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동쪽은 종교 박람회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1세기 지중해 건너편 동쪽은 겉으로는 번영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한 데 뒤섞인 민족들에 의해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있었다.
로마 제국이 이 지역을 통치하기 시작한 기원전 2세기부터 도시들이 변모했는데 국제적 교역과 문화의 도시로 탈바꿈하여 사람들의 외면적인 생활에는 활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물리적 변화일 뿐 정신적으로는 혼란스러웠다.
봇물이 터지듯 외래문화가 들이닥치자 자신이 속한 도시 문화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은 문화의 범람에 방황해야 했던 것이다.


이 지역에는 많은 학파가 생겼고, 신화들이 난무했으며, 동양에서 흘러 온 신비주의 사상도 활개를 쳤다.
유대교는 일찍이 기도의 집(house of prayer)을 만들어 이방인을 개종시켰는데 기도의 집은 나중에 회당(synagogue)으로 불려졌다.
시나고그(synagogue)는 그리스어로 모인다는 뜻이다.
회당은 유대교의 교리를 교육하고, 의식을 행하는 만남의 장소였다.
여자들도 지위가 향상되어 회당의 멤버가 되거나 후원자가 되었으며, 작은 그룹의 지도자가 되기도 했다.


지중해 동쪽은 종교 박람회와도 같았는데 도시국가의 수호신들이 득실거렸다.
특히 바벨론, 페르시아, 이집트에서 유입된 신비주의 성격의 종교들이 관심을 끌었다.
유일신을 신봉한 유대교는 이 지역 사람들에게 신과 인간의 관계를 명료하게 설정해 주지 못했다.
게다가 유대교는 천사들을 인정했고 하늘나라의 계급사회를 조성했으며 신이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해서 율법을 주었다고 함으로써 민족의 종교로서 한계를 드러냈다.
왜 신이 우주와 인간을 창조했으며 무슨 목적으로 다스리는지에 관한 설명은 분명하지 않았다.
유대교의 신은 은혜를 결핍했고 율법을 지키는 자만 구원했으며 신과 인간의 관계는 엄격한 법적 관계가 되어 갔다.


이 같은 법적 관계를 부정하고 은혜에 의한 구원의 관계를 주장한 사람이 바울이다.
바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고 했다.
구원이란 예수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는 것이며 인류의 조상에 의해 저주받은 죽음으로부터 영생하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 대신 그리스도란 말을 사용했는데 예수와 어울린 적이 없는 그에게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라는 표현으로 충분했다.
그리스도가 성육신되기 전 하나님과 더불어 존재했으며, 지상에서는 우리와 같은 인생을 살았고, 부활한 후에는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 바울 신학의 요지이다.
만인이 하나님 앞에 평등하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로마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자 바울은 고난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을 받게 된다고 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왕권들이나) 주관들이나 (주권들이나) 정사들이나 (여러 천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로새서 1:15-1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본질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립보서 2:6-9)


예수가 처형당한 후 그를 숭배하는 운동이 이스라엘 안과 밖에서 활발하게 벌어졌다.
베드로(Peter)와 예수의 동생 야고보(James)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 예루살렘 교회(Council of Jerusalem)는 국내외 선교 본부였다.
예수의 제자들로 구성된 점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국외 그리스도인으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았지만 신학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예루살렘 교회는 따로 교회를 건립하지 않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유일한 성지로 여겼으며 형제단처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모임을 가졌을 뿐이다.
그들은 모여서 구약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불렀는데 제사장과 바리새인도 모임에 참석했었다.


