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프리아누스도 엄격한 금욕주의를 최고의 덕으로 꼽았다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황제 데시우스(Decius)가 250년에 그리스도인을 탄압할 때 배교자들이 속출했다.
탄압이 그치자 배교자들은 교회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랐지만 교인들이 반기지 않았다.
순교가 교회의 씨앗이라는 가르침으로 목숨을 걸고 탄압을 이겨낸 교인들은 비겁한 행위를 한 배교자들을 교회가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키프리아누스도 배교자들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에는 반대했지만 일정한 기간을 두고 배교자들로 하여금 충분히 참회하도록 한 후 세례를 통해서 다시 입교시키는 것은 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신앙을 공식적으로 부인하거나, 교인을 탄압하는 자에게 성경책을 바치거나, 법정에서 동료교인을 비난한 자를 배교자로 규정했다.
로마 교회의 장로 노바티안(Novatian)은 배교자에 대한 키프리아누스의 관용적 태도를 비판했다.
보수주의적인 사고를 가진 노바티안은 중대하고 파멸적인 성질의 죄 즉 살인, 우상숭배, 사기, 박해받을 때의 배교, 참람, 간음 등은 교회가 축출해야 할 불치의 것들이며 배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배교자들을 영원히 추방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노바티안은 강경파의 선두자가 되었다.
칼리스투스는 스스로 대사교(Pontifex Maximus) 또는 감독 중 감독(Episcopus episcoporum)이라는 자부심으로 교회에 임했다.
테르툴리아누스와 이레네우스는 로마 교회를 가톨릭 교회의 뿌리(radix)요 어머니(mater)라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로마 감독이 다른 모든 교회 감독들 위에 실질적으로 특별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노바티안을 중심으로 모인 교인들은 칼리스투스의 온건한 태도에 반발하면서 순결한 교인만을 위한 교회를 따로 세웠다.
교회마다 법이 달랐으므로 노바티안파는 자신들의 교회에 입교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세례를 베풀었으며 감독도 따로 세웠다.
이렇게 그들에 의해서 로마 교회는 분열되고 말았다.
가톨릭 교회가 노바티안파를 이단으로 정죄했음은 물론이다.
노바티안파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는 251년 로마 감독으로 선출된 코넬리우스(Cornelius)도 포함되었다.
코넬리우스는 노바티안과 같이 배교자들은 교회로부터 영원히 추방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배교자들에 대한 재입교가 문제거리로 등장하자 감독들은 255-6년에 종교회의를 열었다.
감독들은 키프리아누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참회와 세례를 통해 배교자들을 재입교시킬 것을 결의하면서 정통 교회만이 세례를 베풀 수 있다고 선언했는데 그들이 말한 정통이란 ‘바른 견해’의 뜻으로 사도들이 건립한 교회와 정신적인 지도자와 순교자를 배출한 교회를 뜻했다.
그러나 62년 후 318년에 소집된 안시라(Ancyra) 종교회의는 배교를 살인과 마찬가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규정했다.
배교자에 대한 재입교 문제는 일단락되지 못한 채 계속 교회의 내분거리로 남았다.
로마 감독은 종교회의에서의 결의사항을 감독들이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종교회의의 결정을 따르지 않은 감독들은 많았다.
로마 감독은 동방 교회의 감독들이 종교회의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것을 분파적 행동으로 간주하면서 몹시 비난했다.
배교자의 재입교에 관한 논란은 세례에 관한 논란으로까지 불거졌으며 결국 교회의 역할에 관한 문제로 진전되었다.
감독들 대부분이 교회에만 구원이 있다는 키프리아누스의 주장을 받아들였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훗날 이것을 좀더 명확한 논리로 정의했다.
첫째,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은 사람은 아버지와도 같은 하나님을 모실 수 없으며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구원받을 수 없는 이유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이방인의 종교를 가진 적이 있는 사람과 사악한 죄를 지은 사람도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
둘째, 교회는 감독 위에 건립되었으며 하나님의 법으로 신앙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감독 안에 있고, 감독은 교회 안에 있으며, 감독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교회를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을 감독제도주의(episcopalianism)라고 한다.)
셋째, 교회가 일체가 되는 것은 감독들이 일체가 되는 것을 뜻한다.
감독들은 동등한 권위를 가지지만 감독들을 대표할 만한 사람은 베드로와 교황(로마의 감독)이다.
베드로의 후계자가 되는 교황을 중심으로 감독들은 일체가 되며 이는 가톨릭 교회의 뿌리이자 모체가 된다.
(이 같은 사고는 아우구스티누스 이전 약 250년경에 보편적이었으며 키프리아누스가 이런 주장을 한 적은 없더라도 이 같은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넷째, 감독은 성직자(sacerdos)로서 산 제물의 기능을 가진다.
감독은 ‘최후의 만찬’의 요소가 되는 피와 몸을 바치며 골고다의 제물이 된다.
감독은 그리스도를 따라서 진리와 완전한 제물을 교회에 임재하는 하나님에게 바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감독이 가톨릭 교회의 뿌리가 되는 교황임을 강조했는데 칼리스투스에게 이미 이런 사고가 있었다.
칼리스투스는 스스로 전체 교회의 대표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키프리아누스 당시 3세기 중반 감독들은 이중적 도덕성을 표방했는데 교인들에게는 유연한 도덕을 요구했지만 자신들에게는 엄격한 도덕을 적용했다.
감독들의 엄격한 금욕주의는 스토아 철학과 영지주의와 관련이 있지만 신약성경 저자들의 주문과도 일치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태복음 10:38-39)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데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태복음 19:21)
테르툴리아누스와 마찬가지로 키프리아누스도 엄격한 금욕주의를 최고의 덕으로 꼽았다.
그는 금욕주의를 순교 다음으로 가치 있게 여겼는데 다음과 같은 말에서 알 수 있다.
순교는 100배를 거두는 것이고 자발적 독신생활은 60배를 거두는 것이다.
황제 데시우스가 250년에 그리스도인을 탄압할 때 키프리아누스는 피신해 목숨을 건졌지만 8년 후 황제가 다시 탄압하자 당당하게 맞서다가 9월 14일에 참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