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카타리나 수도원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우리는 아침에 일라트 해변으로 갔다.
동쪽으로 요르단의 아카바(Akaba) 항이 보인다. 1991년 42일 동안 세계를 긴장 속에 몰아넣었던 걸프 전쟁 때 이라크로 보내진 군수물자가 수송된 곳이 아카바 항구였다.
우리는 어제 타바(Taba) 국경을 넘어서 이집트로 왔던 것이다.

우리는 시나이 반도 씬(Sin) 광야를 세 시간 가량 달린 후 홍해 해변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다시 세 시간을 달려 시나이 산에 도착했다.
호렙 산이라고도 부르는 시나이 산은 시나이 반도 안에 우뚝 솟아 있다.
삼각형 모양의 시나이 반도는 그 면적이 이스라엘보다 두 배 이상 넓은 6만 1,000km2나 되어 구약시대 사람들이 시나이 반도를 “광대한 광야”라고 부르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우리는 산록에 있는 호텔에 투숙했는데 자연석으로 건축된 방갈로는 제주도의 옛 돌집을 연상하게 했다.

다음날 새벽 2시에 기상하여 시나이 산 등정길에 올랐다.
해발 2,285m 높이의 거대한 바위산이다.
아랍인들은 시나이 산을 “제벨 무사(Jebel Musa)”라고 불렀는데 ‘모세의 산’이란 뜻이다.
반마일쯤 올라가 ‘성 카타리나 수도원’ 광장에 도착했다.
수도원은 해발 1,530m 지점에 있다.
수도원 안에 이드로의 우물이 있고, 모세가 부름을 받았다는 떨기나무가 있다.
떨기나무는 시나이 반도 남쪽에서만 자라는 특이한 종자로 다른 곳에 이식하면 죽는다고 한다.
떨기나무가 너무 붉어서 모세는 불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성 카타리나 수도원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서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어라” 하고 말씀하신 곳에 건립되었다.
수도원은 그리스 정교회 소속이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에게 박해받던 무렵 순교한 어느 귀족의 딸 이름을 따서 성 카타리나라고 부른다.
6세기 중엽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황제의 명에 의해 건립된 후 지금까지 1400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었다.
551년에 완공된 수도원에서는 수도사들이 어김없이 매일 하루에 두 번씩 예배를 드린다.
예배당 전면에는 예수, 모세, 엘리야, 그리고 예언자들의 모습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수도원 내 도서관에는 귀중한 자료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는데 3,000점 이상의 고대 성경사본과 5,000권 이상의 희귀한 성경들이 있다.
바티칸의 교황청 도서관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성경사본과 희귀성경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는 곳이다.

19세기 중엽 독일의 학자 티젠도르프가 수도원에서 ‘시나이 산 사본(Codex Sinaiticus)’을 발견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그는 수도원을 세 번 방문한 끝에 1859년 그것을 찾아냈다.
‘시나이 산 사본’은 300년대 후반에 필사된 것으로 신약성경 전체가 수록된 사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티젠도르프는 사본을 유럽으로 가지고 가서 당시 동방 정교회의 보호자였던 제정 러시아 황제에게 기증하였다.
그 후 러시아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1933년에 그것을 10만 파운드에 영국 정부에 팔았으므로 사본은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75년 9월 놀라운 일이 수도원에서 벌어졌다.
낡은 방을 보수하려고 벽을 헐자 벽과 벽 사이 공간에서 수많은 성경사본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무려 오십 상자분의 성경사본이었다.
수도원은 그 사실을 극비에 부치고 사본을 보관했지만 독일의 어느 신문이 1977년에 그 사실을 보도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수도원 측은 아직도 사본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알려진 학자들에 한해 30분이라는 시간제약 하에 필사나 사진촬영을 금한 채 관람을 허락하고 있다.
독일의 신약성서 학자 마르틴 헹겔은 그것들이 “사해사본 발견 이후 최대의 사본 발견”이라고 했는데 내용의 전모는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상태다.

모세가 하느님의 음성을 들은 곳이 어디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다만 수도원을 세워 상징적으로 기념하고 있을 뿐이다.

