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예수를 새 인간의 머리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바울은 예수를 새 인간의 머리가 되는 제2의 아담이라고 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마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2)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이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린도전서 15:45-49)


바울은 예수를 가리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난 자, 많은 형제 가운데 맏아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하나님과 동등한 자라고 했다.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골로새서 1:5)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29)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로새서 1:15)


유대인이 예수의 죽음이 메시아가 됨을 부정하는 반증이 아니냐는 논란을 제기했기 때문에 바울의 신학적 과제는 예수의 수치스러운 죽음과 약속된 메시야의 영광스러운 사명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 데 있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린도전서 1:23-25)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린도전서 2:2)


바울은 예수의 죽음을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신” 대속적인 상징으로 묘사했다(갈라디아서 3:13).
속죄는 예수가 죄의 대가를 치룰 수 없는 인류를 대신해서 죄 없는 구주로 자진해서 고난을 받아들이고 그 결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해가 있도록 했다는 논리에서 결론지어졌다.
바울은 속죄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의 개념에 일치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후서 5:21)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0)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갈라디아서 1:4)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로마서 4:25)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 (로마서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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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인정받는 것이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인정받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주요 관심사이다.
구약성경은 율법이 사람을 선하게 만들고 의인이 되게 한다고 가르치는데 의란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획득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바울은 율법은 단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할 뿐 결코 죄를 제거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사람이 스스로 죄를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로 말미암아 불의한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이것이 은총 (또는 은혜)인데 바울은 믿음을 통해서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라디아서 3:3)


하나님은 사람의 믿음 그 자체만을 가치 있게 인정하는 것이 아니며 믿음은 단지 인정의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은혜를 향해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로마서 4:16)


바울은 그리스도를 떠난 믿음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고 했다.
이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의로워질 수 있다는 뜻이며 의를 인정받는 것은 곧 속죄의 결과라는 뜻이다.
이런 이유에 근거해서 바울은 예수의 죽음을 화목제라고 했다.
그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화평을 누리자”(로마서 5:1)라고 했다.


그는 하늘나라보다는 교회에 관해 더욱 많은 말을 했는데 당시의 상황이 다양한 종류의 교인들을 체계적으로 목회하는 일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그는 하늘나라를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으며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지역적 공동체라고 했다(고린도전서 1:2, 12:28, 15:9).
고린도 교회가 특히 교파 간의 분쟁으로 조직에 유동성을 보였는데 바울은 은사(Charismata)에 관해 말함으로써 그 분쟁을 막으려고 했다.
이후에 쓴 편지에서 교회의 조직이 나아졌음은 집사, 장로, 감독 등 공식적인 직분들이 나타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특히 세 편의 목회서신에서는 고도로 발전된 조직이 잘 묘사되어 있다.


초대교회에는 세례와 관련된 어떤 일정한 전승과 가르침이 있었다.
마태복음(28:19-20)에서는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가 베풀어졌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바울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고린도전서 6:1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 (고린도후서 13:13)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15:16)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 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로마서 15:30)


그리스도 신학을 대부분 창조한 사람은 바울이다.
그의 신학은 이천 년 동안 절대적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도교를 바울의 종교라 하고 신학을 바울의 각주라고 하는 것에서 그의 신학이 절대적임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교회 밖에는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다소의 유대인”이라고 한 것을 두고 니체(Nietzsche)는 바울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영원한 유대인”이라고 비꼬며 다음과 같은 말로 신랄하게 비판했다.


예수가 전한 기쁜 소식에 아주 상반되는 점을 바울이 구체화했다.
증오의 영상 안에서, 연민도 없는 증오의 논리 안에서 바울은 증오의 천재였다.
사악한 복음주의자들이 그의 증오에 헌신하지 않았느냐!
그가 먼저 헌신했고 다음으로 구주가, 구주를 그의 십자가에 못 박았다.…
신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었다.
믿음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다.
죽은 후에 부활했다.
이 모든 것은 병적인 괴짜 바울이 조작한 참 그리스도교의 오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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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에 대한 공격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공격은 바울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났다.
나치 그리고 반그리스도교주의자들이 “악마 랍비 바울”이란 말까지 사용할 정도였다.