사도들의 권리와 의무, 활동에 관한 기록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다.
또한 바울은 사도들과 어울리기를 꺼려했는데 이는 신학에 대한 견해차이 때문이었다.
바울은 49년에 안디옥으로부터 바나바(Barnabas)와 교인을 대동하고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는데 개종한지 14년만이었다.
방문 목적은 자신의 교회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간섭을 따지기 위해서였다.
예루살렘 교회가 개종한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규례 문제에 관한 논쟁이 격렬해지자 베드로와 야고보가 중재에 나서서 바울의 편에 섰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확증을 문서로 써서 바울에게 주었다.
바울은 규범의 설정과 선행의 목록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우월감을 줄 수 없으며, 할례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음식규례와 여타의 규례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함으로써 이방인으로 하여금 쉽게 개종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교의 문을 활짝 열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라디아서 3: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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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Paul)은 로마식 이름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바울(Paul)은 로마식 이름이고 본명은 사울(Saul)이다.
그가 태어난 다소(Tarsus)는 학문의 도시고 “소아시아의 아테네”로 불리었으며 상업도시로도 유명했다.
베냐민(Benjamin) 지파에 속한 유대인으로 태어난 바울은 율법에 따라 8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빌립보서 3:5).
전설에 의하면 바울의 조상은 갈릴리(Galilee) 북쪽 게네사렛(Genasseret) 호수 근처에 거주한 지독한 보수주의자였으며 가족이 다소로 이주한 것은 로마가 이스라엘을 통치할 때였다.
아버지가 로마 시민권을 취득했으므로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었다(사도행전 22:28).
또한 고조부가 바리새인이었으므로 바울은 바리새파 교육을 받았다.
바울의 아버지는 딸의 혼례를 예루살렘에서 올렸고 바울을 랍비가 운영하는 고등학교에 입학시켰다(사도행전 22:3).


바리새파의 촉망받는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한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을 섰다.
그리스도인을 체포해 예루살렘으로 호송하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 그는 하늘로부터 내려 온 빛을 보고 갑자기 눈이 멀었으며 부활한 예수의 음성을 들었다.
빛을 보고 어떻게 눈이 멀었으며 예수의 음성을 어떻게 들었는가에 관해서는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신비적인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비주의를 옹호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했다.
모세의 율법이 더 이상 유용하지 못함을 역설했으며 율법을 저주라고 했는데 613가지나 되는 법적 간섭이 사람을 의인으로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죄인으로 규정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율법의 면책을 주장하지 않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만용이 되어 나타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바른 행위에 따라서 하나님의 보상을 받게 된다고 가르쳤지만 궁극적으로는 믿음이 구원을 보장한다고 보았다.


바울은 또한 신약성경을 가장 먼저 쓴 사람이다.
그는 50년대 초부터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그리스도 신학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51년에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에게 편지를 쓴 후 64년까지 로마, 고린도, 골로새, 에베소, 갈라디아, 빌립보, 빌레몬 교회의 교인들과 믿음의 아들들 디모데와 디도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들 13편이 신약성경에 포함되었다.
그가 즐겨 사용한 말은 의와 믿음이었으며 그에게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를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의라고 믿는 것이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로마서 3:21-22)


여기서 의란 예수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혜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3:24)


아담의 원죄로 인해 인류는 죄와 사망을 상속받았는데 제2의 아담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사망의 위협으로부터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바울은 주장했다.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로마서 5:15)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의를 아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의로워지는 것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후견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3:23-24)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로마서 4:16)


후사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며(로마서 8:14)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영광이다.
영혼의 영광에 관해 언급한 것은 멸할 수밖에 없는 육체가 불멸하는 영광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한 때문이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고린도전서 15:50)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누리는 영광은 당장 체험이 가능하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후서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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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주의자(Gnosticist)란 신적 지식(그노시스 gnosis)을 아는 사람을 말하는데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지중해 동쪽 도시들에 세워진 교회들 중에는 바울의 신학에 반발한 교회도 있었지만 대부분 절대적 권위로 받아들였다.
물리적으로 바울을 괴롭힌 사람은 유대인이었지만 신학적으로 괴롭힌 사람은 영지주의자들이었다.
성령은 지혜와 동의어로 사용되었으므로 성령은 신적 지혜 또는 지식을 주는 힘으로 인식되었다.
오순절에 500명이 한꺼번에 성령을 받은 것은 전설처럼 알려졌고 바울 또한 성령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성령이 신적 지식을 준다는 믿음에 관해서는 영지주의자들의 견해도 바울과 다르지 않았지만 그들은 신적 지식을 다른 데서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신적 지식을 구할 수 있다고 한 반면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포함해서 이교와 그리스 철학으로부터도 구할 수 있으며 유대교의 종말론과 근동 일대의 종교 문화에서도 가능하다고 했다.