모세는 미디안 사제인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
그가 양떼를 이끌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시나이 산)으로 갔더니 야훼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떨기에서 불꽃이 이는데도 떨기가 타지 않는 것을 본 모세가 “저 떨기가 어째서 타지 않을까? 이 놀라운 광경을 가서 보아야겠다” 하며 그것을 보러 오는 것을 야훼께서 보시고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하느님께서 부르셨다.
그가 대답하였다.
“예, 말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하시고는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선조들의 하느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모세는 하느님 뵙기가 무서워 얼굴을 가렸다.
야훼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그 땅에서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 가나안족과 헷족과 아모리족과 브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으로 데려가고자 한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의 아우성 소리가 들려온다.
또한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못살게 구는 모습도 보인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어라.”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인데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건져내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네 힘이 되어주겠다.
이것이 바로 내가 너를 보냈다는 증거가 되리라.
너는 나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다음 이 산에서 하느님을 예배하리라.”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그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라고 하시는 그분이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일러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영원히 나의 이름이 되리라.
대대로 이 이름을 불러 나를 기리게 되리라. 【출애굽기 3: 1-15】

모세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이집트를 탈출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모세는 하느님이 ‘나는 곧 나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바로 야훼를 뜻한다.
히브리어에는 미래형이 따로 없으므로 ‘나는 언제까지나 나일 것이다’라는 뜻도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나온 모세는 시나이 산을 향해 걸었으며, 산 정상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한 후 하느님으로부터 두 개의 돌 판에 새겨진 ‘십계명’을 받았다.
예언자 엘리야도 이 산의 동굴에서 침묵 가운데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
구약성서는 시나이 산을 하느님의 산이라고 불렀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산들 가운데 가장 성스러운 산으로 여겼다.
우리가 정상을 오르는 것도 그러한 생각 때문이다.

약 반 시간쯤 더 올라갔을 때 베두인족 낙타꾼들이 낙타를 타라고 권했다.
산중턱까지 오르는 데 10달러라고 한다.
십여 명이 낙타에 올랐다.
기온이 낮아 한기가 느껴졌지만 얼마간 오르니 땀이 나고 숨이 차다.
주위가 캄캄한데 낙타는 바위틈 돌 밭길을 사뿐거리며 조심스럽게 걷는 것이 익숙한 걸음이다.
한 발만 헛디뎌도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터인데 낙타는 수없이 다닌 길이라 우리들을 휴게소까지 무사히 날라다주었다.
거기서부터 훨씬 가파른 길이 시작되므로 낙타는 더 이상 오를 수가 없다.
우리는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걸어서 정상을 향했다.

설악산 대청봉보다 600m 가량 더 높은 정상에 오르니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이 그곳에 당도해 있었다.
우리 일행은 먼저 예배를 드렸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던 장소라고 생각하니 감회가 깊고 꿈만 같았다.
멀리 동쪽에서 쟁반 같은 태양이 떠오르자 시나이 산 주위의 돌산들이 일제히 붉게 물들었다.
너무도 장엄하고 신비로운 장면이라 바라보는 사람들을 신비감에 싸이게 했다.

야훼께서 시나이 산 봉우리에 내려오셔서 모세에게 산봉우리로 오르라고 하시자 모세가 올라갔다. 【출애굽기 19: 20】

시나이 산은 주변 산맥이 여러 가지 색의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매우 아름다웠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바위산이다.
산봉우리에는 눈이 군데군데 쌓여 있었지만 다행히 길에는 눈이 얇게 덮여 있어 하산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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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비딤 골짜기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오전 10시경에 르비딤 골짜기로 갔다.
그곳은 계곡에 있는 오아시스로 야자수와 기타 열대식물이 우거져 있다.
계곡 바위틈에서 샘물이 솟아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이 말라 아우성쳤을 때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쳐서 물이 나오게 했던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 백성 온 회중은 씬 광야를 떠나 야훼의 지시대로 진지를 옮겨가면서 전진하였다.
르비딤에 이르러 먹을 물이 없는 것을 보고, 백성들은 모세에게 먹을 물을 내라고 들이대었다.
모세가 “어찌하여 나에게 대드느냐? 어찌하여 야훼를 시험하느냐?” 하고 말했지만, 백성들은 당장 목이 말라 견딜 수 없었으므로 모세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나왔느냐? 자식들과 가축들과 함께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었다.
“이 백성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당장 저를 돌로 쳐 죽일 것만 같습니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이 백성보다 앞서 오너라.
나일 강을 치던 너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오너라.
내가 호렙의 바위 옆에서 네 앞에 나타나리라.
네가 그 바위를 치면, 물이 터져 나와 이 백성이 마시게 되리라.”
모세는 이스라엘 장로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대로 하였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대들었다고 해서 이 고장 이름을 므리바라고도 하고 “야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안 계신가?” 하며 야훼를 시험했다고 해서 마싸아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출애굽기 17: 1-7】