하지만 교회 내에서의 바울에 대한 평가는 대단하여 소멸되고 말 예수의 가르침을 보존한 위대한 사도라 일컬어진다.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버림받은 예수를 신학의 대상이 되는 분으로까지 숭배한 바울은 예수를 가장 잘 이해한 사람으로 꼽히며 첫 그리스도인이라 불린다.
예수의 제자들조차 자신들의 사상을 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바울만이 유일하게 종파주의를 버리고 인류 모두가 동등한 자격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소망의 신학을 내어 놓았다.
교부들은 그의 신학에 전적으로 동조했으며 네 복음서는 정경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지언정 바울의 서신만은 정경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교부들도 있었다.


신학 이야기는 교회사에 관한 이야기이고 또는 교리의 생성과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교리(dogma)는 그리스어 도케인(dokein)에서 유래한 말인데 ‘생각하거나, 상상하거나 또는 의견을 가지는 것’이란 뜻이다.
각 철학 학파의 독특한 사고를 그리스인은 교리라고 했다.
각 학파는 상대방 학파의 이론에 반박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의 타당성을 주장하였다.
교리는 상대방 학파의 신학을 반박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사도신경 Apostles’ Creed』은 긍정적인 문체로 쓰여졌지만 이면에는 상대방 신학자들의 이론에 대한 반박이 내포되어 있다.
사도신경의 첫 구절 “나는 하늘과 땅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며”라는 말에는 신에 대한 일원론의 주장 말고도 이원론을 배척하려는 의도가 십분 나타난다.
후세에 만들어진 교리일수록 상대방 신학자들의 이론에 대한 반박의 성격이 강하다.
폴 틸리히는 교리를 ‘보호적 교리(protective doctrine)’라고 불렀는데 이는 모든 교리가 교황과 종교회의를 통해서 만들어졌으며 그것들은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마르틴 루터의 견해를 따른 것이다.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자유를 제어하는 장치이다.
교리는 교인에게 교회와 교황 및 감독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교리는 교회의 법으로 교세를 확장하는 수단이다.
교리는 중세에 공법과도 같은 효력을 발휘했는데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은 교회를 부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정부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해서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교리는 과거와 달리 교인에게 물리적으로 혹독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교인의 자격을 규정하고 있다.
가톨릭이 교리에 대해서 엄격한 것과 같이 개신교 또한 교회법을 집행하고 있다.
입교를 원하는 사람에게 교리문답을 통해 교리를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입교시키는 것은 교리가 법으로 집행되는 예이다.


교리 또는 교회의 법은 교회의 본질에 상반되는 내용들이다.
예수의 몸인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 성령이라면 교부들에 의해서 창조된 교리들은 그리스도교 본질로부터 이탈한 내용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교리가 사라질 때 비로소 신앙의 자유를 온전히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신학 이야기는 필자의 저서 『예수 이야기』와 『성경 이야기』에 이어지는 후속편이다.
나는 이 세 권의 저술을 통해서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이 신약성경 저자들과 교부들에 의해서 어떻게 해석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신학으로 정립되었는지를 나타내고자 했다.
이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좀더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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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역사적 배경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기원전 336년, 200년 전부터 중앙아시아에서 이집트에 걸쳐 오리엔트 세계를 지배해 온 페르시아 제국(Persian Empire)에서 다리우스 3세(Darius III)의 즉위식이 열렸고, 같은 해 그리스 북부의 작은 왕국 마케도니아(Maccedonia)에서는 젊은 알렉산드로스(Alexander)가 아버지 필리포스 2세(Phillip II)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필리포스 2세는 아테네 테베 동맹군을 격파한 뒤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지중해 연안에 대한 실질적 지배를 확립했지만 암살당하고 말았다.
알렉산드로스는 2년 뒤 기원전 334년에 역사적 동방원정을 시작했는데 목표는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듬해 예루살렘을 정복한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2년 시리아로부터 지중해를 따라 내려와 7개월간의 포위 끝에 두로 요새를 함락시키고 이집트까지 진군했다.
선지자들 다니엘과 스가랴는 이 사건을 예언했다.


