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프리아누스도 엄격한 금욕주의를 최고의 덕으로 꼽았다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황제 데시우스(Decius)가 250년에 그리스도인을 탄압할 때 배교자들이 속출했다.
탄압이 그치자 배교자들은 교회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랐지만 교인들이 반기지 않았다.
순교가 교회의 씨앗이라는 가르침으로 목숨을 걸고 탄압을 이겨낸 교인들은 비겁한 행위를 한 배교자들을 교회가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키프리아누스도 배교자들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에는 반대했지만 일정한 기간을 두고 배교자들로 하여금 충분히 참회하도록 한 후 세례를 통해서 다시 입교시키는 것은 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신앙을 공식적으로 부인하거나, 교인을 탄압하는 자에게 성경책을 바치거나, 법정에서 동료교인을 비난한 자를 배교자로 규정했다.


로마 교회의 장로 노바티안(Novatian)은 배교자에 대한 키프리아누스의 관용적 태도를 비판했다.
보수주의적인 사고를 가진 노바티안은 중대하고 파멸적인 성질의 죄 즉 살인, 우상숭배, 사기, 박해받을 때의 배교, 참람, 간음 등은 교회가 축출해야 할 불치의 것들이며 배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배교자들을 영원히 추방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노바티안은 강경파의 선두자가 되었다.


칼리스투스는 스스로 대사교(Pontifex Maximus) 또는 감독 중 감독(Episcopus episcoporum)이라는 자부심으로 교회에 임했다.
테르툴리아누스와 이레네우스는 로마 교회를 가톨릭 교회의 뿌리(radix)요 어머니(mater)라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로마 감독이 다른 모든 교회 감독들 위에 실질적으로 특별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노바티안을 중심으로 모인 교인들은 칼리스투스의 온건한 태도에 반발하면서 순결한 교인만을 위한 교회를 따로 세웠다.
교회마다 법이 달랐으므로 노바티안파는 자신들의 교회에 입교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세례를 베풀었으며 감독도 따로 세웠다.
이렇게 그들에 의해서 로마 교회는 분열되고 말았다.
가톨릭 교회가 노바티안파를 이단으로 정죄했음은 물론이다.


노바티안파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는 251년 로마 감독으로 선출된 코넬리우스(Cornelius)도 포함되었다.
코넬리우스는 노바티안과 같이 배교자들은 교회로부터 영원히 추방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배교자들에 대한 재입교가 문제거리로 등장하자 감독들은 255-6년에 종교회의를 열었다.
감독들은 키프리아누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참회와 세례를 통해 배교자들을 재입교시킬 것을 결의하면서 정통 교회만이 세례를 베풀 수 있다고 선언했는데 그들이 말한 정통이란 ‘바른 견해’의 뜻으로 사도들이 건립한 교회와 정신적인 지도자와 순교자를 배출한 교회를 뜻했다.
그러나 62년 후 318년에 소집된 안시라(Ancyra) 종교회의는 배교를 살인과 마찬가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규정했다.


배교자에 대한 재입교 문제는 일단락되지 못한 채 계속 교회의 내분거리로 남았다.
로마 감독은 종교회의에서의 결의사항을 감독들이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종교회의의 결정을 따르지 않은 감독들은 많았다.
로마 감독은 동방 교회의 감독들이 종교회의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것을 분파적 행동으로 간주하면서 몹시 비난했다.
배교자의 재입교에 관한 논란은 세례에 관한 논란으로까지 불거졌으며 결국 교회의 역할에 관한 문제로 진전되었다.
감독들 대부분이 교회에만 구원이 있다는 키프리아누스의 주장을 받아들였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훗날 이것을 좀더 명확한 논리로 정의했다.


첫째,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은 사람은 아버지와도 같은 하나님을 모실 수 없으며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구원받을 수 없는 이유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이방인의 종교를 가진 적이 있는 사람과 사악한 죄를 지은 사람도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

둘째, 교회는 감독 위에 건립되었으며 하나님의 법으로 신앙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감독 안에 있고, 감독은 교회 안에 있으며, 감독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교회를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을 감독제도주의(episcopalianism)라고 한다.)