영지주의자(Gnosticist)란 신적 지식(그노시스 gnosis)을 아는 사람을 말하는데 1세기와 4세기 사이 지중해 동부 절반에 해당하는 일대에 영지주의자들이 분포되어 있었다.
그들은 영혼이 불멸하다고 믿은 반면 물질은 멸하며, 본질적으로 악하고, 순수하고 고상한 영혼을 육체가 괴롭힌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영혼이 어떻게 육체에 유입되었으며, 영혼이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윤리적인 문제로 인식했고, 육체의 욕망을 부정하는 데서 영혼의 자유를 구가하려고 했다.


파피루스에 기록된 영지주의자들의 교본이 이집트 농부에 의해서 1945년 낙 함마디(Nag Hammadi) 마을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교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부활을 환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차라리 세상이 환상이라고 말하는 편이 적합할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세상을 환상으로 여겼으므로 환상에서 벗어나는 데서 자유를 누리려고 했다.
세상을 하나님의 최선의 창조물로 믿은 바울은 세상을 경시하는 그들을 비난했다.
영지주의자들은 물질을 사악하게 여겼으므로 그리스도가 육체를 지닌 모습으로 태어난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들이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자 요한은 교인들을 단속했으며(요한 1, 2, 3서) 바울은 그들의 교설에 귀를 기울이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누가 철학과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로새서 2:8-9)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처형당하기 위해 로마로 압송될 때 영지주의자들의 교설에 주의를 요하는 편지를 교인들에게 보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족속이요,
마리아의 아들이며,
실제로 태어나서 먹고 마시다가
본디오 빌라도의 박해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에서
이탈된 말을 할 때 못들은 체 하기 바랍니다.


이그나티우스의 편지에서 영지주의자들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을 부정했음을 볼 수 있다.
십자가에 처형된 것은 예수이지 그리스도가 사망한 것은 아니며 그것은 신적 존재자가 사망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영지주의를 배척하기 위해서 이그나티우스는 감독의 고유한 직권이 신적임을 내세웠다.
그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문제는 교회를 정의하는 문제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감독과 교회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인의 인격적 결합에 비유하면서 감독이 교회의 구심점임을 강조했다.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로 “감독이 출현하는 곳에 사람들이 따르기 마련”이므로 감독은 이단을 막아내는 최선의 무기이며 보루라고 그는 말했다.


분열을 경계하십시오.
분열은 모든 악의 시작입니다.
여러분은 감독 따르기를 그리스도가 아버지를 따른 듯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감독에게 복종하기를 사도들에게 복종하듯이 하며 집사들을 (오늘날 장로들을 말함) 존경하십시오.


이그나티우스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부여한 성스러운 직책을 감독이 물려받은 점을 내세워 감독을 대할 때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하듯 하라고 했다.
감독의 권위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권위로까지 상향 조절한 것이다.
또한 최후의 만찬(the Lord’s Supper)을 기념하는 성찬식(communion)을 “불멸의 약이요, 죽음을 해독시키는 약”이라면서 감독이 베푸는 성찬식의 의의를 강조했는데 이는 감독의 권위를 한층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교회를 지역의 공동체로 한정해서 이해하지 않고 세계에 두루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보편적인 단체로 인식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사용한 가톨릭(catholic)이란 말도 보편적(universal)이라는 뜻이다.