북방 왕은 돌아가서 다시 대군을 전보다 더 많이 준비하였다가
몇 때 곧 몇 해 후에 대군과 많은 물건을 거느리고 오리라 (다니엘 11:13)


그 접경된 하맛에도 임하겠고 두로와 시돈은 넓은 지혜가 있으니
그들에게도 임하리라 (스가랴 9:2)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Gaugamela) 격전지에서 용맹스럽기로 이름난 페르시아 군대를 섬멸하는 데 성공했다.
그해 가을, 페르시아의 왕궁들은 화염 속에 사라졌으며 25살의 알렉산드로스는 ‘아시아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다리우스 3세의 시신을 페르시아 국장에 따라 장엄하게 장사지내도록 허락함으로써 승리자의 아량을 베풀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오리엔트 세계의 새 지배자가 되었고 점령한 도시들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로 명명했는데 이 이름이 붙은 도시는 무려 70여 곳에 달했다.


이집트와 시리아를 연결해 주는 관문에 위치한 이스라엘의 지배자 역시 다리우스 3세에서 알렉산드로스로 바뀌었다.
신정국가 이스라엘은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겪지 않았지만 유대교는 상당히 그리스화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야심은 ‘아시아의 왕’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힌두쿠시를 거쳐 오늘날의 사마르칸트로 진군했으며, 기원전 326년 봄 인더스 강을 건너 탁실라(Taxila)를 점령한 후 동쪽으로는 카불(Kabul) 협곡을 지나 인도와 오늘날의 서파키스탄으로 나아갔다.
10년이 넘은 이 대원정은 기원전 323년 여름 알렉산드로스가 열병으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끝났다.


32살의 알렉산드로스가 후사도 없이 사망하자 심복 장군들은 제국을 차지하려고 후계자 전쟁을 벌였으며 그 결과 헬레니즘 3왕국 즉 시리아, 마케도니아, 이집트로 나뉘어졌다.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 군사 상업상 요충지에 위치한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 왕조의 통치를 받았다.
기원전 198년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3세(Antiocus III)가 요단강 근처 파니온(Paneion, 가이사랴 빌립보를 말한다)에서 이집트의 군대를 섬멸하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하면서부터 이스라엘은 시리아 안디옥(Antioch)에 수도를 정한 셀레우코스(Seleukos) 왕조의 통치영역에 들어갔다.


이스라엘은 페르시아, 알렉산드로스 제국, 이집트와 시리아 등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종교의 자율성을 보장받았다.
이스라엘 백성은 통치자에게 세금을 바치긴 했지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성전중심의 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신에 의한, 신을 위한 신정국가 체제였다.
헌법은 모세5경,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있는 사제법을 따랐다.
예루살렘 성전의 관리를 책임진 대제사장은 신정국가의 우두머리이기도 했다.


기원전 190년은 오리엔트에 새로운 지배자의 등장을 예고하는 해였다.
로마 군대가 마그네시아(Magnesia) 전투에서 시리아 군대를 섬멸한 사건은 역사의 무대에서 헬레니즘 3왕국, 시리아, 마케도니아, 이집트의 퇴장을 알리는 신호였다.
로마의 등장을 다니엘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제 내가 참된 것을 네게 보이리라
보라 바사에서 또 세 왕이 일어날 것이요
그 후의 네째는 그들보다 심히 부요할 것이며
그가 그 부요함으로 강하여진 후에는 모든 사람을 격동시켜 헬라국을 칠 것이며 (다니엘 11:2)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는 소아시아를 손에 넣었다.
잇따라 로마는 마케도니아와 전쟁을 시작해 기원전 168년 여름 피드나 전투를 끝으로 마케도니아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로마는 제국 건설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64년 시리아 정복에 전력하던 로마의 폼페이우스(Pompeius) 장군이 이스라엘 왕국의 내분 수습을 구실로 이듬해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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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기존의 전통과 신앙에 불을 지른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기원전 44년 카이사르(Caesar)가 살해되자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투스가 통치하는 삼두정치가 수립되었다.
헤롯(Herod)은 정치적으로 위기에 빠지자 로마로 도망쳐 겨우 목숨을 유지했다.
그는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의 왕으로 승인받은 후 기원전 37년 10월경 로마 군대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을 석 달 동안의 포위 끝에 함락시킴으로써 왕좌를 되찾았다.
이로써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스모니아(Hasmonaea) 왕조는 사라지고 33년에 걸친 헤롯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37년부터 기원전 4년까지 이스라엘 왕국을 통치한 헤롯을 세례자 요한을 죽인 아들 안디바 헤롯과 구분하기 위해서 헤롯대왕(Herod the Great)이라고 부른다.
헤롯대왕은 재임 첫 몇 년 동안 클레오파트라 7세(Cleopatra VII)를 견제했는데 그녀가 이스라엘에 탐욕스런 눈길을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실제로 이스라엘의 일부 지역을 손아귀에 넣었으며 여리고와 그 부근을 통치하고 있는 상태였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고조되던 긴장은 기원전 31년 악티움(Actium) 전투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 결과 옥타비아누스에 패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도망쳐 자살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며 옥타비아누스는 명실상부한 로마 제국의 주인이 되었다.
누가복음서에 아우구스투스란 이름이 나오는데 그가 바로 옥타비아누스이다.
그는 기원전 27년 1월에 초대 로마 황제 자리에 오르고 자신을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칭했다. 로마의 속국들은 그의 심복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로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다.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의 모임인 중의회 제도를 인정하여 종교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했다.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에 근거한 이미지 우상을 거부하는 이스라엘의 법을 존중하여 황제의 초상이 그려진 로마 군기는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헤롯대왕은 위대한 건축가이기도 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크고 화려하게 재건하여 백성의 환심을 사려고 했으며 기원전 19년 초에는 천 명의 레위인들을 건축가로 훈련시켜 성지의 바깥뜰을 확장하고 가로수를 심어 아름답게 꾸몄다.
재임 첫 10년 동안 성전 주변에 화려한 대문을 만들고 건축물들을 세워 성전의 장엄함을 전세계에 자랑했다.
성전 미화작업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로마에 의해 파괴되기 7년 전인 63년까지 지속되었다.