셋째, 교회가 일체가 되는 것은 감독들이 일체가 되는 것을 뜻한다.
감독들은 동등한 권위를 가지지만 감독들을 대표할 만한 사람은 베드로와 교황(로마의 감독)이다.
베드로의 후계자가 되는 교황을 중심으로 감독들은 일체가 되며 이는 가톨릭 교회의 뿌리이자 모체가 된다.
(이 같은 사고는 아우구스티누스 이전 약 250년경에 보편적이었으며 키프리아누스가 이런 주장을 한 적은 없더라도 이 같은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넷째, 감독은 성직자(sacerdos)로서 산 제물의 기능을 가진다.
감독은 ‘최후의 만찬’의 요소가 되는 피와 몸을 바치며 골고다의 제물이 된다.
감독은 그리스도를 따라서 진리와 완전한 제물을 교회에 임재하는 하나님에게 바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감독이 가톨릭 교회의 뿌리가 되는 교황임을 강조했는데 칼리스투스에게 이미 이런 사고가 있었다.
칼리스투스는 스스로 전체 교회의 대표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키프리아누스 당시 3세기 중반 감독들은 이중적 도덕성을 표방했는데 교인들에게는 유연한 도덕을 요구했지만 자신들에게는 엄격한 도덕을 적용했다.
감독들의 엄격한 금욕주의는 스토아 철학과 영지주의와 관련이 있지만 신약성경 저자들의 주문과도 일치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태복음 10:38-39)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데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태복음 19:21)


테르툴리아누스와 마찬가지로 키프리아누스도 엄격한 금욕주의를 최고의 덕으로 꼽았다.
그는 금욕주의를 순교 다음으로 가치 있게 여겼는데 다음과 같은 말에서 알 수 있다.


순교는 100배를 거두는 것이고 자발적 독신생활은 60배를 거두는 것이다.


황제 데시우스가 250년에 그리스도인을 탄압할 때 키프리아누스는 피신해 목숨을 건졌지만 8년 후 황제가 다시 탄압하자 당당하게 맞서다가 9월 14일에 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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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네우는 이집트 사람 발렌티누스(Valentinus)를 특히 비난했다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소아시아 학파를 대표할 만한 사람은 프랑스 남부 리옹(Lyons)의 감독 이레네우스였다.
이레네우스는 요한의 신학을 받아들였지만 바울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테르툴리아누스와 마찬가지로 그도 종교문제에 있어서 철학적 사변을 반대했다.
그는 영지주의가 철학을 추종한 종교의 결말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고 했다.
그는 선천적(a priori) 사변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하나님은 사색을 통해서가 아니라 계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지며 하나님이 창조 이전에 무엇을 행했느냐 하는 따위의 무용한 질문에 정력을 소모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교를 유일한 철학으로 보는 변증가들의 견해에 반대했다.
그는 철학이 신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며, 하나님의 계시가 단순하지만 새로워서 그리스 철학보다 훌륭하다는 견해에도 반대했다.
그는 전통만이 유일한 믿음의 근원이라 여기고 오로지 성경의 통일적 요약에만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런 점이 훗날 가톨릭 교의학(Catholic dogmatics)의 아버지란 영광스러운 칭송을 받게 한 이유일 것이다.


소아시아의 서머나(Smyrna)에서 태어난 이레네우스는 어렸을 적 서머나의 감독 폴리캅(Polycarp, 70-155)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는데 폴리캅은 요한의 제자였다.
이레네우스는 로마에서 수학했다.
177년에 교황 엘루데루스(Eleutherus)를 만나 소아시아에서 몬타누스주의에 관한 논쟁으로 감독들 사이의 불화가 심화되고 있음을 알리고 소아시아에 관용을 베풀 것을 호소했다.
이 시기에 그는 몬타누스주의에 동조했다. 그해 리옹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탄압이 있었으며 감독 포디누스(Pothinus)가 참수되었는데 이레네우스는 포디누스의 뒤를 이어 178년에 감독으로 임명받고 이듬해 리옹으로 돌아왔다.
순교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황제 세베루스(Severus)가 그리스도인을 탄압하기 전인 200년경에 사망했다.