이레네우스(Irenaeus, 130-200) 또한 이그나티우스와 마찬가지로 감독의 직권이 사도들의 직권의 연장임을 강조했다.
178년경 프랑스 남부 리옹의 감독으로 선출된 이레네우스는 『모든 이단에 반박하여 Adversus omnes Haereses』라는 제목으로 영지주의를 배척하는 글을 썼다.
그는 170년경에 『사도직의 계승 Apostolic Succession』을 썼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리스도가 사도를 선택했고 사도는 감독을, 감독은 후계자를 선택하는 방법으로 감독들이 선택되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에게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비밀스러운 지혜가 있다면 그리스도의 지혜는 사도들을 통해서 마땅히 감독들에게 전수되었을 테고 또 후계자들에게도 전수되었을 텐데 감독들이 영지주의자들일리 만무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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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
Church Fathers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 1:8)


예수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면서 위와 같이 말했다.
제자들은 증인이 되라는 분부를 받고 사도로 변신했다.
사도들 중에는 일찍 순교한 사람도 있고 근동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력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교회를 목회할 후계자들을 임명했는데 그들을 교부라고 한다.
사도들의 제자라는 의미에서의 교부시대는 신약성경이 쓰여진 90년부터 140년까지지만 사도와 같은 시대를 살지 않은 교부들도 있어 넓은 의미로는 451년 칼케돈 공의회가 열린 때까지로 확장해서 말한다.


교부들의 신학은 동방 정교회, 루터 교회, 개혁 교회, 로마 가톨릭 교회 등에 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이들 교회들은 교부들의 저술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때로는 비판했다.
17세기의 중요한 신학자 랜슬럿 앤드류즈(Lancelot Andrewes, 1555-1626)는 정통 그리스도교는 구약과 신약성경 두 권과 세 개의 신조, 네 복음서, 그리고 교부들의 그리스도교 역사 위에 기초한다고 했다.


교부(church father)는 ‘사도적 사제 Apostolic Father’라는 뜻으로 사도에 의해서 후계자로 계승된 일단의 저술가들을 일컫는 말이다.
교부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 patristic은 아버지에 해당하는 라틴어 pater에서 유래한 말로 교부들의 시대를 가리킴과 동시에 이 시대에 발전된 사상들을 통칭한다.
그리스어로 사도(apostolos, 영어로는 apostles)는 ‘앞서 보내다 to send forth’라는 뜻이며 보내다라는 뜻의 라틴어는 미테레(mittere)이므로 영어로는 전도자를 ?issionary剌?표기한다.


교부들의 저서는 대부분 서신과 설교문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저술 동기는 우연이었다.
그들의 문서가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입증시켜 주는 원전으로서 신약성경 다음으로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내용이 교리적이지 않으므로 신조들을 그들의 문서를 통해 알아보는 작업은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신학의 발전에는 공헌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믿음의 개념과 당시 교회의 관습을 이해하는 데는 중요한 사료이다.


교부들은 도덕주의(Moralism)를 표방하였다.
구원은 속죄의 측면보다는 영생(eternal life)과 불멸(indestructibility)에 치중되었으며 이와 관련해서 지식이 강조되었는데 예수가 진리에 관한 지식을 제공했다고 믿은 까닭이다.
그들에게 구원은 진리로부터 얻어지는 영생 또는 깨우침(enlightenment)이었다.
그들은 죄를 타락, 육체적 욕망, 실수, 무지 등으로 설명했지만 죄책(guilt)의 개념은 강조하지 못했다.


교부들의 도덕주의 경향은 은혜에 관한 인식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계시자(revealer)인 예수로 인해 인간이 우상숭배와 거짓된 옛 언약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이며, 사랑으로 인간이 의로워질 수 있음을 뜻한다.
은총이 인간으로 하여금 의를 성취하도록 하고 궁극적으로 구원을 얻게 한다는 이러한 도덕주의 경향은 중세에 선행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스도인 신학 Christian Theology』(1996)의 저자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E. McGrath)는 교부시대는 그리스도 신학의 생성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지만 오늘날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를 열거하였다.


