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중반에 풍병風病으로 자살한 시인 노조린盧照隣

 

 

 

왕발王勃, 양형楊炯, 낙빈왕駱賓王과 함께 당나라 초기 4걸四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시인 노조린盧照隣(637?~689?)의 자字는 승지昇之 호는 유우자幽憂子로 허베이성河北省 판양范陽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질才質이 뛰어나 일찍부터 문명文名을 떨쳤다. 그러나 20대 중반에 풍병風病으로 말이 어둔해졌으며, 쓰촨성四川省 신도新都의 위尉를 물러나 각지를 전전하며 투병생활을 계속했지만, 끝내는 복약을 잘못하여 팔 다리를 잘 쓸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끓는 열정을 감내할 수 없어 영수潁水에 투신하여 자살했다.

노조린은 자신의 비통하고 괴로운 정감을 오히려 맑고 애수 짙은 시로 표현했다. 현존하는 시는 1백 수에 가까우며「결객소년장행結客少年場行」,「실군안失群雁」, 「행로난行路難」,「장안고의長安古意」등의 시가 있는데, 「장안고의」는 모두 68구의 7언 고시로 그의 대표작이다. 시는 옛것을 빌어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 장안의 차마, 궁실, 창녀, 무녀, 협객, 왕후장상王侯將相에 이르기까지 호화로운 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다음은「장안고의長安古意」(장안을 회고하며)이다. 장안長安은 당나라의 수도이고, 고의古意는 옛날을 추억하는 마음, 회고의 정情이다.

 

節物風光不相待절물풍광불상대 桑田碧海須臾改상전벽해수수개; 절물節物(계절을 따라 나오는 산물産物이나 경치風光) 풍광風光은 그대로 있지 않아 상전桑田이 벽해碧海 되듯 잠깐 사이 변한다.

昔時金階白玉堂차시금계백옥당 卽今惟見靑松在즉금유견청송재; 옛날의 금계단과 옥당玉堂 터에는 지금에 오직, 푸른 소나무들뿐.

寂寂寥寥揚子居적적요요양자거 年年歲歲一牀書년년세세일상거; 적적하고 쓸쓸한 양자揚子(한漢나라 말기 18년에 타계한 양웅揚雄을 높여 이르는 말)에게는 해마다 한 책상의 가득한 책뿐인데

獨有南山桂化發득유남산계화발 飛來飛去襲人裾비래비거습인거; 홀로 저 남산南山의 계수나무 꽃이 피어 날아가고 날아오며 옷자락을 스친다.

 

양자揚子 혹은 양웅揚雄은 40여 세가 되었을 때 수도인 장안에서 살면서 시인으로 명성이 높았던 덕분에 관직을 얻을 수 있었다. 9년 왕망王莽이 제위를 찬탈하고 많은 유명 인사들을 처형하거나 옥에 가둘 때 곧 잡힐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을 안 양웅은 높은 건물의 창밖으로 몸을 던져 크게 다쳤다. 왕망은 양웅이 정치에 뜻이 없음을 알고 그에 대한 조사를 중지했다. 양웅은 말년에 시에서 철학으로 관심을 돌렸는데, 철학에서는 유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중국인의 영원한 관심사인 인간 본성에 관한 학설로 유명하다.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이나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 같은 극단적인 입장을 떠나 인간의 본성에는 선과 악이 뒤섞여 있다고 보았다.

다음은 노조린의「곡지하曲池荷」(골짜기연못의 연꽃)이다.

 

浮香繞曲岸부향요곡안 圓影覆萃池원영복췌지; 연꽃 향기는 굽은 언덕 감돌고 연잎 둥근 그림자는 못을 덮었다네.

常恐秋風早상공추풍조 飄零君不知표령군부지; 가을바람 이를까 항상 두려워하나니 나부껴 떨어질 것, 그대는 모르는가.

 

표령飄零은 나뭇잎 같은 것이 바람에 나부껴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가을이 오면 연꽃도 시들 터인데 가을이 일찍 오는 걸 늘 두려워한다는 말이다. 이 시는 노조린 자신의 마음을 전한 것으로 보이는데, 재질을 지녔더라도 불우하여 시들고 마는 자신을 연꽃에 비유하면서 그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을 서운해 하는 듯하다. 그는 20대 중반에 풍병風病으로 자살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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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과 손등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손가락 행법

1.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왼손 엄지의 끝을 거머쥐고 수도꼭지를 비틀 듯이 좌우로 30회 비튼다. 비틀면서 손가락 끝에서 밑동으로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이동시킨다. 왼손의 엄지-검지-장지-약지-새끼손가락까지 차례로 해나간다.