이레네우스는 계시의 내용이 단순히 새로우면서 보다 나은 철학에 불과하다는 자들의 견해를 비판했다.
그에게는 성경적 전통만이 신앙의 유일한 근원이었다.
그는 구약과 신약성경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계시와 본래의 전통들이 사람에게 도달될 수 있는 길이 없다고 주장하여 가히 성경주의 신학자라고 말할 만하다.


이레네우스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태초부터 함께 존재했다고 했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계시로 정의하면서 유일신 하나님으로부터 율법과 복음, 창조와 구원이 온다고 했으며 하나님을 지식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하나님에 의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방법이 없다”고 했다.
이는 오직 계시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에게 하나님은 오로지 자각하는 분으로 그분의 자각에는 인류가 포함되며 하나님은 사랑으로 인류에게 접근하고 인류는 사랑을 통해 그분을 알게 된다고 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떠나서 대상물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섭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분에 관해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레네우스는 하나님은 홀로 존재하는 법이 없고 늘 로고스와 지혜와 더불어 존재한다고 했는데 그가 말한 로고스란 물론 그리스도를 가리켰으며 지혜는 성령을 가리켰다.
그는 로고스를 하나님이 스스로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했으며 지혜를 현존으로 이해하였다.
삼인조(trias)라는 말로 성부, 성자, 성령이 본질에서 한 실체라고 먼저 주장한 사람은 테르툴리아누스였는데 이레네우스의 신학에서도 이 같은 개념이 발견된다.
그는 삼위가 본질에서 일체를 이루기 때문에 우주의 근본이 되는 원동력인 로고스도 하나라는 것을 지적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이고 보이는 하나님은 그리스도”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현존임을 강조한 말이다.


이레네우스는 물질이 사악하다는 영지주의자들의 관념에 반박하면서 사람은 본래 선하게 창조되었다는 성선설을 주장했다.
그는 사람이 자유의지로 하나님에게 불순종했기 때문에 사악해졌으며 따라서 물질도 본래 사악한 것이라고 인식한 그리스 철학자들의 관념을 배격했다.
대신 이제라도 우리가 하나님에게 순종하면 영생을 누릴 수 있으며 신성을 가지고 하늘나라에 거할 수 있다는 구원론을 폈다.
그리스인은 영혼의 불멸하는 영원한 삶을 천연적인 현상으로 이해했는데 이레네우스는 이 같은 사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불멸하는 영혼의 영생을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구원의 결과로 이해했다.
영혼과 육체를 분리적으로 보지 않았으므로 그는 죄에 대한 책임을 영혼과 육체가 따로 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육체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영혼도 함께 죄를 짓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레네우스는 아담이 하나님에게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양(similitudo) 또는 영생을 상실했지만 하나님 본래의 형상(image)마저 상실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여기서 그가 모양과 형상을 구별했으며 모양과 형상에 있어서 사람은 하나님과 같다고 했음을 볼 수 있다.
모양과 형상에 대한 이레네우스의 구별은 404년에 제작된 첫 라틴어 공식성경 불가타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 (이미지, image)을 따라 우리의 모양 (유사함, likeness)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세기 1:26)


그에게 있어서 모양과 형상은 멸할 수밖에 없는 이성적인 존재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해 주는 것이지만 이것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기도 했다.


이레네우스는 185년에 저서 『모든 이단에 대적하여 Adversus Omnes Haereses』에서 영지주의자들의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에 대한 명확한 이원론을 비난하였다.
그는 이집트 사람 발렌티누스(Valentinus)를 특히 비난했는데 발렌티누스는 로마의 교사로서 165년경 교회를 배척한 영지주의자였다.
이레네우스는 인류가 선과 영생을 상실한 것을 아담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한 것의 결과로 보았다.
또한 그는 바울의 영향을 받아 예수를 제2의 아담으로 인식했으며 그 제2의 아담이 하나님에게 순종함으로써 선과 영생을 회복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요한의 신학을 받아들인 이레네우스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더불어 존재한 그리스도가 사람의 형상으로 지상에 온 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였다고 보았다.
또한 아담이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스도가 회복했으므로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되는 예수의 말을 따르면 하나님과 유사해지는 영생을 얻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예수가 초월적인 사랑으로 우리와 같은 인생을 산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유사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역설했다.
예수 안에서 인류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본 이레네우스는 아담으로부터는 사망이 비롯했지만 예수로부터는 영생이 비롯했다는 구원론을 제기했다.
그는 구원을 재현(recapitulatio)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하늘과 땅의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체가 된다는 바울의 말을 재현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1:10)