아말렉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이 싸운 곳도 이 골짜기였다.

아말렉 사람들이 몰려와 르비딤에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싸움을 벌였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였다.
“장정을 뽑아서 내일 아말렉과 싸우러 나가시오. 나는 하느님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산꼭대기에 서있겠소.”
여호수아는 모세가 지시하는 대로 아말렉과 싸우러 나갔다.
모세와 아론과 후르는 언덕 위에 올라가 있었다.
모세가 팔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가 팔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다.
모세의 팔에 힘이 빠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돌을 갖다놓고 모세를 그 위에 앉히고 아론과 후르는 모세의 팔을 좌우에서 각각 붙들어 떠받치니 해가 질 때까지 그의 팔은 처지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아말렉과 그 백성을 칼로 쳐 이겼다. 【출애굽기 17: 8-13】

우리는 버스를 타고 르비딤 골짜기를 떠나 서남쪽으로 가면서 수르(Shur) 광야를 가로질렀다.
수르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처음으로 통과한 광야였다.
홍해 근처 마라의 우물에 들렀는데 마라는 ‘쓰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물을 마시려고 하니 써서 마실 수가 없었는데, 모세가 나뭇가지 하나를 던지니 쓴 물이 단 물이 되어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거느리고 홍해바다에서 수르 광야로 진을 옮겼다.
그들은 사흘 동안 가면서도 물을 만나지 못하다가 마라에 다다랐으나 그곳 물은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고장을 마라라고 불렀다.
백성들은 모세에게, 무엇을 마시라는 말이냐고 하면서 투덜거렸다.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자, 야훼께서 나무 한 그루를 보여주셨다.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 단 물이 되었다.
야훼께서는 바로 여기에서 그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주시고 그들을 시험해보셨다. 【출애굽기 15: 22-25】

우리는 수에즈 운하를 탐방한 후 터널을 지나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로 향했다.
사막을 네 시간 가량 차로 달린 후에야 카이로 시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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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와 고대가 공존하는 도시: 카이로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긴 나일 강은 무려 6,670km를 흘러 마침내 지중해에 합류한다.
강물은 지중해로 합류되기 전 약 200km 지점에서 갈라져 부채꼴 모양의 삼각주(델타)를 형성한다.
카이로는 강물이 여러 지류로 갈라지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카이로의 인구는 약 1, 200만 명으로 아프리카 대륙과 중동에서는 최대의 도시이다.
현대와 고대가 공존하는 그 혼잡한 도시를 순례자들이 방문한다.
카이로는 인류 문명의 발상지로 꼽히는 곳이지만 현대에는 빈곤한 도시다.
빈부의 차이가 심한 카이로에는 고물차들이 먼지를 내면서 행렬을 이룬다.

이집트 국토의 96%가 사막이고 4% 정도의 나일 강 하구 삼각주 지역만이 옥토이다.
삼각주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로 전 국민이 먹고도 남아서 중동에 팔기까지 한다.
요셉이 서른 살 때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어 식량을 관장했다는 구약성서의 이야기는 아주 흥미롭다.

