떨기나무가 있었다.
거룩한 땅이니 신발을 벗으라고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곳이다.
‘거룩한 땅’을 오른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수도원에서부터 낙타행과 보행자로 나뉘는데 나는 낙타 등에 몸을 맡겼다.
어둠을 뚫고 플래시 불빛을 따라서 낙타가 발을 옮긴다.
일출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그렇게 등정 길에 오른 것이다.
나는 하느님과 대화를 했다.
“주님! 왜 이다지도 험란한 산길로 팔십 먹은 노인 모세를 부르셨습니까?”
사십일 동안 먹고 마실 음식과 물통을 메고 늙은 몸으로 하느님의 명령에 묵묵히 순종하며 허덕거리는 모습으로 등정했을 모세를 상상해보았다.

동이 트기 시작하니 사면의 산들이 장관을 이루었다.
시나이 산은 제각기 다른 모양의 높고 낮은 산들의 집합인데 신비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가지각색의 바위산 계곡에서 신비로운 일이 곧 생길 것만 같았다.
휴게소 움막 앞에서 낙타 행렬이 그쳤다.
그곳은 낙타의 종착역이었다.
너무 가파로운 길이라서 낙타가 더 이상 갈 수 없으므로 우리들은 보행을 해야 한다.
힘에 겨웁게 거의 정상에 올라 막사에 들어서니 막사 주인이 친절하게도 불을 피워주어서 몸을 훈훈하게 할 수 있었다.

움막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등정에 올랐다.
정상에 오르는 길에 눈이 약간 깔려 있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정상에 거의 다다르니 ‘상봉 교회’ 건물이 반갑게 맞아주는 것 같았다.
걸음을 재촉하여 드디어 상봉에 올랐다.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이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바위에 걸터앉아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

일출 장면은 대단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하느님의 조화였다.
나는 모세가 구름 속에서 사십 주야를 하느님께 부복(俯伏)하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는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가지고 하산할 수 있었다.
모세가 얼마나 감격해 했을까 상상하면서 산을 내려오니 발걸음이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나는 흥에 겨워서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를 콧노래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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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게디, 마사다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순례 둘째 날에 당도한 ‘엔게디’는 ‘아이들의 샘’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연중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수와 열대식물들이 ‘죽은 바다’로 불리는 사해와 아주 대조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옛날 다윗이 사울 왕의 노여움을 피하여 엔게디 위의 어느 동굴에 숨어 생명을 보존하기도 했고, 협곡의 동굴에서는 유명한 ‘사해사본’ 성경의 두루마리와 종교의식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엔게디에는 온천 유원지까지 있어 수많은 관광객과 순례자들이 일 년 내내 온천을 즐긴다.
피부미용에 좋다는 사해 진흙으로 온몸을 새까맣게 바르고 사해 바닷가에 서있는 우리 일행의 모습이 절로 웃음 터져 나오게 했다.
사해는 염분의 농도가 보통 바다물의 몇 배나 되어 자유형 헤엄을 치노라면 제대로 되지 않고 뒤뚱뒤뚱해서 보는 이들의 웃음거리가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벌렁 누워 양손과 양발을 물 밖에 내어놓고 배영을 하는 것이다.

그날따라 그곳에서 장거리 경주대회가 있어 도로가 차단되었다.
오후에 가기로 한 마사다에 못 가게 될까 봐서 조바심이 났다.
오후 4시가 넘어서야 통행이 가능해져 마사다로 갈 수 있었다.
엔게디에서 마사다까지의 거리는 약 16km인데 영화에서 본 적이 있는 마사다의 난공불락 바위절벽의 위용을 벌써 이십 리 밖에서도 버스 창문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안내하는 목사님은 케이블카가 4시 30분에 서비스를 중단하니 속히 케이블카에 타라고 재촉했다.
우리 일행은 서둘러 케이블카를 타고 고도로 올랐는데 4km 떨어져 있는 사해가 어느덧 발밑에 보인다.
깎아지른 절벽을 거의 직선처럼 올라가는 케이블카 안에서 안내인이 마사다의 위용에 관해 설명했다.
동쪽으로 260m, 서쪽으로 180m로 깎아지른 절벽이 과연 지상 최대의 자연요새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스위스 사람이 제작한 케이블카는 정상에 약 30m 못 미치는 지점에서 정차했다.
그곳에서부터 우리는 절벽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만들어놓은 인공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했는데 옆을 보니 천길만길 낭떠러지여서 현기증이 나고 소름이 끼쳤다.
그저 계단만 보면서 오르는데 절벽 사이로 사람이 만들어놓은 수로가 보였다.
비오는 철에 빗물을 모아 저장하는 물탱크라고 안내인이 설명해주었다.