그는 또한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이브를 연계함으로써 마리아에 대한 숭배사상을 고취시켰다.


이브가 불순종으로 매듭지은 것을 마리아가 순종으로 풀었다.
이브가 불신앙에 매인 것을 마리아가 신앙으로 해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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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네우스로 대표되는 소아시아 학파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이레네우스는 『모든 이단에 대적하여』에서 복음서와 바울의 서신을 정경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복음서에 관해 언급했다.


복음서는 그 이상이나 이하가 될 수 없다.
세상은 네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고, 근간이 되는 네 바람이 있으며, 교회는 지상에 심은 씨앗이고, 복음서는 교회의 기둥과 기초와 생명의 호흡이므로 교회가 네 개의 기둥(복음서)으로 서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네 복음서는 결백함을 호흡하도록 만들어 흥분한 사람들에게 생명을 제공한다.


이렇게 이레네우스 신학의 특징은 구원론으로, 그 구원은 죄를 용서받는 것만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사는 승리이며 예수를 사랑하고 의지함으로써 얻게 되는 도덕적 변화이다.
신성과 인성을 모두를 지닌 그리스도에게는 부패할 수밖에 없는 육체를 부패하지 않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적격자가 될 수 있다.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우주의 도덕적 주재자가 되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며,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신성한 능력을 발휘하게 되므로 우리는 예수를 사랑하고 의지할 때만이 비로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15:22)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2)


이레네우스는 감독이란 사도가 선택한 사람으로 그에게는 신학의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사도들에 의해 선택된 교회의 책임자들로서 오늘날까지 계승된 감독들의 이름을 일일히 거명할 수 있다.…
만일 사도들에게 정신적으로 성숙한 비밀스러운 신비가 있었다면 그들은 개별적으로 감독들에게 그 신비를 물려주었을 것이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후계자들이 교회를 목회하는 데 있어 온전하기 때문에 비난받을 만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었다.


이레네우스는 예수가 사도들에게 복음을 주었으므로 그 사도들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가르친 진리를 알게 되었다고 하며 예수의 말을 인용했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16)


이레네우스가 폴리캅에 관해 기록을 남겼으므로 우리는 그에 대해 알 수 있다.
이레네우스에 의하면 폴리캅은 사도들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만난 사람들과도 어울린 적이 있다.
폴리캅은 사도에 의해서 서머나(Smyrna) 교회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이레네우스가 어렸을 적 폴리캅은 노인이었고 그리스도인이 박해받을 때 순교했다.
이레네우스는 폴리캅이 사도로부터 직접 배운 것을 교인에게 가르쳤으므로 사도들의 가르침이 교회를 통해서 전래될 수 있었다고 했다.
또한 폴리캅의 후계자들은 아시아의 교회에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전했다고 한다.


폴리캅은 로마를 방문했을 때 발렌티누스와 마르시온으로부터 교사 받은 많은 이단자를 개종시켜 교회로 인도했다고 했다.
이레네우스는 폴리캅이 마르시온을 만난 에피소드를 전했는데 마르시온이 폴리캅에게 “날 알아 주시오!”라고 말하자 폴리캅은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고 한다.
“당신을 알아 주리다. 당신이 사탄의 첫 아들임을 알아 주리다.”


