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기존의 전통과 신앙에 불을 지른

김광우의 저서 <신학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기원전 44년 카이사르(Caesar)가 살해되자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투스가 통치하는 삼두정치가 수립되었다.
헤롯(Herod)은 정치적으로 위기에 빠지자 로마로 도망쳐 겨우 목숨을 유지했다.
그는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의 왕으로 승인받은 후 기원전 37년 10월경 로마 군대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을 석 달 동안의 포위 끝에 함락시킴으로써 왕좌를 되찾았다.
이로써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스모니아(Hasmonaea) 왕조는 사라지고 33년에 걸친 헤롯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37년부터 기원전 4년까지 이스라엘 왕국을 통치한 헤롯을 세례자 요한을 죽인 아들 안디바 헤롯과 구분하기 위해서 헤롯대왕(Herod the Great)이라고 부른다.
헤롯대왕은 재임 첫 몇 년 동안 클레오파트라 7세(Cleopatra VII)를 견제했는데 그녀가 이스라엘에 탐욕스런 눈길을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실제로 이스라엘의 일부 지역을 손아귀에 넣었으며 여리고와 그 부근을 통치하고 있는 상태였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고조되던 긴장은 기원전 31년 악티움(Actium) 전투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 결과 옥타비아누스에 패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도망쳐 자살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며 옥타비아누스는 명실상부한 로마 제국의 주인이 되었다.
누가복음서에 아우구스투스란 이름이 나오는데 그가 바로 옥타비아누스이다.
그는 기원전 27년 1월에 초대 로마 황제 자리에 오르고 자신을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칭했다. 로마의 속국들은 그의 심복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로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다.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의 모임인 중의회 제도를 인정하여 종교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했다.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에 근거한 이미지 우상을 거부하는 이스라엘의 법을 존중하여 황제의 초상이 그려진 로마 군기는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헤롯대왕은 위대한 건축가이기도 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크고 화려하게 재건하여 백성의 환심을 사려고 했으며 기원전 19년 초에는 천 명의 레위인들을 건축가로 훈련시켜 성지의 바깥뜰을 확장하고 가로수를 심어 아름답게 꾸몄다.
재임 첫 10년 동안 성전 주변에 화려한 대문을 만들고 건축물들을 세워 성전의 장엄함을 전세계에 자랑했다.
성전 미화작업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로마에 의해 파괴되기 7년 전인 63년까지 지속되었다.


헤롯대왕은 질병에 시달리다가 기원전 4년 3월에 사망했다.
그는 유서에 안디바, 아켈라오, 빌립 세 아들로 하여금 유대 왕국을 통치하도록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헤롯의 세 아들에게 분봉왕(client king)이란 칭호를 쓰도록 했다.
안디바와 빌립은 각기 42년과 37년간 재임했다.
그러나 아켈라오의 통치는 너무 강압적이었음이 증명되어 재임 9년 만에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면직당하고 추방되었다.
아켈라오가 6년에 파면당했을 때 시리아의 사절은 술피시우스 구레뇨(P. Sulpicius Quirinius)였다.
구레뇨는 아켈라오의 재산을 정리하고 로마 제국에 국고로 납부해야 할 조공 액수를 결정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했다.
이 무렵 갈릴리 사람 유다가 예루살렘에서 폭동을 일으켰으며, 폭동이 진압되고 인구조사가 끝나자 코포니우스(Coponius)가 이스라엘의 첫 총독으로 취임했다.


9년경 코포니우스의 후임으로 마르쿠스 암비비우스(Marcus Ambivius)가 총독으로 취임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14년 8월 9일 사망하기까지 영지의 통치자들을 자주 바꾸는 정책을 썼다.
그러나 후계자 티베리우스 황제는 사절과 총독들을 관직에 오래 머물게 하는 정책을 썼으므로 15년경 유대의 총독에 임명된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Gratus)는 티베리우스에 의해 11년간 재임했다.
그 기간 동안 그라투스는 대제사장을 네 차례나 바꾸었는데 부를 축적하기 위한 그만의 독특한 방법이었다.
그라투스가 임명한 마지막 대제사장은 안나스(Annas)의 사위인 요셉 가야바(Joseph Caiaphas)였다.
가야바는 예수를 체포하고 총독 빌라도로 하여금 정치범으로 사형에 처하게 한 장본인이다.
26년에는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가 그라투스의 뒤를 이어 총독에 부임했다.


예수의 생애는 이상과 같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시작되고 마쳤다.
고대 제국주의가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역사의 황혼녘에 예수의 생애가 있었다.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으로 어둠이 막 깔리려고 할 즈음 예수가 계몽의 정화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사회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예수의 활동은 별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미미한 움직임에 지나지 않았지만 유대교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신학을 가진 신흥종교처럼 보였다.
그리고 예수는 기존의 전통과 신앙에 불을 지른 방화범과도 같았으므로 그를 처단하지 않는다면 유대교의 곳간에 쌓아둔 오래된 신학이 모두 타서 재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가야바와 안나스를 중심으로 모인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는 길을 선택했다.
예수는 역사의 분기에서 그렇게 사라졌지만 그의 죽음은 역사의 새 날을 알리는 트럼펫 소리가 되어 땅 끝까지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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