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나시우스,  이레네우스와 오리게네스의 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데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아리우스주의와 그 이단자들을 후원한 황제의 권력에 대항해 오랜 동안 투쟁하는 과정에서 믿음의 수호에 앞장 선 사람은 아타나시우스였다.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 신학을 성토하는 일에 전력을 다한 아타나시우스는 학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태생으로 알렉산더가 328년에 사망하자 뒤를 이어 33살에 감독에 올랐다.
그의 생애는 소설의 주인공처럼 변화무쌍했다.
감독에 재직하는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제국의 변방으로 추방당했으며 이집트 광야에서 수년 동안 은둔했지만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를 지지했다.
77살에 타계할 때까지 그는 45년 동안 감독에 재직했다.
30살의 아타나시우스가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를 비난할 때 아리우스는 75살의 늙은이였다.


아타나시우스는 주로 이레네우스와 오리게네스의 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데 23살때 저술한 『이방인에 대항하여 Oratio contra Gentes』와 『성육신에 관하여 De Incarnatione Verbi』를 보면 두 사람의 영향이 두드러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와 같은 알렉산드리아 학파 신학자들과는 달리 그리스도교의 믿음을 폐쇄적인 철학체계 속에 삽입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발전시킴에 있어서 그리스 철학을 거부하고 대신 성경을 유일한 근저로 삼았으며 클레멘트처럼 신앙의 규범을 성경의 내용과 동일한 것으로 인식했다.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교의 전통도 성경과 불일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권위를 가질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367년 부활절 서신에서 적었듯이 신약성경을 가장 권위 있는 말씀으로 보고 신약성경의 내용을 원칙으로 신학을 정립했다.
또한 성경을 율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성경을 그리스도와 그에 의해서 성취된 구원을 중심으로 해석해야 마땅하다고 했다.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아타나시우스의 말을 상기하게 한다.


아타나시우스는 335년경에 『아리우스주의자들을 논박하는 글들 Orationes contra Arianos』을 썼는데 저서에서 예수로 태어난 그리스도에게는 신성이 있으며 아담이 하나님에게 불순종하여 생긴 원죄에 의해 상실한 인류의 인성을 그리스도가 회복했다고 한다.
그리스도가 창조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아리우스의 이론을 비난하고 오리게네스의 신학을 받아들여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본질을 지닌 채 태어난 분이라고 했다.
바울과 이레네우스의 신학도 받아들인 그는 그리스도를 제2의 아담으로 인식하고 구원이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의지함으로써 얻게 되는 도덕적 변화라고 했다.
아리우스가 주장한 대로 그리스도가 피조물에 불과하다면 피조물이 어떻게 같은 피조물인 인류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고 그는 반문했다.
또한 그리스도가 예수의 영혼만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육체도 함께 차지했기 때문에 예수의 인성이 신성으로 달라질 수 있었다고 보았다.


이렇게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인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는 죄와 죄의 저주인 사망을 용서받을 수 있으며 새 생명 즉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영생이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도덕적으로 말하면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다.
즉 영생이란 신성을 지니는 것으로 사람이 신격화되어 하나님과 동등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구원은 불가해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하면 이해가 가능해지므로 성령은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신성을 지닌 분이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분이 아니라 태어난 분인데 이것이 보통 사람이 부모로부터 태어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가 시간 안에서 태어난 분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신성한 관계의 영원함을 언급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사람의 태어남과 같지 않다.
사람의 태어남은 하나님이 존재한 후에야 자신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속성은 무한하고 영원하기 때문에 그의 태어남도 마찬가지로 무한하고 영원해야 한다.