결론적으로 이레네우스는 교회 내 영지주의자들을 퇴치하는 일에 앞장을 섰으며, 그들을 반박하는 글을 통해서 창조의 하나님과 구속의 하나님이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계시를 나타내는 그리스도를 신인간(god-human)으로 묘사하면서 그가 인류를 구원하는 중보자라고 했다.
이레네우스는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유의지를 남용함으로써 하나님에게 불순종했으며 아담의 원죄로 인해 인류가 타락했다고 했다.
타락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죽음의 권세에 희생되는 것을 뜻하며 육체의 죽음은 타락의 상태를 다소 회복시켜 주는 소극적 구제책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인류를 새롭게 만들고 만물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성육신되었다는 것이 이레네우스의 주장이다.


이레네우스 신학의 의의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보존해서 그 전통 위에 가톨릭 교회의 체계를 세운 데 있다.
그에 의해서 정경 전체에 대한 이해와 고찰이 처음 제기되었으며, 구약과 신약성경의 신학적 연계성이 암시되었고, 바울의 가르침에 권위를 부여하게 되었다.
그의 신학은 성서적 색채가 짙었으며, 사도적 전승에 대한 경의가 나타났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신학이었다.
그의 신학은 가톨릭 교리를 제정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는데 이런 점에서 보면 사도 이후 최초의 신학자라고 말할 만하다.

이레네우스로 대표되는 소아시아 학파와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로 대표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 및 테르툴리아누스로 대표되는 북아프리카 학파는 비교해 볼 만하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대체로 필로와 그리스적 변증가들을 본받아 로고스 개념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들의 임무는 영지주의에 대항해 참된 교회적 영지주의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가장 저명한 신학자들은 비복음주의적인 사변적 경향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이상주의와 사변적 경향은 북아프리카 학파의 현실주의적인 철저한 실천적 경향과 상반되었다.
이레네우스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북아프리카 학파의 양 극단에 비해 보다 초기단계를 대표한다.


니브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로고스 개념을 신학의 원리로 사용한 오리게네스가 그리스도교를 일종의 철학과 같은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과오를 겨우 면했으며 무제약적인 유심론(Spiritualism)의 미궁에 빠졌다고 평가한다.
한편 모든 관심을 자연에 집중시킨 테르툴리아누스는 하나님과 영혼에 대해서까지도 그 본질을 정의하려고 했으므로 편파적인 현실주의에 집착하게 되었다.
이레네우스는 아주 건전한 성서주의와 전승에 대한 건전한 태도와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에 의해서 이들 양 극단의 위험성을 모두 극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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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첫 원동자의 개념을 받아들여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감독들 중에서는 근원적으로 알 수 없는 존재인 신이 그리스도인에게 알려졌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동방 교회 감독들에게는 성경에 나타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인의 불변하는 창조적 힘으로서의 신에 대한 관념이 일반적인 통념이었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신학은 양립하고 있었는데 테르툴리아누스가 서방을 대표할 만한 신학자라면 동방을 대표할 만한 신학자는 클레멘트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상업의 중심지가 되도록 건립된 도시였지만 곧 지식인들의 도시로 유명해졌다.
이 도시는 그리스 철학과 고대 이집트 사상 그리고 동방의 종교와 유대교 등이 엇갈리는 교차점이 되었고, 세계적으로 부유한 도시들 중 하나가 되었으며, 세계 최대 규모의 도서관을 갖춘 학문의 도시로서 면모를 뽐냈다.
또한 예수 당시를 전후해서 필로를 포함한 몇 지식인이 알렉산드리아를 유대교 신학과 그리스 철학 사이에 대화가 가능한 곳으로 만들었다.


언제 누가 이 도시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스도교는 벌써부터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지식인들이 의심 없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이 납득할 만한 수준 높은 신학을 소개해야 했다.
그래서 판타이누스(Pantaenus)는 160년경 지식인들을 위한 교리문답학교를 세웠다.
판타이누스가 인도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는 호기심을 끄는 보도 외에는 그에 관해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클레멘트의 저서에 판타이누스에 관한 기록의 일부가 남아 있어 당시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2세기가 끝날 무렵 이 학교는 놀랄 만한 성장을 했고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모체가 되었다.