1. 교부시대의 몇 가지 논쟁은 우리 시대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논쟁들이 당시에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겠지만 오늘날 독자들이 이런 문제들에 감정이입해서 당시 어째서 그토록 관심사였는지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 같은 관점으로 교부시대를 종교개혁시대와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데 종교개혁시대에 제기된 많은 문제들은 오늘날 교회에서도 지속적인 관심사가 되고 있다.
종교개혁시대의 관심사들에 학생들이 더욱 쉽게 다가가는 것을 본다.


2. 교부시대의 논쟁들 중 많은 부분이 철학적인 문제들이었으므로 독자들이 당시의 철학적 논쟁에 관해 어느 정도 친숙할 때만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일부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사상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데 이런 사상들은 교부시대 지중해 세계에 있어서 상당한 발전과 비판을 겪은 것들이다.
중세 플라톤주의와 신플라톤주의는 매우 다를 뿐만 아니라 플라톤 원래의 사상과도 같지 않다.
많은 사람이 당시 철학에 대해 느끼는 생소함이 그것에 관한 연구의 또 다른 장벽이 되고 있으며,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교부시대의 몇 논쟁에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었는지 충분히 인식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3. 교부시대는 교리적으로 광범위한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 시대는 유동적인 시기로 여러 경계표와 기준들이 (여기에는 니케아 신조를 비롯한 문헌들과 그리스도의 양성론과 같은 교리들이 포함된다) 점진적으로 출현한다.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상대적으로 안정되었던 다른 시대에 친숙한 학생들에게 교부시대의 이런 면모는 종종 당혹스러운 것이다.


4. 교부시대는 정치적이고 언어적인 이유 등으로 인해 동방 그리스어권 교회와 서방 라틴어권 교회 사이의 분리가 나타남을 목도하게 된다.
많은 신학자들은 동,서방 신학자들 사이의 신학적인 기질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를 구별하는데 동방 신학자들에게는 종종 철학적인 경향이 있고 신학적 사색에 빠진 데 비해 서방 신학자들은 신학에 철학을 유입하는 일에 적대적이었으며, 신학을 성경 안에 나타난 교리들에 대한 탐구로 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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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트
Clement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제롬(Jerome, 347-419/420)이 교부라고 부른 로마의 감독 클레멘트(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는 동명이인이다)는 베드로의 제자로 알려졌다.
교회사의 아버지 유세비우스(Eusebius, 260-340)는 클레멘트의 서신을 교회에서 공식적인 가르침으로 사용했다고 저서 『교회사 The Ecclesiastical History』에 기록하였다.
클레멘트는 96년 또는 97년에 고린도(Corinth) 교회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에는 일반적인 도덕적 교훈과 교리적 가르침이 적혀 있으며 또한 장로들과 일부 반항적 교인들 사이에 벌어진 분쟁에 관한 특별한 훈계도 있다.
분쟁은 사도가 세운 장로를 해임하려고 한 데서 발생했다.
클레멘트는 교회에 질서가 있어야 함을 역설하면서 사도가 직접 임명한 감독과 장로를 해임할 수 있는 권리가 평신도들에게는 없다고 했다.


교부들은 예수의 신성을 기정사실화했다.
클레멘트는 예수를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낸 분으로 묘사했으며, 저서 『설교 Homily』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또 “주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며, 본래는 영이었지만 성육신하셔서 우리를 부르셨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리스도, 성령이란 말을 언급했는데 삼위의 신에 대한 개념이 그에게 있었음을 본다.
그는 교회를 성도들의 모임, 그리스도의 양떼, 하나님의 소유로 정의했는데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고 성도들은 그의 지체라고 한 바울의 말을 상기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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