파라오는 자기 신하들에게, “우리가 이처럼 신통력을 지닌 사람을 어디서 찾겠느냐?” 하고는 요셉에게 부탁하였다.
“하느님께서 너에게 이 모든 것을 알려주셨으니 너만큼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나의 온 왕궁을 네 수하에 두겠다.
내 백성은 다 네가 시키는 대로 따를 것이다.
내가 너보다 높다는 것은 이 자리에 앉았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파라오는 요셉에게 “내가 너를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운다”고 하며, 손에서 옥새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워주고는 고운 모시옷을 입혀준 다음 목에다 금목걸이를 걸어주었다.
그리고는 요셉을 자기의 병거에 버금가는 병거에 태우고 행차할 때마다 앞서가며 “물렀거라” 하고 외치게 하였다.
이렇게 그를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운 다음, 파라오는 요셉에게 일렀다.
“내가 왕이지만 너의 승낙 없이는 이집트 전국에서 사람들은 손 하나 발 하나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창세기 41:38-44】

히브리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는 고센 지역은 삼각주 지역의 동쪽으로 아주 비옥한 땅이다.
흉년이 들면 수량이 줄고 풍년이 들면 수량이 늘어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강물의 범람을 그들이 섬기는 태양신이 가져다주는 은총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나일 강물의 범람을 불가사의하게 여겼으므로 태양신의 조화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나일 강 수원을 찾아 아스완까지 올라갔으나 찾지 못했다.
나일 강은 고대부터 매년 7∼9월 3개월 동안 정기적으로 범람했다.
비가 오지 않는 이집트 사막에 강이 범람하면 강물에 실려 온 천연의 석회질 비료가 강 하구 삼각주 지역의 옥토를 적셔준다.

18세기에 유럽의 각 나라 탐험대들이 나일 강의 수원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6,670km의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대에는 187명의 프랑스 학술원의 조사단이 편성되어 이집트 탐험을 시작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후에 “전쟁에서는 졌지만 문화에서는 이겼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탐험가 버턴, 스피크, 리빙스턴은 나일 강 수원 탐험의 공로자들로 알려졌다.
특히 영국 선교사 리빙스턴은 1840년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부임하여 40년 동안 전도와 탐험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1881년 임종에 임박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았다. 나일 강 수원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만큼 나일 강의 수원을 발견하는 일은 어려웠다.

나일 강의 수원은 백나일과 청나일 두 지류로 나눌 수 있다.
백나일은 상류에 있는 빅토리아 호로부터 내려오는 본류이고, 청나일은 동쪽 에티오피아의 다나 호로부터 내려오는 지류이다.
빅토리아 호는 수면이 해발 1,134m이고 길이는 320km이며, 넓이는 270km2, 강의 깊이는 평균 45km에 달한다.
빅토리아 호에서 내려오는 물이 나일 강의 평균 수위를 이룬다.
에티오피아에 있는 청나일 상류 다나 호는 수면이 해발 1,756m로 빅토리아 호보다 500m가 더 높다.
매년 여름이 되면 정기적으로 불어오는 계절풍이 인도양의 습기를 몰고 오다가 킬리만자로 산맥을 넘지 못하고 멈추어 비를 뿌린다.
에티오피아 고지는 3월부터 9월까지 우기라서 대량으로 비가 내리기 때문에 다나 호의 수량이 급증한다.
깊이 14m의 얕은 호수인 다나 호는 석회질의 토사와 진흙을 담은 급류를 흘려보내 나일 강물을 범람시킨다.
이리하여 나일 강 범람의 수수께끼는 풀리게 되었다.
지금은 아스완 댐이 건설되어 수위를 조정하기 때문에 범람을 방지할 수 있다.

한때 아랍 국가들의 맏형 구실을 했던 이집트의 카이로는 아랍권에서 가장 많은 이슬람교 사원(모스크)을 가지고 있다.
카이로 중심지에 187m의 높이로 세워진 ‘카이로 타워’에 올라 시가를 내려다보면 사원의 뾰족한 첨탑이 숲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카이로에는 성지로 불리는 ‘콥틱 교회’가 있다.
‘콥틱(Coptic)’이란 말은 애굽코스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애굽코스란 이집트 원주민 또는 그들의 말을 뜻한다.
그러므로 ‘콥틱 교회’는 이집트 원주민들의 교회라는 의미이다.
오늘날 이집트에는 약 750만 명의 콥틱 교인들이 있는데 전체 인구의 15%에 해당한다.
콥틱 교회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교회 가운데 하나다.
교회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복음서의 저자 마르코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와서 교회를 세운 것이 콥틱 교회의 모체라고 한다.
사도행전에 보면 마르코는 사도 바울로와 함께 전도여행을 했는데 말년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를 포교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고 한다.