아테네에서 태어난 클레멘트는 철학을 수학한 후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판타이누스의 가르침을 받았다.
판타이누스의 뒤를 이어 마흔 살에 교리문답학교 교장이 된 클레멘트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선두자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철학적 사변이 강했고, 신학을 학문으로 연구했으며, 철학용어를 많이 구사한 것이 다른 학파들과 달랐다.
알렉산드리아 지식인들은 플라톤보다는 스토아 철학으로부터 더욱 영향을 받은 클레멘트의 그리스도론에 대해 별로 호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클레멘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현존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 인류의 교사로 정의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는 율법으로 나타난 것처럼 그리스인에게는 철학으로 나타났다고 했는데 그가 말한 철학은 특정한 철학이 아니라 일반적 의미로서의 철학이었다.
이렇게 그의 이론에서 그리스 철학자들의 개념이 발견되는 것은 그가 철학의 논리로 신학을 정립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인생만이 “의미 있는 인생”이라고 했다.
그에게 믿음이란 열정과 희망이 있는 새 인생이었으며 그리스도는 믿음과 사랑의 세계에 속한 분이자 교회에 속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주요 신학은 클레멘트에 의해서 발전되었지만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제자 오리게네스에 의해서였다.
클레멘트의 신학은 저서 『그리스인에게 주는 권면 Admonition to the Greeks』, 『교사 Instructor』, 『잡문집 Miscellanies』에 나타나 있다.
그는 징계와 벌, 훈계와 교훈을 통한 교육을 강조하며 인간의 교육은 일찍이 최종적이고 권위 있는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한 바 있는 로고스에 의해서 성취되었다고 했다.
또한 그리스도교가 출현하기 전에는 예비적 단계가 필요한데 이 기간 동안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현시된 동일한 로고스가 사람에게 교육적으로 영향을 준다고 했다.
로고스가 그리스인에게는 철학으로 유대인에게는 율법으로 선포된 것처럼 예비적 단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클레멘트는 3세기 초 그리스어로 여덟 권에 이르는 저서 『스트로마타 Stromata』 (카펫carpets이라는 뜻이다)에서 신앙과 그리스 철학의 관계를 기술하고 있다.
저서에서 그는 하나님이 그리스인에게 철학을 주어 그리스도가 올 것을 예비하도록 했듯이 유대인에게도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어 그리스도를 예비하도록 했다고 한다.
또한 클레멘트에게서는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신학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로고스(또는 그리스도)의 씨앗을 그리스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가 이 땅에 오기 전 철학이 그리스인에게 의가 무엇인가를 알도록 해 주었다.
이제 철학은 진정한 종교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준비단계로 나타났다.…
하나님은 모든 훌륭한 것들의 근원으로서 구약과 신약성경을 통해 직접적인 방법으로 일부 나타나고 철학을 통해 간접적인 방법으로 일부 나타나기도 한다.


클레멘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첫 원동자(the unmoved mover)의 개념을 받아들여 첫 원동자를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근본적인 힘으로 보았다.
첫 원동자는 하나인 동시에 무한한 것으로 측정할 수가 없기 때문에 차원과 경계가 없고 형상과 이름도 없다.
신에게 명칭을 붙일 수는 없지만 만일 붙인다면 유일한 분, 선, 정신, 최고의 존재자, 성부, 하나님, 창조주, 또는 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명칭들을 모두 합할지라도 신의 전지전능함이 설명되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유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클레멘트는 그리스 신화를 냉소했는데 유스티누스와 달리 유머를 사용해서 비판을 가했다.
『그리스인에게 권고 2 Exhortation to the Greeks 2』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해학적으로 시위했다.


당신이 묘사하는 것은 영웅적인 제우스이다.
선량한 사람이여, 당신이 제우스로 하여금 여자의 속옷을 힐끔 훔쳐보도록 한다면 제우스는 몸을 드러내면서 수줍어 할 것이다.


지나치게 철학에 의존한다는 말을 듣자 클레멘트는 “어린이들이 가면을 보고 놀라듯이 그리스 철학에 놀라는” 허다한 그리스도인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라면서 말했다.


진리의 길은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시냇물이 사방으로부터 흘러 내려 하나의 커다란 큰 강을 이루듯이 모든 것이 한 진리로 유입된다.