아타나시우스는 독창력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종교에 있어서 실천적 요소를 간파했으며 구원의 종교에 대한 교회의 근본적 관심을 체계화할 줄 알았다.
그리고 동방 신학을 대표하는 오리게네스 학파의 순수한 철학적 관심을 무시해 버리고 교회를 구속자인 그리스도 위에 확립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가 아리우스의 신학을 물리치고 마침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동질론에 대한 승리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이러한 신학적 입장의 표명 외에도 그의 확고부동한 태도였다.
교회의 화평을 바라는 많은 중립파 감독들은 그의 웅변술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분이며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항아리가 항아리를 창조한 토기장이의 속성을 전혀 공유할 수 없다는 비유를 들어 창조물은 창조자와 분리될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또한 창조와 달리 태어나는 것은 아이가 부모의 실체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부모의 속성을 닮는 것임을 지적하면서 그리스도가 태어났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속성이 곧 하나님이란 뜻이지 피조물이란 뜻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태어났다는 말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같은 동질 또는 실체(substance, 그리스어로 homoousios)임을 뜻하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의 그리스도론을 반박한 근본이유는 아리우스가 제2의 하나님을 인정해 결국 그리스도교를 다신교로 만들려고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리우스의 주장대로 만일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등한 영원성과 본질을 지니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영지주의자들의 창조신에 비교할 만한 중간적인 존재 혹은 반신(半神) 반인간(半人間)의 존재에 해당할 것인데 이것은 피조물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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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우스의 그리스도론은 모순이라고 보았다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아리우스의 종속론에 대한 아타나시우스의 신랄한 비판은 변증가들을 향한 것이기도 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달랐더라도 그들이 종속론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리우스의 주장대로 그리스도가 신성을 지녔다면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을 지닌 것에 해당하므로 따라서 아리우스의 그리스도론은 모순이라고 보았다.
기원과 본질에 있어 그리스도는 피조물과 같지 않고 피조물에 비한다면 전혀 다른 수준의 본질이며 하나님과 동일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성을 강조함으로써 그는 유일신 신앙을 표방하는 삼위일체론을 주장했으며 니케아 신조를 대단히 만족해하면서 그 권위를 성경과 신앙의 규범에 두었다.
이에 대해 아리우스파가 니케아 신조에 사용된 용어가 성경에 없음을 말하자 아타나시우스는 그런 용어가 바로 성경적 교훈의 본질을 나타낸다고 응수했다.


젊은 아타나시우스가 자신이 존경하는 아리우스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유세비우스는 서방 교회 감독들의 이론을 비난함으로써 간접적인 방법으로 니케아 신조에 불만을 나타냈다.
준공된 예루살렘 교회의 봉헌식 때 유세비우스는 봉헌식에 참석한 감독들에게 아리우스가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사제로 복직되어야 한다고 설득작업을 폈다.
감독들은 아리우스의 복직을 335년에 황제에게 탄원형식으로 건의했으며 황제는 탄원의 타당성을 인정해 교회의 평화를 저해하는 아타나시우스를 교회 밖으로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이듬해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아리우스를 입교시키려고 했지만 입교 전날 밤 86살의 아리우스는 급사하고 말았다.


콘스탄티누스에 의해서 336년에 추방된 아타나시우스는 이듬해 5월 22일 콘스탄티누스가 사망하자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다시 감독직에 올랐다.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보호해 주는 동안 그리스도인의 수가 급증한 것은 사실이지만 폐단도 있었다.
감독들이 신학적 논쟁으로 분열된 교회를 자율적으로 수습하지 못하고 황제의 정치적 힘을 빌려 해결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신학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실추된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339년에 로마로 가서 이탈리아 감독들을 설득했으며 그들이 자신의 신학에 동조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콘스탄티누스 사망 후 그의 세 아들들이 제국을 분할해서 통치하고 있었는데 아타나시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큰 아들인 서방의 황제 콘스탄스(Constans)의 호의를 받으며 346년에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둘째 아들인 동방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십 년 후에 그를 다시 추방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신조로 야기된 동방과 서방 감독들의 신학분쟁을 중단시키기 위해서는 아타나시우스를 추방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아타나시우스가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온 것을 안 배교자 줄리안(Julian the Apostate, 331-63)은 362년에 그를 다시 추방했는데 줄리안은 콘스탄티누스의 손자로서 361년에 동방의 황제에 즉위했다.
줄리안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지는 않았지만 이교도에게도 종교의 자유를 허락함으로써 이교가 재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줄리안이 363년에 죽자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다시 감독직에 올랐다.
이렇게 수차례에 걸쳐서 추방되었지만 계속해서 그가 감독직을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줄리안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발렌스(Valens)에 의해서 아타나시우스는 365-66년에 또다시 추방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성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실체와는 분리될 수도 나뉠 수도 없는 존재임을 역설한 유일신 사상을 펼쳤으며 그리스도가 태초부터 존재했으며 삼위의 인격체는 피차 분리되지 않는 것임을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는 수원과 그것으로부터 흐르는 시냇물의 관계와도 같다.
수원(水源)과 강(江)은 비록 형태가 둘이고 명칭이 둘이지만 피차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하나님 또한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과 동등한 영원성을 그리스도에 부여하면서 하나님은 태어나지 않은 분이고, 그리스도는 태어난 분이며, 성령은 나온 분이라는 말로 삼위를 구별했다.
그리고 세 인격체는 모두 동일한 신성과 힘과 능력을 지녔고, 동일한 실체와 본질을 지녔으며, 따라서 동일한 존엄과 영광을 가진다고 역설했다.
그의 관심거리는 삼위일체론을 그리스도에 의해 이룩된 구원과 결합시키는 것이었는데 이런 점은 모든 신학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런 신념 때문에 그는 아리우스주의 이단이 교리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 전체를 전복시키려고 한다고 분노한 것이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을 현대 신학에 비유해서 그의 그리스도론이 단지 구원의 개념과 관계될 때만 중요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의 그리스도론이 기본이 되는 신학 중의 하나인 동시에 진리 자체에 대한 필수적인 요소라는 신념을 가지고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해 니케아 삼위일체론을 수호하려고 했다.