콥틱 교회는 자기들의 교회 원년을 284년이라고 하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가 로마의 황제로 즉위한 해이다.
교회사에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재임기간을 ‘순교자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가 그리스도교인을 극심하게 박해했으므로 그 시기에 많은 순교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콥틱 교인들 가운데도 많은 순교자가 있었으므로 그때를 자기들의 교회 원년으로 삼은 것이다.

콥틱 교회는 수도원 운동이 시작된 교회이며, 그들이 콥틱어로 번역한 신약성경은 오늘날 성경사본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콥틱 교회가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451년에 칼케돈, 즉 오늘날의 터키 지역에서 개최된 종교회의에서 콥틱 교회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되어나갔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학적 견해 차이 때문이었는데, 가톨릭이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을 모두 구비했다고 주장한 반면, 콥틱 교회는 그에게는 오로지 신성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콥틱 교회는 아주 보수적인 독자노선을 걷게 되었다.

본래 카이로는 로마 군대가 주둔했던 요새 성채를 지칭했다.
640년대에 아랍인들이 이집트를 정복하자 콥틱 교인들은 파괴된 로마 군대의 요새 안으로 들어가 살았다.
그들은 그곳에 여러 개의 교회를 건립했는데 현재 다섯 개의 교회가 남아 있으며 모두 일천 년 이상 된 오래된 교회들이다.

또 다른 성지로는 ‘아부 사르가(Abu Sarga) 교회’가 있다.
그 교회를 ‘아기 예수 피난 교회’라고도 부른다.
마리아와 요셉이 헤로데 대왕의 학살을 피해서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했을 때 잠시 머물렀던 석굴 위에 세워진 교회라고 알려졌다.
교회 근처에 ‘성 바바라 교회’가 있는데 순교자 바바라를 기념하는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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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여 황제들의 도시 : 이스탄불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이스탄불은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지점에 있으며 예루살렘과 로마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3대 역사적인 도시 중 하나다.
보스포로스 해협이 이스탄불을 둘로 가르고 있는데, 동쪽은 아시아에 속하고 서쪽은 유럽에 속하므로 동양과 서양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곳이다.
이스탄불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약 1600년 동안 세계를 제패한 세 제국들, 즉 로마, 비잔틴, 오스만 투르크의 중심부로서 무려 120여 황제들이 그곳에서 세계를 호령했다.
그래서 이스탄불을 일명 황제들의 도시라고도 한다.

이스탄불은 원래 비잔티움(Byzantium)으로 불리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330년에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긴 후 새 수도의 이름을 ‘신 로마(Nea Roma)’로 붙였지만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불렀다.
보스포로스 해협 옆에 있는 무명도시 비잔티움을 세계적인 도시로 건설한 사람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였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해주었다.
그리스도교사의 쾌거였다.
그는 로마 제국의 영토를 동방으로 넓히면서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서 지리적으로 중심부가 되는 비잔티움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기로 했다.
그는 6년에 걸쳐 비잔티움을 제국의 수도로 손색이 없도록 단장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에 밀라노에서 그리스도교를 공인하는 칙령을 내렸다.
지하에 숨어 복음을 전하면서 갖은 박해를 받았던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여간 기쁜 소식이 아니었으며, 세계사에 중대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황제 자리에 오르기 전 경쟁자 막센티우스(Maxentius)와 한바탕 싸움을 치뤄야 했다.
그가 승리하게 된 이야기를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교회사의 아버지 유세비우스가 기록으로 남겼는데 유세비우스는 친히 황제로부터 들은 것을 기록했다고 전했다.

