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새 입법자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므로 사람들에게 말할 때 “야훼께서 말씀하시기를” 또는 “주께서 말씀하시기를”이란 말로 시작함으로써 자신들은 단지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하게 선포하는 것 그 이상의 일을 또 했는데 새로운 계명을 만든 것이다.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집행하는 사람들이라면 예수는 계명을 만드는 입법자인 셈이다.


예수가 새로운 법을 제정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고유한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는 다른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하늘나라 질서를 ‘세우려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 받았다는 자각이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하늘나라 통치를 위임받아 지상에서 직접 질서를 세우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은 예수로부터 직접 하늘나라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마땅히 지켜야 할 계명을 들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하는 어떤 비방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인다.” 【마가복음서 3:28-29】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가복음서 8:12】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싶어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을 듣고 싶어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다.” 【마태복음서 13:17】


‘진정으로’는 헤브라이어로 ‘아멘(amen)’이다.
유대 사람들은 기도를 마칠 때 아멘이라는 말로 끝을 맺었으며, 성전이나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봉독될 때 아멘이라고 응답했고, 회중을 대표한 사람이 기도를 마칠 때에도 아멘이라고 응답하여 대표자의 기도에 동의한다는 것을 표시했다.
그러한 전통은 오늘날 가톨릭과 개신교에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말을 시작할 때 ‘아멘’이라고 함으로써 자신의 말이 곧 사람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되는 형식을 취했다.
예언자들 가운데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러한 독특한 예수의 말투는 그가 단지 하나님의 ‘입’에 불과한 예언자들과 다른 새 입법자임을 나타내주었다.


예수를 새 입법자로서 이해할 수 있는 신학적 근거를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과 새 언약을 세우겠다.
나 주의 말이다.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은 나의 언약을 깨뜨려버렸다.
나 주의 말이다.
그러나 그 시절이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그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를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 31:31-34】


예수가 직접 사람들의 가슴 속에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판에 새겨 기록한 새 율법은 지금 당장 실효를 거두는 율법이다.
그것은 광야에서 제정된 오래된 모세의 율법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사람들의 언행을 통제하고 그래서 짐스럽게 여겨지는 율법을 세우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명과 언약 안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사랑의 복음을 전파하고자 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복음서 11:28-30】


휴식은 구원이다. 예수의 새 계명과 언약을 휴식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구원은 상실된다.
초대교회 역시 이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 주께로부터 편히 쉴 때가 올 것이며, 주께서는 여러분을 위해서 미리 정하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보내실 것입니다. 【사도행전 3:20】


예수를 새 입법자로 이해하는 것은 더불어 그에게 구원의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옛 율법과 언약의 짐을 벗고 새로운 계명과 언약을 따라 평안을 맛봄으로써 구원을 받게 된다.
예수는 종교란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사람들이 종교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역설하며, 새 입법자로서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희망과 휴식의 구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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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하나님과 동등한 자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예수와 다른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던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 갇혔을 때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 당신이 자신이 기다리던 메시아냐고 물은 적이 있다.
예수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들으니,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고 하였다(마태복음서 11:4-5).
그는 하늘나라의 통치와 질서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하여 요한에게 자신이 메시아라고 전하도록 한 것이다.
새로운 계명과 언약을 제정했을 뿐 아니라 몸소 하늘나라의 통치와 질서를 지상에 세우려 했던 예수를 우리는 하나님과 동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동격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자신의 사역이 곧 하늘나라라고 믿었고 하늘나라가 지상에서 이루어지도록 몸소 행동했다.
그는 예언자들처럼 계몽적 차원에서 사람들을 깨우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한 입장에서 새로운 계명과 언약을 주었고, 병자들을 고쳐주었으며 죽은 사람을 부활시켰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다가가셔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그 여자는 그들(예수와 제자들)의 시중을 들었다. 【마가복음서 1:31】

“아들아,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마가복음서 2:5】

“누구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는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사람을 속일 것이다.” 【마가복음서 13:6】

예수께서 그를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하셨다.
그러자 귀신이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다가 쓰러뜨려놓고 그에게서 떠나갔는데, 그에게 상처는 입히지 않았다.” 【누가복음서 4:35】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자기 목에 연자멧돌을 달고 바다 깊숙이 잠기는 편이 낫다.” 【마태복음서 18:6】


요한은 복음서 첫 장에서 예수를 가리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복음서 1:14)고 적었다.
요한은 예수의 생애를 신성의 능력을 가진 말씀이 화신이 된(incarnated)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했으며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할 뿐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라고 주장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니, 그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의 안에서 생겨난 것은 생명이었으니, 그 생명은 모든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요한복음서 1:1-5】


요한복음서는 공관복음서와 달리 다분히 신학적이다.
요한은 그리스어로 복음서를 쓰면서 말씀을 ‘로고스(logos)’로 번역했다.
우주의 실체를 뜻하는 로고스는 기원전 5-6세기 그리스 현인들에게 물, 불, 공기, 티끌을 의미했고, 플라톤에게는 영원(aio죚n)에 해당했다.
로고스는 신학적으로는 신성(神性)을 뜻하며 노자(老子)의 도(道), 공자(孔子)의 하늘〔天〕, 힌두교의 브라만(brahman)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요한은 신성이 예수라는 인격체로 나타났으므로 또 다른 인격체인 하나님과 예수는 동등하다고 주장했다.