이레네우스와 마찬가지로 아타나시우스도 창조에서 시작해 종국에 가서는 완성의 단계에 이르는 구원의 질서를 분명하게 설명했다.
이레네우스의 구원론은 아타나시우스에게 아리우스주의를 논박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었는데 이는 이레네우스가 구원론을 바탕으로 영지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인 예와 같다 하겠다.
아타나시우스는 구원과 창조의 근원을 동등하게 인식하면서 하나님 자신이 구원의 역사를 성취함으로써 타락한 사람들로 하여금 본래의 운명으로 회복할 수 있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역사를 이룩한 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상에 온 그분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구원의 의미를 구속으로 인해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로워진 사람이 신격화 될 수 있다는 것에 두었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은 영생과 창조 당시에 영위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삶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는 삶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를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이라고 했다.
구원을 설명할 때 죄에 대한 용서를 받는 것보다 이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더욱 강조한 것은 당시 감독들의 일반적 경향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의 또다른 면도 아울러 강조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사람의 형체로 온 이유를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임을 나타내어 사람들의 무지와 몽매 가운데 망각된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예배를 회복시켜 주기 위한 것이라고 보았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을 논박하는 글들』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육신한 그리스도는 자신의 선하심을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나타냈는데 하나는 사망의 요소를 제거해서 우리를 새롭게 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스스로 숨겨진 존재자이며 보이지 않는 그분이 행위를 통해 자신을 나타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로고스이고, 우주의 통치자이면서 왕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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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질
Basil, 330-379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비록 아타나시우스가 제시한 니케아 정통주의가 325년 이후 신학의 발전에 밑거름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교회에서도 엄격하게 주장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본질에서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별을 어떤 방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과제를 남겼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기도 하고, 하나님은 그리스도보다 우수하다는 성경의 기록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본질에서 동등하다고 주장한 입장을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하는 것은 아타나시우스에게 어려운 과제였다.


설상가상으로 이와 유사한 논쟁이 성령론을 주제로 신학자들 사이에 전개되었다.
감독들이 세례를 베풀 때 사용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말처럼 성부와 성자란 말을 사용할 때는 늘 성령이란 말도 더불어서 사용되었다.
초대교회가 성령의 체험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쟁이 신학자들 사이에 뜨거웠지만 성령에 대한 신학은 등한시되었다.
니케아 신조에는 성령에 관한 아무런 논평도 없이 그저 “우리는 성령을 믿으며”라고만 적혀 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해결하는 데 성령을 조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적극적으로 제기된 것은 니케아 신조가 선언된 이후부터였다.