2. 오른손 엄지로 왼손바닥을 지압한다. 이상을 좌우 양손에 대하여 몇 번이고 되풀이한다.

이 행법은 주름살이 많고 피부가 거칠고 활기가 없는 손을 젊어지게 만든다. 손의 기혈 흐름을 왕성하게 하면 팔과 어깨의 기혈 흐름도 완성해지므로 어깨나 팔의 노화로 고민하는 사람은 늘 하도록 한다. 이 행법은 언제 어디에서도 할 수 있다.

 

 

손등 행법

1. 오른손바닥으로 왼손등을 비빈다. 몇 십 번이라도 좋다. 마찬가지로 왼손바닥으로 오른손등을 비벼준다.

엄지는 뇌, 장지는 순환기계, 약지는 신경계, 새끼손가락은 호흡기 및 생식기와 관련이 있다. 손등에 탄력성이 없을 때 이 행법을 하면 눈에 띄게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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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아시아에서 최초로 근대화의 길을 걸은 나라다

 

 

 

 

근대 남아시아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사건은 1857년에 발발한 세포이 항쟁이었다. 세포이 항쟁 이후에 무굴의 마지막 황제가 폐위되었고, 이는 독립이야말로 식민주의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모두에게 각인시켰다. 특히 간디는 인도 독립에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11장에서는 독립의 열망을 품은 지식인 간디의 불굴의 의지와 생애에 관해 살펴볼 것이다. 비폭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한 간디의 이념은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이었지만 현실의 더러움, 예를 들어 유혈사태와 같은 모든 폐단을 막기에는 역부족인 이념이었다. 1947년 인도에서는 국토 분리와 관련한 대혼란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무려700,000명이 목숨을 잃었고, 단기적으로만 보자면 간디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런 대혼란의 시대에 인도와 새로 독립한 파키스탄은 세 차례에 걸쳐 전쟁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1971년에 벌어진 마지막 전쟁에서 방글라데시가 독립을 쟁취한다. 스리랑카도 독립 이후 각 계층과 집단 간의 화합을 이루는 데 따르는 당면과제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 비록 반군세력인 타밀 타이거즈2에게는 승리를 거뒀지만 말이다. 골이 깊은 이런 문제들은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오스만투르크의 경우처럼 극단적 쇠퇴를 겪은 건 아니지만, 중국도 근대에 들어서 침략국들에게 강력한 억압을 받을 정도의 약체로 전락했다. 1840~1842년에 벌어진 아편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함으로써 중국의 허약함이 만천하에 여실히 드러나고 말았다. 영국령 동인도회사는 차茶의 구입자금으로 필요한 은이 부족해지자, 아편을 밀매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중국 정부가 이런 밀매를 규제하는 걸 막기 위해 무력을 동원했고 이를 계기로 중국 국정에 다른 열강들이 간섭하기 시작했다. 12장에서는 1911년 청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의 열강의 위협에 관해 살펴볼 것이다. 프랑스・러시아・일본과 같은 당대의 강대국들이 위태한 청나라에게서 이득을 얻어내기 위해 어떤 억압을 했는지에 관해서 말이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최초로 근대화의 길을 걸은 나라다. 이러한 선택 덕에 새로운 열강으로 급부상한 일본은 힘의 균형을 바꾸어 놓았다. 일본은 한반도・중국・동남아시아, 즉 동아시아 각지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제국주의 야심을 드러냈다. 새로 부상한 나라의 이러한 제국주의 야심은 서구열강의 기존 식민왕국을 위협했다.
13장에서는 근대 중앙아시아가 겪어야만 했던 고난의 여정에 관해 다룰 것이다. 영국과 대립각을 세운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과 티베트에서 유목민들을 정복하려고 했다. 물론 그 지역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차지하고 싶은 속내도 있었다. 소련 체제 하에서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은 값싼 노동력과 아랄 해 덕분에 얻을 수 있는 풍부한 수자원을 이용해 목화를 재배하는 거대한 목화농장으로 변모하는 최악의 변이를 겪어야 했다. 현대에 와서야 이들은 점진적으로 진정한 독립을 완성해가고 있다. 다분히 내부적인 문제인 이들의 민족갈등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시베리아와 만주의 일부분은 아직도 러시아의 지배 하에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강건한 백성만큼은 외세의 힘을 견딜 정도로 힘을 키웠지만 말이다.
마지막 14장에서는 근대 동남아시아의 성쇠를 거시적으로 조망하면서 아시아 역사를 면밀히 살펴볼 것이다. 상당히 이른 시기에 인도의 독립을 승인하는 역사적인 결정을 내린 이후 영국은 식민지에 주둔하던 세력을 차례차례로 철수했다. 반면 네덜란드와 프랑스는 세상이 변한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아니 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식민지를 보유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세월엔 장사가 없다. 반프랑스 운동의 선봉에선 베트남에서는 사상 최악의 비극이 빚어졌다. 얼마 후 미국이 이 전쟁에 동참하면서 그 비극은 한층 확대되었다. 월남전은 인간이 저지른 냉전시대의 오류를 뼈아프게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심지어 미국은 북베트남인이 갈망한 베트남의 통일이라는 본질적인 목표를 제대로 이해조차 못했다.
필리핀의 경우 2차 세계대전이 태평양 전쟁으로 번지는 국면이, 1946년 7월 4일로 예정되어 있던 이 나라의 독립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마닐라가 폐허가 된 것은 독립이라는 기념비적인 사건의 빛을 바래게 했다. 당시 마닐라는 바르샤바와 부다페스트에 비견될 정도로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타이와 미얀마와 마찬가지로 필리핀도 어떻게든 군사 쿠데타를 피하려고 애썼지만 민주주의가 대중의 혼란에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반면 말레이시아 연방에 속한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식민시대 이후의 변화과정을 비교적 잘 극복했다. 1960년대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의 정복욕을 막기 위해서는 말레이시아 연방에도 타국의 원조가 필요했지만 말이다.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팽창주의의 또 다른 피해국이자 유럽 최후의 식민국가였던 동티모르는 1999년 돌연 해방을 맞게 되었다. 동티모르는 향수의 원료가 되는 백단유가 자라는 숲이 도처에 있는 산림자원이 풍부한 나라다. 이를 놓칠리 없는 포르투갈은 1642년 이미 이곳에 교역소를 설치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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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시아에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붕괴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