마침내 우리는 정상에 올랐다.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는 정상이 뾰족할 것처럼 느껴졌는데 막상 올라와보니 넓이가 80m2나 되는 광장이었으며, 광장 주위에 돌로 성을 쌓아 방어벽을 만들어놓았다.
우리는 숨 돌릴 시간도 없이 마사다 정상 평면도로 앞에 모여 역사적 사건들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엄연한 역사적 사실에 설명을 듣는 사람들 모두 숙연해졌다.
올라오면서 감격하고 흥분해서 시끄럽게 떠들던 소리들도 어느새 사라졌다.

기원전 40년 헤로데 대왕이 그곳에 요새를 만들고 소형 별장식 궁전과 로마식 목욕탕 시설을 완비했다.
헤로데 대왕은 자신의 정치적 망명처를 마련해놓은 것이다.
로마 군대가 68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하자 유다인 애국자들은 벤 야이르의 지도하에 예루살렘 성을 빠져나와 마사다로 와서 로마에 대한 투쟁을 계속했다.
당시 로마의 팔레스타인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제10군단 프라비오스 실바 장군은 마지막 저항지인 마사다를 탈환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두려고 했다.
약 오천 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실바 장군 자신이 직접 출전하였으나 지세가 워낙 험해 계속 실패하였다.
실바 장군은 나중에 마사다 주위에 5km에 달하는 외곽 성벽을 구축하고 주야로 지키면서 중요한 지점 약 여덟 곳에다 막사를 설치하고 유대인들이 항복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항복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공격을 개시했다.

장군은 수천 명의 유다인 포로들을 강제 동원하여 사해 반대편의 마사다 동쪽 산악지대로 연결되는 지점을 택해서 둑을 쌓아 절벽을 메운 후 정상까지 군마가 올라갈 수 있도록 진입로를 만들었다.
진입로는 몇 년 동안에 걸쳐 유다인 포로들에 의해서 구축되었다.

마사다 요새를 공격하기 시작한 지 5년 후인 72년 최후의 날이 왔다.
유다의 지도자 벤 야이르는 960명 전원을 모아놓고 최후의 날을 맞아 역사에 길이 남을 연설을 한 후 비장한 결심을 밝혔다.
원수들의 손에 죽든가, 아니면 끌려가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자결하자고 외쳤다.
그 길만이 승리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로마군은 마사다를 점령할지언정 자신들의 정신만은 점령하지 못할 것이라고 외쳤다.

그들은 손에 손을 잡고 혹은 목을 얼싸안고 하느님께 간구했다.
과연 하느님은 생존해 계십니까?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주시던 하느님은 당신의 성전을 파괴하고, 당신이 택한 백성의 나라를 로마 군대에 넘겨주시고, 최후의 보루 마사다 요새까지 저들의 손에 넘겨주시렵니까?
그들은 열 명을 제비뽑아 그 열 명으로 하여금 950명을 죽이도록 했고, 그 열 명도 자결했다.