아타나시우스가 하나의 본질이라는 개념을 강조하면서 이 관점에서 출발해 삼위일체론을 설명한 반면 캅파도키아 출신들은 서로 다른 세 위격들이라는 말로 통일성(unity)과 삼위일체성(trinity) 모두를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리스어로 본질(ousia)과 실체(substantia) 두 개념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생긴 것은 캅파도키아인들에 의해서였다.
본질이 신적 실체의 개별적 본성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반면 실체는 위격(persona)이란 말과 병기하는 데 사용되었다.
성령의 신성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캅파도키아인들은 아타나시우스의 본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동등하다는 신학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캅파도키아 학파에는 가이사랴의 감독 바질과 바질의 동생이면서 닛사(Nyssa)의 감독 그레고리(Gregory) 그리고 두 사람의 친구 나지안주스(Nazianzus)의 감독 그레고리(329-389)가 있었다.
세 사람은 수준 높은 논쟁을 할 수 있는 지성적 자원을 두루 겸비한 신학자들로 니케아 신조의 삼위일체론을 옹호하면서 성령 또한 그리스도와 더불어 본질에서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에 의해서 성령론은 신학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으며 그들은 “세 실체가 한 본질 one ousia in three hypostaseis”이라고 주장했다.
라틴어로 실체를 본질이라고 하고 위격(persona)을 실체(hypostaseis)라고 하기 때문에 세 사람의 주장은 테르툴리아누스의 신학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성령론은 동방 교회의 감독들도 기꺼이 받아들일 만한 것이었다.


“위대한 바질 Basil the Great”로 불리운 바질과 그레고리 형제는 훌륭한 가문에서 성장했으며 금욕주의를 추구한 누이 마크리나(Macrina)도 탁월한 인물이었다.
마크리나는 자만심에 빠진 청년 바질을 설득하여 겸손하게 만들었으며 바질이 죽자 슬픔에 빠진 그레고리를 위로했다.
그레고리는 누이의 경건한 신앙과 탁월한 신학적 소양을 글로 남겼는데 그의 누이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했다.


바질은 아테네와 콘스탄티노플에서 수학한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수사학 교사가 되었지만 누이의 권유를 받아들여 수도사로 변신했다.
외할아버지는 순교했고, 동생 그레고리와 누이 마크리나는 성인의 반열에 올랐으며, 동생 베드로는 세바스테의 감독이 되었다.
누이가 수녀원을 건립한 것을 보고 바질은 시리아, 이스라엘, 메소포타미아, 이집트를 두루 방문하고 돌아 온 27세 때(357년) 수녀원 근처 이리스 강변에 수도원을 건립했다.
그는 수도사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규칙을 문답형식으로 만들었는데 이 규칙은 오늘날에도 그리스인의 수도원에서 사용되고 있다.


바질은 니코메디아의 감독 유세비우스의 권유를 받아들여 수도원을 34세 때(364년) 장로가 되었고 6년 후에는 가이사랴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과도한 고행을 경계하면서 구제와 덕행을 강조했다.
또한 이방인의 문학이 그리스도인의 자녀교육에 가치가 있으므로 젊은이는 이방인의 문화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버려야 할 것은 버리라고 했다.
그는 40세에 사망했지만 381-2년 황제 데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때 개최된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 참석해 아리우스주의 신학을 이단으로 단죄하는 일에 공을 세웠다.


바질은 “네가 알고 있는 분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냐 아니면 알지 못하는 분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냐?”라고 물으면서 알고 있는 분에게 예배를 드린다고 대답할 경우 안다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안다는 말에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해 안다는 뜻이 내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함, 능력, 지혜, 선하심, 인류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정의를 아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또한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가 그분에 관해 알게 되지만 그렇다고 그분의 본질에 접근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본질을 모르면 그분에 관해 모르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분의 본질을 안다고 해도 그분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 같은 주장을 미친개에 물린 사람이 미친 상태에서 개를 보게 된다는 은유적인 말로 설명했다. 미친개에 물린 사람은 개를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자신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므로 이런 사람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피하라고 그리스도인에게 주의를 주었다.