헤롯대왕은 질병에 시달리다가 기원전 4년 3월에 사망했다.
그는 유서에 안디바, 아켈라오, 빌립 세 아들로 하여금 유대 왕국을 통치하도록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헤롯의 세 아들에게 분봉왕(client king)이란 칭호를 쓰도록 했다.
안디바와 빌립은 각기 42년과 37년간 재임했다.
그러나 아켈라오의 통치는 너무 강압적이었음이 증명되어 재임 9년 만에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면직당하고 추방되었다.
아켈라오가 6년에 파면당했을 때 시리아의 사절은 술피시우스 구레뇨(P. Sulpicius Quirinius)였다.
구레뇨는 아켈라오의 재산을 정리하고 로마 제국에 국고로 납부해야 할 조공 액수를 결정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했다.
이 무렵 갈릴리 사람 유다가 예루살렘에서 폭동을 일으켰으며, 폭동이 진압되고 인구조사가 끝나자 코포니우스(Coponius)가 이스라엘의 첫 총독으로 취임했다.


9년경 코포니우스의 후임으로 마르쿠스 암비비우스(Marcus Ambivius)가 총독으로 취임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14년 8월 9일 사망하기까지 영지의 통치자들을 자주 바꾸는 정책을 썼다.
그러나 후계자 티베리우스 황제는 사절과 총독들을 관직에 오래 머물게 하는 정책을 썼으므로 15년경 유대의 총독에 임명된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Gratus)는 티베리우스에 의해 11년간 재임했다.
그 기간 동안 그라투스는 대제사장을 네 차례나 바꾸었는데 부를 축적하기 위한 그만의 독특한 방법이었다.
그라투스가 임명한 마지막 대제사장은 안나스(Annas)의 사위인 요셉 가야바(Joseph Caiaphas)였다.
가야바는 예수를 체포하고 총독 빌라도로 하여금 정치범으로 사형에 처하게 한 장본인이다.
26년에는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가 그라투스의 뒤를 이어 총독에 부임했다.


예수의 생애는 이상과 같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시작되고 마쳤다.
고대 제국주의가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역사의 황혼녘에 예수의 생애가 있었다.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으로 어둠이 막 깔리려고 할 즈음 예수가 계몽의 정화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사회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예수의 활동은 별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미미한 움직임에 지나지 않았지만 유대교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신학을 가진 신흥종교처럼 보였다.
그리고 예수는 기존의 전통과 신앙에 불을 지른 방화범과도 같았으므로 그를 처단하지 않는다면 유대교의 곳간에 쌓아둔 오래된 신학이 모두 타서 재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가야바와 안나스를 중심으로 모인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는 길을 선택했다.
예수는 역사의 분기에서 그렇게 사라졌지만 그의 죽음은 역사의 새 날을 알리는 트럼펫 소리가 되어 땅 끝까지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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