실바 장군은 마사다 요새를 공격하는데도 저항이 전혀 없어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요새에 당도하여 그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 그는 이스라엘을 완전히 점령할 수는 없었노라고 말했다.
실바 장군은 시체와 노획한 물자들을 정리하면서 또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한다.
식량창고와 물탱크에 아직도 3년 이상 먹을 수 있는 양식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날의 역사는 오늘의 이스라엘 국민들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으며, 그들의 호국정신은 영원히 이스라엘의 민족혼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군 장교는 임관식과 애국선서를 마사다에서 거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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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 Protestantism

<미셀파스투로의 색의 비밀>(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1)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 가운데서 우상파괴 운동은 잘 알려져 있는 데 반해, 함께 주장한 ‘색채 다변화 운동’19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색채 전쟁(모든 기존 색채에 대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적어도 어느 특정 색에 대한 전쟁)은 루터와 칼뱅 및 그들의 후계자들이 제정한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윤리에서 항상 중요한 부분을 점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인쇄된 책과 판화(요컨대 “흑백”문화)가 승리를 거둔 시기인 16세기 초에 생겼으나, 중세의 색채 윤리관을 계승하고 있는 동시에 완벽하게 그 시대의 부산물이기도 했다.
이 교의는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의 몇몇 분야(예배의식, 옷, 집, 미술, 상업)에서 “검정―회색―하양” 축상에 전체적으로 통일된 색채체계를 장려하고 실행했다.
그런 이유로 다른 색들(파랑만은 가끔 남겼다)은 축출되었다.
이 점은 칼뱅과 츠빙글리가 제일 철저했다.
그러나 1527년에 『의복론』(츠빙글리도 이 책에서 몇몇 개념들을 받아들였다)을 저술한 신학자 메란피톤은 이 두 사람에 앞서서 이미 흑색 윤리, 암색 윤리를 펼쳤다.
이것이 프로테스탄트 제국의 윤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실제로 옷 색깔에 관한 이 윤리관은 오랫동안 영향을 미쳐왔다.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적 가치관은 18~19세기에 걸쳐 당시 생겨나고 있던 자본주의의 가치관이 되고, 다음으로 산업사회의 가치관, 그리고 서양 사회에서 “부르주아 가치관”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부르주아 가치관은 지금도 우리의 의복 관습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의 검정양복, 흰 와이셔츠, 신사복, 턱시도, 야회복 등은 색채에 관한 프로테스탄트적 윤리관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어두운 색이 남성복에서는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후에 검정에서 벗어날 때 너무 방종에 빠지지 않도록 현대사회는 하나의 안전한 대책을 찾아냈는데 그것이 군청색이다.
20세기를 통해서 이 군청은 검정이 점하고 있던 스포츠나 레저 의류, 그 밖의 모든 제복으로 거의 모든 영역을 점령해갔다.
청바지(Jeans,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상징하는)도 앵글로색슨의 프로테스탄트적 윤리의 산물로 생각된다.
청바지도 매우 밝은 색이 있고 빨아서 바랜 듯한 색도 있다.
그러나 결국에는 개념적으로 이 청바지도 어두운 색이고 이러한 윤리를 받아들인 앙시앙 레짐의 귀족들이 입던 “검정 바지”를 이어받은 것이다.

2) 의복이 그렇다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다른 물건도 같을 것이다.
19세기를 지나 20세기에서조차도 일상의 공산품들은 대부분 남자 옷처럼 검정, 하양, 회색, 갈색이었다.
여기에는 염색 기술상의 이유뿐 아니라 이념적인 이유도 있다.
위생기구, 취사용품, 전화기, 만년필, 타자기, 카메라, 자동차 등은 수십 년 동안 색을 가질 수 없었다.
말하자면 이것들에는 프로테스탄트의 색, 즉 검정, 회색, 하양만이 있었던 것이다.

검정, 회색, 하양 이외의 색, 특히 따뜻한 색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물질문명 가운데로 들어온 것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하양에서 노랑으로, 검정에서 녹색이나 파랑으로 갑자기 이동한 것은 아니다.
그 추이는 도중에 파스텔 색조라는 단계를 거쳤다.
1960년대 주방 색, 목욕탕, 자동차, 속옷, 잠옷, 테이블보, 냅킨, 수건의 색 등이 모두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걸쳐서 진하지도 선명하지도 않고, 분명하게 무슨 색이라고도 할 수 없는 파스텔 색을 거쳐 갔다.
플라스틱 제품들도 최근까지 선명하고 진한 색을 갖지 못했다.
파스텔 색은 처음에는 미술과 그림에, 다음에는 광고에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새로운 색이 서서히 화학적으로 또한 윤리적으로 가능해짐에 따라 점차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에까지 사용되었다.
현재는 일상에서 “선명하고”, “튀는” 색을 주저 없이 사용한다.
그러나 복고주의의 반동을 피하기도 어렵다. 최근에는 선명한 색이 너무나 범람하여 오히려 이 색들이 싫어지고 원래의 검정, 회색, 하양 계열의 색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 「퇴색」, 「영화」, 「자동차」, 「속옷」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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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법규 Traffic rules