하나님의 본질을 모르는 것은 알지 못하는 분에게 예배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 그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한 바질은 하나님의 본질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그 이상에 속한다고 보았다.
그를 비방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본질을 모르면서 어떻게 그분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알 수 있냐고 묻자 바질은 바울의 가르침대로 믿음 안에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생긴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을 모르더라도 그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믿음이 가능함을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지니라 (히브리서 11:6)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을 알기 때문에 그분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분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면서 바질은 요한의 말을 인용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 1:18)


그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에 관해 우리에게 알려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므로 그가 알려 주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본질이므로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 준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마태복음 9:28-29)


바질은 복음서에 기록된 소경 두 사람이 “예, 믿습니다, 주님”라고 말한 후 예수에게 예배드린 것을 예로 들면서 소경들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근거해서 행위 한 것으로 이 같은 지식이 예수에게 예배드리게 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예배를 믿음의 결과로 이해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하는 것이며, 믿는 사람은 믿음에 해당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지식의 양에 비례해서 믿음이 생기고, 또한 그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한다고 보았다.


그레고리는 웅변을 배우려고 아테네로 유학 갔다가 그곳에서 바질을 만났는데 바질이 그의 인생행로를 바꾸어 놓았다. 그레고리는 훗날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나는 아테네에서 웅변술을 배우면서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바질을 만났기 때문이다. 나는 나귀를 찾아 나섰다가 왕국을 발견한 사울과 같았다.


바질은 자신을 지지해 줄 후원자로서의 감독이 필요했으므로 그레고리를 이름도 없는 중부 어느 조그만 마을의 감독에 임명될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레고리는 목회가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자 곧 감독직을 떠났는데 그는 믿음에 대한 회의에 빠져 늘 괴로워했다.
바질은 그레고리를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서 자신을 위해 니케아 신조가 인준을 받도록 뛰어난 웅변술을 발휘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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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Gregory, 330-395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바질의 동생 그레고리는 조직과 행정능력에서 형에 견줄 만하지는 못했지만 웅변술과 문필력 그리고 신학적 통찰력에서는 우수함을 나타냈다.
웅변술로 말하면 친구 나지안주스의 감독 그레고리도 뛰어났지만 닛사의 감독 그레고리는 웅변술 외에 시적 영감에도 뛰어났다.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가 381-2년에 개최되었을 때 시가가 신학적 논쟁으로 떠들썩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그레고리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도시 전체가 골목길, 번화가, 공회, 광장들로 가득하고 여기저기에는 의복장사꾼, 환전상, 음식물을 파는 사람들로 우굴거린다.
당신이 변화를 요구하면 그들은 선험적인 것과 후험적인 것에 관해 철학의 논리로 설명해 줄 것이다.
당신이 빵 값을 물으면 하나님이 더욱 우월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비해 열등하다고 대답해 줄 것이다.
당신이 목욕탕이 제대로 갖추어졌느냐고 물으면 그리스도가 무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견해를 피력할 것이다.


그레고리는 예수가 제2의 아담이라는 바울의 주장을 받아들였으며, 본래 아담이 그르친 것이 무엇이며 제2의 아담이 바로 잡은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리고 원죄에 관해 언급하면서 아담이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고 자유의지로 사탄에게 복종하는 바람에 사탄이 아담의 후손을 다스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된 것이라는 이론을 제기했다.
하나님이 사탄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아들을 지상으로 보냈는데도 아들이 한낱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에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을 감히 제압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아들도 역시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들을 제압하려는 사탄의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말았으며, 사탄의 권세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킴으로써 하나님은 사탄을 처벌할 수 있었다.
그레고리의 이러한 해석들은 새로운 방법이 아니라 당시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이었다.


그는 저서 『위대한 교리문답 The Great Catechism』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신성은 사람의 본성이라는 베일에 가리워져 있다.
그러므로 걸신들린 물고기를 대하듯 신성이란 낚시 바늘은 육신이라는 미끼와 함께 깊이 가라앉아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훗날 그레고리의 신학을 받아들여 저서 『설교 Sermon』에 유사한 내용을 적었다.

주의 십자가는 악마의 덫이 되었으며 주의 사망은 악마로 하여금 덫에 빠지도록 한 미끼가 되었다.