많은 부유한 가정의 자제들이 클레멘트로부터 수학했는데 그는 부유함을 과대하게 평가하지는 않았지만 돈을 버릴 필요는 없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너는 너의 부유함을 무시할 수 있느냐?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너로 하여금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다.
주는 인색한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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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트에게 가장 고상한 인생은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진보주의적 사고를 가진 클레멘트는 하나님과의 교섭이 남자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여자에게도 가능하다고 말함으로써 남성과 여자 사이에 성적인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을 여성으로 상상한 적도 있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친절하게 달래 주는 아버지의 가슴인 말씀으로 피신한다.
하나님만이 사랑의 젖을 자녀들에게 적절히 공급해 주며 하나님의 가슴을 빨 수 있는 사람은 정녕 복이 있다.


철학이 클레멘트에게 미친 영향은 그가 지식을 신앙보다 우선적으로 생각하게 했다.
그는 철학의 영향에 의해 신앙과 지식을 구분했다.
그에 의하면 신앙은 단순히 권위에 의존하는 그리스도인의 신념으로, 책벌에 대한 두려움과 보상에 대한 소망이 관련되어 있다.
반면 지성은 고상한 형태의 지식으로 권위에 근거해서 믿기보다는 자신의 확신에 근거해서 믿음의 내용을 평가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지식은 인간을 사랑으로 인도하며 사랑은 두려움에 기인하지 않는 행동을 하게 만든다.
클레멘트는 지식이 믿음의 완성을 이루게 하는 보다 수준 높은 단계임을 강조했다.
그는 진정한 지식만이 완전한 그리스도인을 만든다고 보았다.


클레멘트는 그리스도인을 계시를 통해 불멸의 지식 또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고 정의했는데 불멸의 지식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에서 영지주의적인 요소가 발견된다.
그는 무지가 죄라는 스토아 철학 개념을 받아들였으며 계시를 통한 불멸의 지식이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인도한다고 믿었다.
스토아 철학의 엄격한 금욕주의 윤리를 받아들여 금욕주의를 신성한 생활태도로 여겼으며 육욕을 자제하는 것을 신성한 행위로까지 여겼다.
그는 진정한 지식이 사람으로 하여금 선한 행위를 하게 만든다고 가르친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았다.
소크라테스는 사악한 행위는 무지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며 덕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스토아 철학자들은 그의 이러한 가르침을 소중하게 받아들였다.
따라서 물질은 멸하지만 영혼은 불멸하다고 믿는 이원론주의자들에게 금욕주의에 기초한 윤리는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결론이었다.


클레멘트에게 가장 고상한 인생은 모든 욕망으로부터 영혼이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이었다.
그는 영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철학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철학을 모세의 율법에 비교하며 철학이 그리스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깨닫게 해 준다고 보았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분이라면서 클레멘트는 플라톤의 말과 성경을 인용했다.


우주의 아버지가 되는 창조주를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발견했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지식의 주제와도 같아서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가니라 (출애굽기 20:21)


볼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하나님이지만 그분은 오래 전부터 현인들에게 알려져 있었음을 강조하며 클레멘트는 오르페우스의 말을 인용했다.


한 분 뿐인 온전한 분이 존재하는데 만물이 그분으로부터 태어났다.
그분을 본 사람은 없으나 그분은 모든 사람을 보고 있다.
난 그분을 볼 수가 없는데 그분은 구름에 에워싸여 있다.
사람은 성장하는 육체와 뼈에 단지 작은 동공을 눈에 지닌 존재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이라면서 클레멘트는 바울의 말도 인용했는데 바울은 자신이 몸소 체험한 바를 익명의 체험처럼 말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린도후서 12:2-4)


클레멘트는 지혜와 지식으로 가득 찬 신비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바울의 말을 자주 인용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통치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고린도전서 2:6-7)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있느니라 (골로새서 2:2-3)


그는 예수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태복음 13:34-35)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rverus)가 그리스도인을 탄압한 202년 탄압을 피해 클레멘트는 알렉산드리아를 떠났는데 그때 그는 5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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