<미셀파스투로의 색의 비밀>(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색을 신호체계로 연구하려는 사람에게 교통법규는 대표적인 연구영역이다.
역사학, 사회학, 심리학, 기호학, 그리고 언어학이 이 영역에서는 서로 만나고 얽혀서 서구문화가 만들어낸 가장 효율적인 신호체계(나중에 서서히 지구 전역으로 확산되었다)가 되었다.
그런데 교통법규와 그 표현수단인 신호표지가 사회학자뿐만 아니라 기호학자나 이미지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에게도, 이렇게 적은 언급과 연구밖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역사적으로 도로표지는 해운신호, 철도신호의 유산이다.
19세기 말, 도로표지가 출현하기 이전에 이미 사용되고 있던 체계와 완전히 새로 완성된 도로표지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표지와 신호의 엄밀한 계보가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면 관계로 이 계보를 다 더듬을 수 없다.
다만 교통법규와 색채세계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교통법규에 사용되는 주요한 색의 기능 방식만 지적하고자 한다.

신호표지는 세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수평 표지(도로면에 그려지는 지시사항), 수직 표지(도로표지판), 빛에 의한 표지(교통신호, 점멸신호)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도 각 색의 의미, 함축성(말의 명시적인 의미에 상대되는 암시적인 의미, 그 말이 띠고 있는 풍성한 감정적·사회적·문화적 의미)은 변하지 않는다.
사용되는 색은 빨강, 파랑, 노랑, 녹색, 흰색, 검정에 한정된다.
이들 여섯 가지 색은 서구에서 중세 이래로 문장(紋章)이나 상징해 온 색채 체제의 기본색이다.
15∼17세기에 확립된 색상체계에 의한 흰색과 검정의 배제나, 원색과 보색의 ‘과학적’ 구별이나 근래의 보라색, 분홍색, 주황색의 지위향상도 이들 여섯 색의 우월한 위치는 넘볼 수 없었다.

교통표지판에서 가장 중요한 색은 흰색, 빨강, 파랑의 세 가지이다.
그러나 흰색은 하나의 색으로 사용되지는 않고 다른 색과 대조를 이루며 사용된다.
흰색이 그 자체로 고유한 의미를 갖지는 않기 때문에 대부분 바탕색으로 사용된다(크림색이나 밝은 베이지색도 좋다).
때문에 흰색은 대부분 다른 색과 조합되어 의미를 유발한다.
반면 빨강은 언제나 위험과 금지의 관념과 결부된다.
빨강이 표지를 덮고 있는(무수한 예가 있다) 경우에는 위험을 나타내어 흰색과 함께 통행금지, 정지, 그리고 파랑과 함께 쓰인 몇몇 경우에서는 주차금지를 나타낸다.

파랑이 바탕색인 경우 ― 그러한 예는 많다 ― 규제(최고속도, 방향규제 등)나 지시(주차, 병원, 고속도로구간 시작)를 의미한다.
이 경우 파랑은 흰색과 함께 사용된다. 노랑은 특히 일시적인 지시의 표지로 사용된다.
노랑은 차선변경 혹은 노선변경(사고, 공사, 작업 등)의 상황에서 운전자에게 신중한 주행을 요망하는 표지판의 바탕색으로 사용된다.
사용빈도가 가장 적은 녹색은 언제나 허가의 의미로 사용된다(이 책의 항목 가운데 하나인 「신호등」이 이것에 해당한다).
녹색은 또 이용이 권장되는 주 도로(예컨대 우회도로)나 어떤 범주의 도로(파랑, 노랑, 녹색, 흰색 등 각 색의 서열은 일반적으로 고속도로, 간선도로, 중간규모 도로라는 교통도로망의 서열에 대응한다)를 지시하기도 한다.
검정색은 단순히 어떤 정보(흰색 바탕 위에 검은 기호)를 지시하거나, 사선을 부가하여 금지(추월금지, 제한속도, 클랙슨 금지)의 해제를 알려준다.