철학자이자 신학자 터툴리안(Tertullian, 155-220)은 이렇듯 요한복음서의 사상에 근거하여 처음으로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 이론을 주장했다.
삼위일체란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 아들, 성령, 이 세 인격체가 하나의 실체(una substantia)란 뜻이다.
삼위일체론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으며, 이 이론을 두고 이단 시비가 일어나 삼위일체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은 교단에서 제명되거나 체형을 당했다.
삼위일체에 대한 최선의 이해방법은 일인삼역이다.
신성이 인류역사에 세 사람의 연기자로 나타났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역할을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한 바 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부인할 것이다.” 【마태복음서 10:32-33】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예수는 과거와 현재, 미래에 속한다는 교리를 내세우면서 그를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믿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한결같으신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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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 하나님이자 인간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아버지가 아들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들이 아버지가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예수를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 믿으면서도 예수에게는 신성 외에도 인성(人性)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해석을 이중본성론(二重本性論)이라고 한다.


카톨릭은 삼위일체론을 교리로 삼았으며 종교개혁 후의 개신교도 이를 교리로 삼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중본성론을 믿었다.
종교개혁의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에서 이중본성론이 종종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해석이 대중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난해한 삼위일체론에 비해 이중본성론은 사람들에게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


381년 니케아 종교회의는 많은 논란끝에 신경(信經)을 공포했는데 예루살렘 교회가 세례를 베풀 때 사용하던 신경을 보완한 것이다.
니케아 신경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과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오직 한 분이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우리는 또한 오직 한 분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께서 낳으신 유일한 분이시며, 태초의 빛 중의 빛이시며, 참되신 신 중의 참되신 신이신 아버지로부터 태어나셨습니다.


예수의 다음 말은 이중본성론을 설명하기에 적절하다.
“심판하시는 분은 따로 계신다”고 한 말에서 그에게 신성과 인성이 같이 깃들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인성을 보지 말고 신성을 보라고 강조했다.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가르침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인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를 알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만,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진실하며, 그에게는 불의가 없다.” 【요한복음서 7:16-18】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서 그것을 지키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다.
나를 배척하고 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은 따로 계신다.” 【요한복음서 12:47-48】


그에게서 신성이 가려지고 인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적이 몇 차례 있었다.
그가 체포되기 전 겟세마네에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와 십자가에 매달려 목숨이 끊어지기 전 하늘을 향해서 외친 말이 그것이다.


죽음의 세례를 받기로 결단을 내린 예수는 제자들과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가진 후 제자들을 데리고 올리브 산 근처 겟세마네로 가서 기도를 드렸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그는 세 차례에 걸쳐 기도를 올렸으며 세 번째에 이르러서야 신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십시오.”
(그때에 천사가 하늘로부터 그에게 나타나서, 힘을 북돋우어드렸다. 예수께서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서 땅에 떨어졌다.) 【누가복음서 22:42-44】


예수는 오전 아홉 시에 십자가에 못 박혀 오후 세 시에 사망하기까지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숨을 거두기 전 하나님을 향한 절규는 그의 인성이 내뱉은 탄식이었다.


세 시쯤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시기를 “엘리 엘리 레마 사박다니?” 하셨다.
그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 【마태복음서 27:46】


예수가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원망했다는 해석을 가톨릭도 개신교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한 해석은 삼위일체론을 주장하는 기독교 교리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이중본성론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마태의 기록을 달리 해석하여 예수가 최후에 한 말은 시편을 암송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중본성론은 때에 따라 삼위일체론과 섞이기도 하지만 두 이론의 근거는 각기 상반된 믿음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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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인자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인자(Son of Man)란 사람의 아들이란 뜻이지만 모든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여인에게서 난 사람 가운데 최고를 말한다.
오직 한 분을 의미하기 때문에 영어에선 대문자를 사용한다.
어느 날 예수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가복음서 8:27, 누가복음서 9:18)고 물은 적이 있다.
같은 에피소드를 마태는 예수가 “인자를 누구라고 하더냐?”(마태복음서 16:13)라고 물었다고 기록했다.
예수는 자신을 가리켜 메시아라고 말하기를 꺼린 대신 인자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묵시문학에서 인자는 메시아에 대한 또 다른 명칭이다.


예언자 다니엘이 인자라는 말을 사용한 바 있다.
자신이 본 환상을 묵시적으로 기록한 다니엘서는 묵시문학의 범주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묵시문학으로 이해하지 않더라도 다니엘서의 상징적인 언어와 은유는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를 던진다.
예수가 자신을 지칭한 인자에는 예언자 다니엘이 말한 인자에 대한 정의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다.


