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여 황제들의 도시 : 이스탄불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이스탄불은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지점에 있으며 예루살렘과 로마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3대 역사적인 도시 중 하나다.
보스포로스 해협이 이스탄불을 둘로 가르고 있는데, 동쪽은 아시아에 속하고 서쪽은 유럽에 속하므로 동양과 서양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곳이다.
이스탄불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약 1600년 동안 세계를 제패한 세 제국들, 즉 로마, 비잔틴, 오스만 투르크의 중심부로서 무려 120여 황제들이 그곳에서 세계를 호령했다.
그래서 이스탄불을 일명 황제들의 도시라고도 한다.
이스탄불은 원래 비잔티움(Byzantium)으로 불리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330년에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긴 후 새 수도의 이름을 ‘신 로마(Nea Roma)’로 붙였지만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불렀다.
보스포로스 해협 옆에 있는 무명도시 비잔티움을 세계적인 도시로 건설한 사람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였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해주었다.
그리스도교사의 쾌거였다.
그는 로마 제국의 영토를 동방으로 넓히면서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서 지리적으로 중심부가 되는 비잔티움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기로 했다.
그는 6년에 걸쳐 비잔티움을 제국의 수도로 손색이 없도록 단장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에 밀라노에서 그리스도교를 공인하는 칙령을 내렸다.
지하에 숨어 복음을 전하면서 갖은 박해를 받았던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여간 기쁜 소식이 아니었으며, 세계사에 중대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황제 자리에 오르기 전 경쟁자 막센티우스(Maxentius)와 한바탕 싸움을 치뤄야 했다.
그가 승리하게 된 이야기를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교회사의 아버지 유세비우스가 기록으로 남겼는데 유세비우스는 친히 황제로부터 들은 것을 기록했다고 전했다.
312년 10월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를 두고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 사이에 역사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운명의 결전이 있기 전날 정오 콘스탄티누스는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았다.
그것은 십자가였다.
광채가 나는 십자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것으로 승리하리라.”
이튿날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가 승전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십자가 환상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콘스탄티누스가 막센티우스와 전투를 벌이던 날 정오, 태양 위에서 십자가가 빛을 발하는 것을 보았는데 십자가 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것으로 승리하리라.’
그 문구를 콘스탄티누스 혼자만이 본 것이 아니라 전군이 보았다고 한다.
그날 밤 콘스탄티누스는 꿈에 그리스도를 보았으며, 그리스도는 그에게 십자가를 보이면서 “이것으로 군기를 삼아라”하고 말했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의 명을 따랐고,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황제로 즉위한 후로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교회를 추인하기 위한 많은 법령을 제정하였으며,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법으로 정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비롯하여 예루살렘, 올리브 산(감람산), 베들레헴 그리고 예수님의 무덤에 교회를 건립했다.
또한 성경 필사본 50부를 만들어서 각 교회에 증여했다.
‘니케아(Nikaia) 회의’는 그리스도교사 최대의 사건이자 분기점이었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그 회의에 직접 참여했다.
회의는 325년에 콘스탄티노플 근처 니케아에서 개최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더를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벌인 알렉산더파와 아리우스를 중심으로 한 교파가 교리에 관해서 논쟁을 벌였는데 정통과 이단을 판가름하는 회의가 되었다.
알렉산더의 수행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회의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니케아 회의에서 삼위일체(Trinity)를 신조로 한 ‘니케아 신경’이 선언되었다.
아타나시우스가 하느님 아버지, 아들, 성령은 하나라고 주장한 데 대해서 아리우스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그리스도는 인간이며, 하느님과 같은 신성을 가진, 피조물들 가운데 최고이다’라고 주장했다.
아타나시우스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회의에서 ‘니케아 신경’이 선택되자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규정받아 축출당하고 말았다.
폐회 날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성연을 베풀어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을 위로했다.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오스만 투르크 군대에 의해서 함락될 때까지 약 일천 년 동안 비잔틴 제국, 동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동방정교회의 중심지였다.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고쳐 불렀다.
투르크족은 몽고족, 만주족, 조선족, 일본족과 함께 알타이어족에 속하며 우리와 마찬가지로 동양인이다.
투르크족은 11세기에 몽고에서 서역으로 진출한 유목민 셀주크 투르크 왕조가 쇠퇴하자 오스만 1세(1258∼1326년)를 시조로 하여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했던 것이다.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은 영토를 중동 아시아를 비롯하여 유럽 일부까지 확장했었는데, 1차 세계대전 당시 투르크는 독일의 동맹국이었으므로 1920년 세브르 조약에 의해서 현재의 영토로 축소되고 말았다.
그 후 그리스,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이즈미르(Izmir)를 점령했으나 투르크의 케말 파샤(Kemal Pasha) 장군은 그들을 격퇴하고 1923년에 스위스 로잔에서 로잔 조약을 맺어 현 국토를 확인하고 완전 독립국가로 국제적인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세브르 조약에 분개한 케말 파샤는 투르크의 재건과 민주주의를 내세워 1923년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타도하고 터키(투르크) 공화국을 탄생시켰다.
그는 터키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터키를 근대화시키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케말 파샤 대통령은 국민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한 시간 동안의 정의가 60년 간의 예배보다 낫다.”
1938년에 타계한 파샤 대통령을 국민들은 국부로 추앙하여 케말 아타투르크라고 부른다.
아타투르크(Ataturk)는 터키어로 ‘국부’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