이렇다 하더라도 교통법규의 색채는 우리의 생각만큼 엄밀하지 않고 유연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아마도 이러한 유연성 때문에 이 신호체계가 유효함이 틀림없다.
각각의 색은 여러 개의 암시적 의미와 명시적 의미를 가지며, 또 같은 관념도 다양한 색으로 표시할 수 있다.
또한 나라에 따라서(독일, 이탈리아, 영국) 지방이나 도로의 종류에 따라서 표지가 변형되기도 한다.
그러나 금지를 의미하는 빨강과 같은 강한 개념은 어느 나라에서나 같다.
옛날의 교통법규 교본에 빨강은 그다지 사용되지 않았는데(그러나 파랑은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금지항목이 매우 적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두꺼운 교본에는 빨강이 넘쳐난다.
바야흐로 위험과 금지가 도처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만으로도 20세기 초부터 20세기 말까지 현대사회가 얼마나 변모했는가를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 「자동차」, 「국기」, 「문장학」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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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Money

<미셀파스투로의 색의 비밀>(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돈에 냄새는 없다지만 색은 있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오랫동안 이미지로서 또 상상의 세계 속에서 돈은 귀금속으로 각인된 동전과 동일시되어 왔다.
이 때문에 동전(은 혹은 은도금, 금 혹은 금도금한 동전)의 색은 도상학적으로는 물질적 실체로 받아들여진 돈의 색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돈이라는 관념에 가장 자연스럽게 결부되는 색은 금색도, 은색도 아닌 녹색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주된 이유의 하나는 미국의 통화단위를 나타내는 은행권, 요컨대 달러 지폐가 녹색이라는 점에 있다.
현대에서 돈에 얽힌 모든 것은 상징적으로(신화적이라고 해도 좋다) 달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달러 지폐의 색이 돈의 색으로 되어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명한 녹색의 달러 지폐가 처음으로 인쇄되기 훨씬 이전부터(달러 지폐는 1792~1863년에 걸쳐 서서히 나타났으며, 1863~1913년에 규격이 통일되었다) 녹색은 행운의 여신을 나타냈기 때문에 돈을 녹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더더욱 당연한 일이다.
이미 중세의 상징체계에서도 녹색은 행운과 불운, 변덕스러운 운명의 신, 희망의 실현이나 좌절을 상징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자 녹색은 자연스럽게 도박의 색(그리고 도박꾼이 사용하고 있던 비유가 풍부한 언어를 ‘녹색언어’24라고 하였다)과 노름, 특히 돈 내기 노름의 색이 되었다.
15세기 말에 이미 도박판의 색은 녹색이었다.
의미의 확대에 따라 앙시앙 레짐 아래서 녹색은 점차 도박과 카지노의 세계와 관계되었을 뿐 아니라 화폐, 은행, 금융의 색이 되기에 이른다.
달러 지폐는 미합중국 독립 이전부터 이미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던, 색의 상징체계를 강화하고 연장한 것에 불과하다.

이제 이 시대의 전자화폐가 계속 녹색과의 관계를 지속할 것인가?
돈은 냄새를 잃어버린 후 색도 잃어버리게 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자공학에도 색이 있기 때문이며, 그 색도 대부분 스피드와 유동성, 변환성의 상징인 녹색이기 때문이다.

녹색은 화학적으로나 상징기호적으로 가장 불안정한 색이다.
앞으로도 이 색은 가장 불안정한 여신, 즉 행운의 여신을 상징하는 색으로 계속 남을 것이다.

⊙ 「녹색」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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