312년 10월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를 두고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 사이에 역사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운명의 결전이 있기 전날 정오 콘스탄티누스는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았다.
그것은 십자가였다.
광채가 나는 십자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것으로 승리하리라.”
이튿날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가 승전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십자가 환상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콘스탄티누스가 막센티우스와 전투를 벌이던 날 정오, 태양 위에서 십자가가 빛을 발하는 것을 보았는데 십자가 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것으로 승리하리라.’
그 문구를 콘스탄티누스 혼자만이 본 것이 아니라 전군이 보았다고 한다.
그날 밤 콘스탄티누스는 꿈에 그리스도를 보았으며, 그리스도는 그에게 십자가를 보이면서 “이것으로 군기를 삼아라”하고 말했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의 명을 따랐고,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황제로 즉위한 후로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교회를 추인하기 위한 많은 법령을 제정하였으며,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법으로 정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비롯하여 예루살렘, 올리브 산(감람산), 베들레헴 그리고 예수님의 무덤에 교회를 건립했다.
또한 성경 필사본 50부를 만들어서 각 교회에 증여했다.

‘니케아(Nikaia) 회의’는 그리스도교사 최대의 사건이자 분기점이었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그 회의에 직접 참여했다.
회의는 325년에 콘스탄티노플 근처 니케아에서 개최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더를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벌인 알렉산더파와 아리우스를 중심으로 한 교파가 교리에 관해서 논쟁을 벌였는데 정통과 이단을 판가름하는 회의가 되었다.
알렉산더의 수행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회의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니케아 회의에서 삼위일체(Trinity)를 신조로 한 ‘니케아 신경’이 선언되었다.
아타나시우스가 하느님 아버지, 아들, 성령은 하나라고 주장한 데 대해서 아리우스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그리스도는 인간이며, 하느님과 같은 신성을 가진, 피조물들 가운데 최고이다’라고 주장했다.
아타나시우스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회의에서 ‘니케아 신경’이 선택되자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규정받아 축출당하고 말았다.
폐회 날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성연을 베풀어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을 위로했다.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오스만 투르크 군대에 의해서 함락될 때까지 약 일천 년 동안 비잔틴 제국, 동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동방정교회의 중심지였다.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고쳐 불렀다.
투르크족은 몽고족, 만주족, 조선족, 일본족과 함께 알타이어족에 속하며 우리와 마찬가지로 동양인이다.
투르크족은 11세기에 몽고에서 서역으로 진출한 유목민 셀주크 투르크 왕조가 쇠퇴하자 오스만 1세(1258∼1326년)를 시조로 하여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했던 것이다.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은 영토를 중동 아시아를 비롯하여 유럽 일부까지 확장했었는데, 1차 세계대전 당시 투르크는 독일의 동맹국이었으므로 1920년 세브르 조약에 의해서 현재의 영토로 축소되고 말았다.
그 후 그리스,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이즈미르(Izmir)를 점령했으나 투르크의 케말 파샤(Kemal Pasha) 장군은 그들을 격퇴하고 1923년에 스위스 로잔에서 로잔 조약을 맺어 현 국토를 확인하고 완전 독립국가로 국제적인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세브르 조약에 분개한 케말 파샤는 투르크의 재건과 민주주의를 내세워 1923년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타도하고 터키(투르크) 공화국을 탄생시켰다.
그는 터키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터키를 근대화시키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케말 파샤 대통령은 국민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한 시간 동안의 정의가 60년 간의 예배보다 낫다.”
1938년에 타계한 파샤 대통령을 국민들은 국부로 추앙하여 케말 아타투르크라고 부른다.
아타투르크(Ataturk)는 터키어로 ‘국부’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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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소피아 대성당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우리는 ‘성 소피아(Sancta Sophia)’ 대성당으로 갔다.
비잔틴 시대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것으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명으로 537년에 건립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60년에 대성당의 기초를 세웠고 415년에 중수되었으며, 537년에야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되었다고 한다.
이스라엘 성지순례에서 언급했듯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베들레헴에 ‘예수 탄생 교회’와 시나이 산 기슭에 ‘성 카타리나 수도원’을 건립하도록 했으며 에페소의 ‘사도 요한 기념교회’ 외에도 당시 교회의 80%를 건립했다고 한다.
그는 건축광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을 로마보다도 더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려고 했다.
대성당을 건축하는 데 5년 반이 소요되었다.
예루살렘 성전보다 몇 배나 더 큰, 높이 56m, 길이 90m의 대성당이 완공되자 황제는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솔로몬 왕이시여! 내가 당신을 이겼구려!”

