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질
Basil, 330-379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비록 아타나시우스가 제시한 니케아 정통주의가 325년 이후 신학의 발전에 밑거름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교회에서도 엄격하게 주장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본질에서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별을 어떤 방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과제를 남겼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기도 하고, 하나님은 그리스도보다 우수하다는 성경의 기록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본질에서 동등하다고 주장한 입장을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하는 것은 아타나시우스에게 어려운 과제였다.
설상가상으로 이와 유사한 논쟁이 성령론을 주제로 신학자들 사이에 전개되었다.
감독들이 세례를 베풀 때 사용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말처럼 성부와 성자란 말을 사용할 때는 늘 성령이란 말도 더불어서 사용되었다.
초대교회가 성령의 체험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쟁이 신학자들 사이에 뜨거웠지만 성령에 대한 신학은 등한시되었다.
니케아 신조에는 성령에 관한 아무런 논평도 없이 그저 “우리는 성령을 믿으며”라고만 적혀 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해결하는 데 성령을 조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적극적으로 제기된 것은 니케아 신조가 선언된 이후부터였다.
아타나시우스가 하나의 본질이라는 개념을 강조하면서 이 관점에서 출발해 삼위일체론을 설명한 반면 캅파도키아 출신들은 서로 다른 세 위격들이라는 말로 통일성(unity)과 삼위일체성(trinity) 모두를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리스어로 본질(ousia)과 실체(substantia) 두 개념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생긴 것은 캅파도키아인들에 의해서였다.
본질이 신적 실체의 개별적 본성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반면 실체는 위격(persona)이란 말과 병기하는 데 사용되었다.
성령의 신성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캅파도키아인들은 아타나시우스의 본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동등하다는 신학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캅파도키아 학파에는 가이사랴의 감독 바질과 바질의 동생이면서 닛사(Nyssa)의 감독 그레고리(Gregory) 그리고 두 사람의 친구 나지안주스(Nazianzus)의 감독 그레고리(329-389)가 있었다.
세 사람은 수준 높은 논쟁을 할 수 있는 지성적 자원을 두루 겸비한 신학자들로 니케아 신조의 삼위일체론을 옹호하면서 성령 또한 그리스도와 더불어 본질에서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에 의해서 성령론은 신학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으며 그들은 “세 실체가 한 본질 one ousia in three hypostaseis”이라고 주장했다.
라틴어로 실체를 본질이라고 하고 위격(persona)을 실체(hypostaseis)라고 하기 때문에 세 사람의 주장은 테르툴리아누스의 신학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성령론은 동방 교회의 감독들도 기꺼이 받아들일 만한 것이었다.
“위대한 바질 Basil the Great”로 불리운 바질과 그레고리 형제는 훌륭한 가문에서 성장했으며 금욕주의를 추구한 누이 마크리나(Macrina)도 탁월한 인물이었다.
마크리나는 자만심에 빠진 청년 바질을 설득하여 겸손하게 만들었으며 바질이 죽자 슬픔에 빠진 그레고리를 위로했다.
그레고리는 누이의 경건한 신앙과 탁월한 신학적 소양을 글로 남겼는데 그의 누이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했다.
바질은 아테네와 콘스탄티노플에서 수학한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수사학 교사가 되었지만 누이의 권유를 받아들여 수도사로 변신했다.
외할아버지는 순교했고, 동생 그레고리와 누이 마크리나는 성인의 반열에 올랐으며, 동생 베드로는 세바스테의 감독이 되었다.
누이가 수녀원을 건립한 것을 보고 바질은 시리아, 이스라엘, 메소포타미아, 이집트를 두루 방문하고 돌아 온 27세 때(357년) 수녀원 근처 이리스 강변에 수도원을 건립했다.
그는 수도사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규칙을 문답형식으로 만들었는데 이 규칙은 오늘날에도 그리스인의 수도원에서 사용되고 있다.
바질은 니코메디아의 감독 유세비우스의 권유를 받아들여 수도원을 34세 때(364년) 장로가 되었고 6년 후에는 가이사랴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과도한 고행을 경계하면서 구제와 덕행을 강조했다.
또한 이방인의 문학이 그리스도인의 자녀교육에 가치가 있으므로 젊은이는 이방인의 문화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버려야 할 것은 버리라고 했다.
그는 40세에 사망했지만 381-2년 황제 데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때 개최된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 참석해 아리우스주의 신학을 이단으로 단죄하는 일에 공을 세웠다.
바질은 “네가 알고 있는 분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냐 아니면 알지 못하는 분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냐?”라고 물으면서 알고 있는 분에게 예배를 드린다고 대답할 경우 안다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안다는 말에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해 안다는 뜻이 내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함, 능력, 지혜, 선하심, 인류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정의를 아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또한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가 그분에 관해 알게 되지만 그렇다고 그분의 본질에 접근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본질을 모르면 그분에 관해 모르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분의 본질을 안다고 해도 그분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 같은 주장을 미친개에 물린 사람이 미친 상태에서 개를 보게 된다는 은유적인 말로 설명했다. 미친개에 물린 사람은 개를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자신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므로 이런 사람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피하라고 그리스도인에게 주의를 주었다.
하나님의 본질을 모르는 것은 알지 못하는 분에게 예배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 그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한 바질은 하나님의 본질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그 이상에 속한다고 보았다.
그를 비방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본질을 모르면서 어떻게 그분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알 수 있냐고 묻자 바질은 바울의 가르침대로 믿음 안에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생긴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을 모르더라도 그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믿음이 가능함을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지니라 (히브리서 11:6)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을 알기 때문에 그분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분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면서 바질은 요한의 말을 인용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 1:18)
그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에 관해 우리에게 알려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므로 그가 알려 주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본질이므로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 준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마태복음 9:28-29)
바질은 복음서에 기록된 소경 두 사람이 “예, 믿습니다, 주님”라고 말한 후 예수에게 예배드린 것을 예로 들면서 소경들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근거해서 행위 한 것으로 이 같은 지식이 예수에게 예배드리게 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예배를 믿음의 결과로 이해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하는 것이며, 믿는 사람은 믿음에 해당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지식의 양에 비례해서 믿음이 생기고, 또한 그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한다고 보았다.
그레고리는 웅변을 배우려고 아테네로 유학 갔다가 그곳에서 바질을 만났는데 바질이 그의 인생행로를 바꾸어 놓았다. 그레고리는 훗날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나는 아테네에서 웅변술을 배우면서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바질을 만났기 때문이다. 나는 나귀를 찾아 나섰다가 왕국을 발견한 사울과 같았다.
바질은 자신을 지지해 줄 후원자로서의 감독이 필요했으므로 그레고리를 이름도 없는 중부 어느 조그만 마을의 감독에 임명될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레고리는 목회가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자 곧 감독직을 떠났는데 그는 믿음에 대한 회의에 빠져 늘 괴로워했다.
바질은 그레고리를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서 자신을 위해 니케아 신조가 인준을 받도록 뛰어난 웅변술을 발휘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