형 바질과 마찬가지로 그레고리도 누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수사학 교사직을 그만두고 형의 수도원에 합류했다.
형과 달리 그레고리는 경륜을 쌓은 적도 없고 경건을 도모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유랑생활을 통해 심오한 신앙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에게 믿음이란 영혼에 속삭이는 사랑의 초대와도 같았다.
그는 시인이며 몽상가로 불릴 만했는데 그의 저서 『아가에 관한 주석 Commentary on the Canticle』(아가는 솔로몬의 노래를 묶은 책이다)에 믿음에 관한 시인의 영감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녀(믿음)가 죄에 대한 집착에서 자신을 떼어 놓은 후 신비한 입맞춤을 통해 입술을 빛의 샘에 갖다 대기를 열망할 때 그녀는 진리의 빛으로 반짝이면서 아름다워진다.
그녀는 감각으로, 이성으로, 지각하는 모든 것을 뚫고 준마처럼 질주한다.
그녀는 사과나무 그늘 아래를 갈망하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때까지 한 마리 비둘기와도 같이 비상한다.
그래서 그녀는 사랑하는 자가 접근해 오는 동안 발각되지 않도록 하는 거룩한 어둠에 에워싸인다.


감각과 이성과 지각하는 모든 것을 뚫고 준마처럼 질주하는 그레고리의 영상은 신플라톤주의와 관련이 있는데 신플라톤주의는 그리스 철학과 고대 종교의 종착역과도 같았다.
세계주의 철학으로 등장한 신플라톤주의에는 플라톤 철학의 근본적 경향, 후기 스토아주의의 종교적 도덕론, 필로의 사상, 일반적인 동양의 사상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신플라톤주의는 3세기에 성행했는데 창설자는 플로티누스(Plotinus, 204-269)였다.
그레고리는 신플라톤주의의 일원론에 관심이 많았으며 세계는 태초에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되어 나중에 그분에게로 회귀한다는 유출설에 동조했다.
플로티누스의 유출(emanation) 또는 범람(overflow)은 세계가 신으로부터 유출 또는 범람하는 것을 말한다.
그레고리에게 있어서 신은 만물의 근원이지만 만물을 창조한 분이 아니므로 세상을 필요로 하지 않고 또 세상을 창조할 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유출 또는 범람의 과정을 세 단계로 구분했는데 첫째, 누스(nous)로서 순수한 마음 또는 이성이고, 둘째, 프쉬케(psyche)로서 영혼(soul)이며, 셋째, 물질(matter)이다.


플로티누스는 현상의 세계가 영혼과 물질이 결합해서 생겨나며 그 결과 영혼은 죽거나 사악한 것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다고 했다.
즉 영혼이 육체 안에 들어온 것은 타락한 것이며 영혼이 신을 주목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주목한 것이라고 간주했다.
이렇게 그는 육체를 근본적으로 사악한 것으로 여겼지만 영혼이 육체에 거하는 동안 유익함을 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영혼이 육체 안에 거하면서 악을 인식할 줄 알게 되고, 자신의 힘을 이용할 줄 알게 되며, 결국 신에게 회귀하는 길을 떠나게 된다고 했다.


그레고리는 플로티누스의 신의 개념을 받아들였는데 플로티누스는 신을 단순하고, 완전하며, 절대적인 존재로 인식하면서 오로지 한 분뿐인 신에게는 복수성이나 다양성이 없다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 신은 만물과 지식을 초월하는 존재였다.
만일 신을 정의하려고 시도한다면 그것은 결국 어떤 한계 안에 신을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므로 우리는 신에 관해 생각하고 느끼는 것조차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신학적이든지 철학적이든지 우리의 지식에 관한 한 신은 접근할 수 없는 존재이며 세상으로부터 구별되는 존재이므로 플로티누스에게 영혼의 임무는 둔중한 육체의 속박을 견디어 내고 차츰 신에게로 상승해 회귀하는 것이었다.
이에 회귀에 실패하게 되면 영혼은 죄의 성질과 정도에 따라서 사후에 다시 사람이나 짐승 또는 식물로 태어나게 된다는 윤회설을 주장했다.
또한 순결한 영혼은 별들의 세계에 살게 되며 성숙한 영혼만이 신에게로 회귀할 수 있음을 역설했다.
그러므로 그에게 점차 회귀할 수 있도록 나아가는 상승적 운동의 수단은 신비주의적 도취와 금욕주의적 윤리였다.
신비주의적 도취의 상태에서 영혼은 자아를 초월하여 플라톤이 주장한 이데아 세계로 상승되며 자신이 신이라고 깨닫게 될 뿐 아니라 실제로 신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 플로티누스 논리이다.