황제는 성 소피아 대성당을 건립하면서 에페소에 있는 아르테미스 신전의 다섯 아름 굵기의 청색 대리석기둥 여덟 개를 운반하여 세웠는데 어떻게 그것들을 운반할 수 있었는지 불가사의한 일로 생각되었다.
에페소와 콘스탄티노플 모두 항구이므로 해상으로 운반했을 것이 뻔하지만 그렇게 무겁고 커다란 대리석을 운반했다는 것이 여간 놀랍지 않다.
대성당의 천장은 대리석으로 된 둥근 돔 형태인데 그러한 천장양식은 건축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
대성당 내부의 모든 벽면은 모자이크 성화로 장식되었고 규모와 기교에서 세계에 자랑할 만한 걸작으로 손꼽힌다.
성모 마리아가 어린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자이크는 삼면 어디에서 바라보더라도 관람자를 정면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1100년 이상의 영화를 누렸던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은 오스만 투르크 군대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1453년에 막을 내렸다.
53일 간의 전쟁 끝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오스만 제국의 황제 메메트(Mehmet)는 제일 먼저 소피아 대성당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황제는 대성당의 아름다움에 감동하여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는데 그는 이슬람교도였지만 대성당을 파괴하지 않고 보존하기로 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의 새 주인이 되면서 대성당은 이슬람교 사원 모스크(Mosque)로 변모했다.
대성당에 높이 세운 십자가가 내려지고 대신 이슬람교의 초승달 상징이 올라갔다.
모자이크로 장식된 벽면은 파괴하진 않고 그 위에 회칠을 하여 지워버렸으므로 회칠을 기술적으로 제거하면 본래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다.
몇 군데 복원작업을 했는데 본래의 모습처럼 생생하지 못하고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래도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이슬람교 문화를 보존해야 한다는 터키 정부의 정책에 따라 복원작업은 현재 중단된 상태다.

이튿날 아침 일찍 우리는 ‘아렌 교회’로 갔다.
‘아렌’은 ‘평화’라는 뜻이지만 이름과 달리 아렌 교회는 비운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380년 제2차 종교회의는 예수의 신성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아리우스파 교인 삼천 명을 그곳에서 학살했다.
신학이 다르다는 이유로 교인들끼리 대대적으로 학살했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사의 수치이다.
순례자들은 그곳에서 한숨을 지을 수밖에 없다.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유물들이 진열되어 있어 박물관의 역할도 하고 있다.

이슬람 문화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는 ‘블루 모스크’는 소피아 대성당보다 더욱 큰 규모로 건립되었다.
그곳은 늘 많은 사람들이 와서 기도를 드리는 이슬람교의 유명한 성지이다.
모스크 앞에는 약 20m 높이의 오벨리스크가 서있는데 기원전 1500년에 이집트에 세워졌던 것을 옮겨다놓은 것이라고 한다.

모스크를 방문한 후 우리는 근처에 있는 지하 저수지로 갔다.
여름에는 비가 오지 않으므로 물을 저장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물이 이스탄불의 시민들에게 급수된다.
536년에 완공한 저수지는 지하에 돌계단을 만들어 내려갈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돌기둥이 136개나 되고 길이가 140m, 폭은 70m, 높이는 8m이며 바닥, 통로, 벽, 천장은 모두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지하수가 수로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소리를 지금도 들을 수 있다.

우리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황제가 살던 불바라치 궁전으로 갔다.
궁전의 문은 버스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다.
그 문은 황제와 대신들만 말을 타고 들어갈 수 있었으며, 국민들은 걸어서 통과해야 했다.
궁전 안에는 황제들이 사용했던 유물들이 진열되어 있어 당시 궁전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데 금으로 장식된 황제의 옥좌도 있다.
옥좌는 의자의 형태가 아니라 방석을 깔아놓은 것으로 황제가 그곳에 도사리고 앉았을 것이다.

궁전 옆에 있는 박물관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도자기들이 소장되어 있다.
1만 2천 점에 이른다.
당나라 도자기들이 많으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것들도 많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알려진 다이아몬드를 비롯하여 각종 보석들이 관람자의 눈을 부시게 하며 한편에는 무기들도 진열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세례자 요한의 팔목뼈라고 주장하는 뼈가 진열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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