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동쪽은 종교 박람회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1세기 지중해 건너편 동쪽은 겉으로는 번영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한 데 뒤섞인 민족들에 의해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있었다.
로마 제국이 이 지역을 통치하기 시작한 기원전 2세기부터 도시들이 변모했는데 국제적 교역과 문화의 도시로 탈바꿈하여 사람들의 외면적인 생활에는 활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물리적 변화일 뿐 정신적으로는 혼란스러웠다.
봇물이 터지듯 외래문화가 들이닥치자 자신이 속한 도시 문화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은 문화의 범람에 방황해야 했던 것이다.
이 지역에는 많은 학파가 생겼고, 신화들이 난무했으며, 동양에서 흘러 온 신비주의 사상도 활개를 쳤다.
유대교는 일찍이 기도의 집(house of prayer)을 만들어 이방인을 개종시켰는데 기도의 집은 나중에 회당(synagogue)으로 불려졌다.
시나고그(synagogue)는 그리스어로 모인다는 뜻이다.
회당은 유대교의 교리를 교육하고, 의식을 행하는 만남의 장소였다.
여자들도 지위가 향상되어 회당의 멤버가 되거나 후원자가 되었으며, 작은 그룹의 지도자가 되기도 했다.
지중해 동쪽은 종교 박람회와도 같았는데 도시국가의 수호신들이 득실거렸다.
특히 바벨론, 페르시아, 이집트에서 유입된 신비주의 성격의 종교들이 관심을 끌었다.
유일신을 신봉한 유대교는 이 지역 사람들에게 신과 인간의 관계를 명료하게 설정해 주지 못했다.
게다가 유대교는 천사들을 인정했고 하늘나라의 계급사회를 조성했으며 신이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해서 율법을 주었다고 함으로써 민족의 종교로서 한계를 드러냈다.
왜 신이 우주와 인간을 창조했으며 무슨 목적으로 다스리는지에 관한 설명은 분명하지 않았다.
유대교의 신은 은혜를 결핍했고 율법을 지키는 자만 구원했으며 신과 인간의 관계는 엄격한 법적 관계가 되어 갔다.
이 같은 법적 관계를 부정하고 은혜에 의한 구원의 관계를 주장한 사람이 바울이다.
바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고 했다.
구원이란 예수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는 것이며 인류의 조상에 의해 저주받은 죽음으로부터 영생하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 대신 그리스도란 말을 사용했는데 예수와 어울린 적이 없는 그에게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라는 표현으로 충분했다.
그리스도가 성육신되기 전 하나님과 더불어 존재했으며, 지상에서는 우리와 같은 인생을 살았고, 부활한 후에는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 바울 신학의 요지이다.
만인이 하나님 앞에 평등하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로마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자 바울은 고난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을 받게 된다고 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왕권들이나) 주관들이나 (주권들이나) 정사들이나 (여러 천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로새서 1:15-1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본질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립보서 2:6-9)
예수가 처형당한 후 그를 숭배하는 운동이 이스라엘 안과 밖에서 활발하게 벌어졌다.
베드로(Peter)와 예수의 동생 야고보(James)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 예루살렘 교회(Council of Jerusalem)는 국내외 선교 본부였다.
예수의 제자들로 구성된 점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국외 그리스도인으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았지만 신학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예루살렘 교회는 따로 교회를 건립하지 않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유일한 성지로 여겼으며 형제단처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모임을 가졌을 뿐이다.
그들은 모여서 구약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불렀는데 제사장과 바리새인도 모임에 참석했었다.
사도들의 권리와 의무, 활동에 관한 기록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다.
또한 바울은 사도들과 어울리기를 꺼려했는데 이는 신학에 대한 견해차이 때문이었다.
바울은 49년에 안디옥으로부터 바나바(Barnabas)와 교인을 대동하고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는데 개종한지 14년만이었다.
방문 목적은 자신의 교회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간섭을 따지기 위해서였다.
예루살렘 교회가 개종한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규례 문제에 관한 논쟁이 격렬해지자 베드로와 야고보가 중재에 나서서 바울의 편에 섰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확증을 문서로 써서 바울에게 주었다.
바울은 규범의 설정과 선행의 목록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우월감을 줄 수 없으며, 할례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음식규례와 여타의 규례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함으로써 이방인으로 하여금 쉽게 개종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교의 문을 활짝 열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라디아서 3:2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