“내가 밤에 이러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에
인자 같은 이가 오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로 나아가
그 앞에 섰다.
옛적부터 계신 분이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셔서
민족과 언어가 다른 뭇 백성이
그를 경배하게 하셨다.”
【다니엘서 7:13-14】


예언자 다니엘은 인자가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 나아갔다고 묵시적으로 표현했는데 이 예언자의 의도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요한은 메시아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적었는데 이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히브리서에는 예수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한결같으신 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이 모든 의문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간 개념을 알면 이해가 가능해진다.
그들의 시간 개념에서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헤브라이어의 고어 아람어는 원시 언어라서 모음이 없을 뿐 아니라 동사에 과거와 미래 진행형이 따로 없다.
예를 들면 모세가 호렙에서 하나님께 사람들에게 당신을 누구라고 말해야 하느냐고 묻자 하나님은 “나는 나이다(I Am Who I Am)”라고 대답했다.
아람어로 “나는 나이다”는 “나는 나였다(I Was Who I Was)”도 되고 “나는 나일 것이다(I Will Be Who Will Be)”도 된다.
같은 시간 개념으로 예언자들이 고대하던 메시아를 이해한다면 메시아는 앞으로 ‘오실 분’이자, 이미 ‘오신 분’이기도 하고 현재 ‘와계신 분’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 엘리야의 화신으로 이해한 것 역시 부활신앙이란 측면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시간 개념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은 이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는다면 아주 비논리적인 말이 되고 만다.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게 될 것을 즐거워하였고, 마침내 보고서 기뻐하였다.”
“당신은 아직 나이가 쉰도 안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
【요한복음서 8:56-58】


인자를 자칭한 예수에게도 마찬가지의 시간 개념이 적용된다.
그러므로 나사렛에서 성장하고 팔레스타인을 무대로 활약한 예수가 태초에 계신 분이자 동시에 재림할 분이기도 한 것이다.
인자이기 때문에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한결같을 수 있다.


“내가 바로 그이요. 당신들은 인자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마가복음서 8:38, 14:62】


예수는 고난 받는 인자에 관해 여러 차례 언급했는데 여기서 인자는 예언자 이사야의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띠고 있다.
이 부분만 따로 공동번역 성서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야훼께서 그를 때리고 찌르신 것은
뜻이 있어 하신 일이었다.
그 뜻을 따라 그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다.
그리하여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오래 살리라.
그의 손에서 야훼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이사야서 53:10】


예언자들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을 자신의 사역 목적으로 삼았던 그는 이사야의 말씀대로 고난 받는 종의 직분을 수행하지만 다니엘의 말씀대로 높임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사형에 처해지더라도 극적인 순간에 하나님이 자신을 살려낼 것이라고 믿었으며, 그렇지 않다면 죽은 후에라도 부활할 것을 믿었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예언했던 것이다.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서,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 하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서 9:22】


예수는 인자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정의내리면서 자신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하였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 【마가복음서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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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하나님의 아들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곧 그가 메시아냐 아니냐 하는 문제이다.
이 케케묵은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논쟁거리이다.
그가 법정에서 신문당한 내용이 바로 이 문제였다. 복음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시인했다고 기록했고, 초대교회는 이러한 믿음에 따라 형성되었다.
논란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의심하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생긴다.


헤브라이어 메시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즉 유대의 왕을 뜻한다.
초기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을 신앙의 출발로 삼았다.
메시아의 역할에 대한 논란이 생긴 것은 예수가 자신을 가리켜 한 번도 메시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 받은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자신이 생각한 메시아의 역할과 사람들이 기대한 역할이 달랐을 뿐 아니라 양자는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를 거부했으며, 자신의 사역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얻기 바랐다.
그러한 이해가 생전에 가능하지 않다면 자신이 죽은 후에라도 가능해지길 원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마가복음서 1:11】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하늘로부터 들은 소리이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받았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받았다는 것은 광야에서 활약하는 예언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수행할 의무를 부여받은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수행한다는 조건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된 것이지 선택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조건이 선행되지 않을 때는 더 이상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사람들이 고대하는 종말론적 유대의 왕으로 즉위하기를 거부했다.
자신을 유대의 왕으로 옹립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그는 달아났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요한복음서 6:15】


예수는 다윗 왕의 말씀을 논제로 삼아 하나님의 아들의 역할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유대의 왕으로 즉위하는 것이 아님을 밝힌 적이 있다.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느냐?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친히 이렇게 말하였다.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좥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좦’”
【마가복음서 12:35-36】


예수는 자신이 혈통적으로 다윗 왕의 후손이지만 메시아가 왕의 후계자로서 다윗의 가문에서 배출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로마에 빼앗긴 유대의 독립을 회복하여 유대의 왕권을 세우는 메시아가 되는 것은 거부했다.
그는 지상의 왕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통치와 질서를 지상에 세우는 그러한 유대의 왕이기를 바랐으며 이는 신권을 위임받은 왕을 의미했다.


따라서 그가 생각한 메시아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수행하는 것이지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유대의 왕권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바르게 하는 데 노력을 다했다.
예수의 그러한 노력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은 열세 번째 사도라고 불렸던 바울이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해석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이들 모두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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