그레고리는 플로티누스의 이론에 자신의 독특한 시적 감정을 보태어 신학이 보다 지성적이 되도록 했다.
그는 동방의 신비주의 신학을 더욱 진전시켰는데 이런 점에서 보면 오리게네스보다 진일보했다.
또한 사랑이 지성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묘약이라고 믿었으므로 형 바질이 친구와 불화하고 대화도 하지 않고 지낼 때 친구가 보낸 것처럼 허위로 사과하는 편지를 써서 형에게 보냈다.
바질은 동생이 자신에게 허위편지를 보낸 것을 알고 화를 냈지만 결국 친구와 화해했다.
이렇게 사랑이 사람을 단순하게 만든다는 것을 그레고리는 체험으로 알았으며 자신이 잘못된 일을 꾸민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만족해했다.


그레고리는 사람들이 비평 없이 본질과 실체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본질을 단수로 취급할 때는 단수의 실체를 의미하지만 삼위의 실체를 말할 때는 삼위의 본질이 된다고 했다.
그는 모든 명사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므로 일반적인 의미와 특별한 의미로 구별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사람이란 말은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고 어느 한 사람에게 특별히 적용되지는 않으므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등에 적용할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은 특별히 베드로에게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지만 바울과 디모데 같은 명사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라고 했다.
바울, 디모데, 실바누스를 예로 들어 그들에게 본질이란 말을 적용한다면 바울에게 적용한 본질과 디모데와 실바누스에게 적용한 본질은 다를 수가 없다면서 바울에게 적용된 본질은 누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본질임을 지적하였다.
이렇게 그레고리는 본질이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명사임을 명확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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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는 실체는 특별한 사물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이지만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그레고리는 실체는 특별한 사물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이지만 사람이란 말은 본질을 나타내는 말로서 특정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고 했다.
사람이란 말은 실체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명사와 고유명사를 구별해서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가 구별해서 사용해야 함을 지적한 것이다.
고유명사에 해당하는 바울이란 말은 고유명사가 지칭하는 대로 실재하는 바울의 실체를 가리키는 말이라면서 실체는 특별한 사물을 지칭하나 본질은 일반적인 사물을 강조함을 역설했다.
그리고 고유명사를 명사처럼 사용한 예로 욥기의 구절을 들었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기 1:1)


그레고리는 ‘이름하는 사람 a certain man’이란 욥의 본질에 관한 언급이 아니므로 주제의 특별한 성격을 지칭하면서 욥을 일반적인 사람과 구별한다고 했다.
이름, 장소, 성격이 이야기의 주인공을 특정한 사람으로 만드는데 특정한 사람으로 지칭했음에도 불구하고 욥의 본질은 설명되지 못했으므로 본질과 실체를 분리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방법으로 사람에게 해당하는 문법을 하나님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플로티누스의 사상을 받아들여 하나님에 관한 설명으로서 그 어떤 말을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이상의 존재이므로 그분에 관한 어떤 설명도 그분의 본질에 관한 설명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레고리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해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며 창조되지 않은 점과 불가해한 점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성령 모두에게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고 했다.
삼위일체에 관해 설명하더라도 실체에 관한 설명에 그칠 뿐 그 본질에 관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은혜의 선물은 성령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것이라며 그는 바울의 말을 인용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2:11)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로새서 1:17)


그레고리에게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분이므로 우주는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과 함께 하지 않은 그리스도란 상상할 수 없으며 성령이 계시가 있어야만 그리스도에 관해 이해할 수 있다.
성령은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은혜를 선물로 주는데 선물을 창조한 분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성령과 그리스도를 한 데 묶어서 이해해야 하며, 성령은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한다는 종속론을 주장했다.
그는 성령의 실체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알려진다면서 성령의 실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하기 때문에 삼위는 각각의 성격을 지닌 독자적인 실체지만 본질에서는 일체를 이룬다는 삼위일체론을 지지했다.
또한 성령은 그리스도에 속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오는 경우도 있다면서 바울의 말을 인용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8:9)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2:12)


