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와 고대가 공존하는 도시: 카이로

<성지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긴 나일 강은 무려 6,670km를 흘러 마침내 지중해에 합류한다.
강물은 지중해로 합류되기 전 약 200km 지점에서 갈라져 부채꼴 모양의 삼각주(델타)를 형성한다.
카이로는 강물이 여러 지류로 갈라지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카이로의 인구는 약 1, 200만 명으로 아프리카 대륙과 중동에서는 최대의 도시이다.
현대와 고대가 공존하는 그 혼잡한 도시를 순례자들이 방문한다.
카이로는 인류 문명의 발상지로 꼽히는 곳이지만 현대에는 빈곤한 도시다.
빈부의 차이가 심한 카이로에는 고물차들이 먼지를 내면서 행렬을 이룬다.

이집트 국토의 96%가 사막이고 4% 정도의 나일 강 하구 삼각주 지역만이 옥토이다.
삼각주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로 전 국민이 먹고도 남아서 중동에 팔기까지 한다.
요셉이 서른 살 때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어 식량을 관장했다는 구약성서의 이야기는 아주 흥미롭다.

파라오는 자기 신하들에게, “우리가 이처럼 신통력을 지닌 사람을 어디서 찾겠느냐?” 하고는 요셉에게 부탁하였다.
“하느님께서 너에게 이 모든 것을 알려주셨으니 너만큼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나의 온 왕궁을 네 수하에 두겠다.
내 백성은 다 네가 시키는 대로 따를 것이다.
내가 너보다 높다는 것은 이 자리에 앉았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파라오는 요셉에게 “내가 너를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운다”고 하며, 손에서 옥새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워주고는 고운 모시옷을 입혀준 다음 목에다 금목걸이를 걸어주었다.
그리고는 요셉을 자기의 병거에 버금가는 병거에 태우고 행차할 때마다 앞서가며 “물렀거라” 하고 외치게 하였다.
이렇게 그를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운 다음, 파라오는 요셉에게 일렀다.
“내가 왕이지만 너의 승낙 없이는 이집트 전국에서 사람들은 손 하나 발 하나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창세기 41:38-44】

히브리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는 고센 지역은 삼각주 지역의 동쪽으로 아주 비옥한 땅이다.
흉년이 들면 수량이 줄고 풍년이 들면 수량이 늘어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강물의 범람을 그들이 섬기는 태양신이 가져다주는 은총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나일 강물의 범람을 불가사의하게 여겼으므로 태양신의 조화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나일 강 수원을 찾아 아스완까지 올라갔으나 찾지 못했다.
나일 강은 고대부터 매년 7∼9월 3개월 동안 정기적으로 범람했다.
비가 오지 않는 이집트 사막에 강이 범람하면 강물에 실려 온 천연의 석회질 비료가 강 하구 삼각주 지역의 옥토를 적셔준다.

18세기에 유럽의 각 나라 탐험대들이 나일 강의 수원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6,670km의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대에는 187명의 프랑스 학술원의 조사단이 편성되어 이집트 탐험을 시작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후에 “전쟁에서는 졌지만 문화에서는 이겼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탐험가 버턴, 스피크, 리빙스턴은 나일 강 수원 탐험의 공로자들로 알려졌다.
특히 영국 선교사 리빙스턴은 1840년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부임하여 40년 동안 전도와 탐험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1881년 임종에 임박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았다. 나일 강 수원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만큼 나일 강의 수원을 발견하는 일은 어려웠다.

나일 강의 수원은 백나일과 청나일 두 지류로 나눌 수 있다.
백나일은 상류에 있는 빅토리아 호로부터 내려오는 본류이고, 청나일은 동쪽 에티오피아의 다나 호로부터 내려오는 지류이다.
빅토리아 호는 수면이 해발 1,134m이고 길이는 320km이며, 넓이는 270km2, 강의 깊이는 평균 45km에 달한다.
빅토리아 호에서 내려오는 물이 나일 강의 평균 수위를 이룬다.
에티오피아에 있는 청나일 상류 다나 호는 수면이 해발 1,756m로 빅토리아 호보다 500m가 더 높다.
매년 여름이 되면 정기적으로 불어오는 계절풍이 인도양의 습기를 몰고 오다가 킬리만자로 산맥을 넘지 못하고 멈추어 비를 뿌린다.
에티오피아 고지는 3월부터 9월까지 우기라서 대량으로 비가 내리기 때문에 다나 호의 수량이 급증한다.
깊이 14m의 얕은 호수인 다나 호는 석회질의 토사와 진흙을 담은 급류를 흘려보내 나일 강물을 범람시킨다.
이리하여 나일 강 범람의 수수께끼는 풀리게 되었다.
지금은 아스완 댐이 건설되어 수위를 조정하기 때문에 범람을 방지할 수 있다.

한때 아랍 국가들의 맏형 구실을 했던 이집트의 카이로는 아랍권에서 가장 많은 이슬람교 사원(모스크)을 가지고 있다.
카이로 중심지에 187m의 높이로 세워진 ‘카이로 타워’에 올라 시가를 내려다보면 사원의 뾰족한 첨탑이 숲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카이로에는 성지로 불리는 ‘콥틱 교회’가 있다.
‘콥틱(Coptic)’이란 말은 애굽코스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애굽코스란 이집트 원주민 또는 그들의 말을 뜻한다.
그러므로 ‘콥틱 교회’는 이집트 원주민들의 교회라는 의미이다.
오늘날 이집트에는 약 750만 명의 콥틱 교인들이 있는데 전체 인구의 15%에 해당한다.
콥틱 교회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교회 가운데 하나다.
교회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복음서의 저자 마르코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와서 교회를 세운 것이 콥틱 교회의 모체라고 한다.
사도행전에 보면 마르코는 사도 바울로와 함께 전도여행을 했는데 말년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를 포교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고 한다.

콥틱 교회는 자기들의 교회 원년을 284년이라고 하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가 로마의 황제로 즉위한 해이다.
교회사에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재임기간을 ‘순교자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가 그리스도교인을 극심하게 박해했으므로 그 시기에 많은 순교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콥틱 교인들 가운데도 많은 순교자가 있었으므로 그때를 자기들의 교회 원년으로 삼은 것이다.

콥틱 교회는 수도원 운동이 시작된 교회이며, 그들이 콥틱어로 번역한 신약성경은 오늘날 성경사본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콥틱 교회가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451년에 칼케돈, 즉 오늘날의 터키 지역에서 개최된 종교회의에서 콥틱 교회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되어나갔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학적 견해 차이 때문이었는데, 가톨릭이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을 모두 구비했다고 주장한 반면, 콥틱 교회는 그에게는 오로지 신성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콥틱 교회는 아주 보수적인 독자노선을 걷게 되었다.

본래 카이로는 로마 군대가 주둔했던 요새 성채를 지칭했다.
640년대에 아랍인들이 이집트를 정복하자 콥틱 교인들은 파괴된 로마 군대의 요새 안으로 들어가 살았다.
그들은 그곳에 여러 개의 교회를 건립했는데 현재 다섯 개의 교회가 남아 있으며 모두 일천 년 이상 된 오래된 교회들이다.

또 다른 성지로는 ‘아부 사르가(Abu Sarga) 교회’가 있다.
그 교회를 ‘아기 예수 피난 교회’라고도 부른다.
마리아와 요셉이 헤로데 대왕의 학살을 피해서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했을 때 잠시 머물렀던 석굴 위에 세워진 교회라고 알려졌다.
교회 근처에 ‘성 바바라 교회’가 있는데 순교자 바바라를 기념하는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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