그레고리는 그리스도를 알면 그리스도 양편에 있는 하나님과 성령도 함께 알 수 있다고 하고 이는 하나님과 성령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스도는 늘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고 하나님을 떠나 존재하는 경우는 없으며 성령으로부터 분리되는 일이 없으므로 성령을 통해서만 역사하는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면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시에 알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삼위일체론의 중요한 점은 삼위의 실체가 각기 다를지라도 본질에서는 일체한다는 데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바질과 동명이인 그레고리 세 사람은 캅파도키아 학파를 형성했으며 용어를 구별해서 사용하는 방법으로 삼위가 한 본질(homoousios)임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권위를 잃은 니케아 신조를 새삼 옹호하는 일에 전력했다.
캅파도키아 학파는 오리게네스의 개념을 받아들여 하나님은 한 본질(one ousia)이나 실체에 있어서는 셋(three hypostaseis)이라고 주장했는데 본질과 실체란 말을 이 같은 방법으로 구별한 것이다.
실체의 개념이 삼위일체론에 적용될 때 신격의 삼위는 그들 나름대로 특유한 성질과 속성을 가짐으로써 상호간에 구별되는 동시에 각기 특별한 존재형태를 취하게 된다.
당시 사람들은 본질과 실체를 같은 의미로 사용했으며 니케아 신조와 아타나시우스의 저서에서도 동의어로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캅파도키아 학파는 본질과 실체의 의미가 각기 다른 개념임을 들어서 많은 실체가 한 본질일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리스도, 성령은 이런 방법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안 캅파도키아 학파는 두 가지 예외를 인정할 경우에는 같은 방법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두 가지 예외란 첫째, 베드로와 마리아와 요한의 경우 세 사람이 서로 불일치할 수 있고, 그들은 다른 동기에서 각기 행동하며, 상이한 목적을 추구할 수 있으나 삼위의 경우에는 삼위가 늘 완전하게 일치가 되도록 행동하고 목적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둘째, 바질은 세 개의 구리동전을 예로 들어 세 개의 동전을 가지고 네 개의 동전을 다시 주조하려면 세 개의 동전을 한 덩어리의 구리로 녹인 후에야 가능하므로 재료(본질)와 동전(실체)은 구별된다고 했다.
캅파도키아 학파는 삼위의 경우 세 실체는 하나의 본질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라고 주장했다.


캅파도키아 학파의 주장에는 무리가 있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그리스인의 독특한 개념에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의 개념을 번역해서 각 나라 사람에게 적용할 때 그리스인의 개념은 어려워지고 만다.
테르툴리아누스가 라틴어를 구사한 이래 많은 신학자들이 세 사람(three personae)은 한 실체(substantia)라는 말로 삼위일체를 주장했는데 ‘아래에 서 있는 것’이란 뜻의 실체는 본질(hypostaseis)이란 그리스어를 직역한 것에 불과하다.
한 마디로 캅파도키아 학파는 본질과 실체라는 말을 구분해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혼용한 것으로, 동의어를 상대적인 두 개념으로 사용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그리스어를 사용한 신학자들은 삼중성(threeness)을 강조하기 위해서 본질과 실체란 말을 사용한 반면 라틴어를 사용한 신학자들은 세 인격의 단일성(oneness)을 강조하기 위해서 본질과 실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사용한 신학자들이 본질과 실체란 말을 함께 사용한 것은 어쩌면 그들 신학의 근본적 차이를 은폐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그리스어를 사용한 신학자들은 늘 하나님과 그리스도, 성령이란 말을 함께 사용하면서 하나님에게만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령에게도 기도했다.
그들의 신학적 과제는 세 실체를 한 본질 안에 병합시키는 것이었다.
이탈리아 사람은 유일신에게만 기도했는데 그들의 신학적 과제는 한 실체에 세 인격을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어를 사용한 신학자와 라틴어를 사용한 신학자 모두가 설명할 수 없는 점을 설명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과거의 신학자들이 삼위일체론에서 논리적 모순을 드러냈다면서 신학자들은 셋이 하나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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