 

 

 

 

 

 

중국 문명은 절정에 달했고, 정점에 달한 문화는 한반도와 일본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 영향으로 한반도와 일본에도 나름의 문화가 자리 잡았다. 한반도에는 유교가 깊이 뿌리내린 반면, 봉건주의 사회였던 일본에서는 유교가 설 자리가 없었다. 끊임없는 전란에 시달려야 했던 일본 열도는 중국 황제처럼 무소불위의 권한을 보유한 황제가 등장할 수 없는 땅이었다. 중국은 1276~1368년 몽골의 지배를 받았지만 명나라의 건국으로 다시 한족의 세상이 도래했다. 명나라는 만리장성을 개보수하여 북방수비를 강화했고, 환관제독 정화鄭和의 영도하에 남해원정단을 남대양으로 보내기도 했다. 이 대규모 선단의 원정 행보는 어느 순간 갑자기 멈췄다. 만약 1433년까지 정화의 원정대가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녔더라면, 바스코 다 가마는 자신의 선단 네 배에 육박하는 중국 함대와 마주쳤을 것이다. 아시아 국가들이 아시아의 해상에 관심을 두지 않자, 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프랑스・영국까지 자신들이 최초로 이곳을 항해한 탐험가라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
중세 중앙아시아의 군세는 최고조에 달하여, 누구도 그들을 굴복시킬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몽골의 영웅 칭기즈 칸은 일련의 정복을 통해, 아시아・러시아・페르시아・한반도・중국・캄보디아・자바까지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티베트군과 만주군 또한 강력한 주변국가들을 하나둘 물리치고 제국의 앞날을 개척했다. 티베트군과 만주군 모두 중국 대륙을 노렸지만 결국 1644년 중국 역사상 마지막 제국 청나라를 건국한 승리자는 만주에서 온 전사들이었다.
8장에서는 그리 길지 않았던 티무르 왕조가 어떤 이유로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인식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왕조의 창시자 티무르는 적의 머리를 베어 탑을 쌓는 걸 좋아했다. 바그다드를 점령한 1401년에는 무려 90,000개의 머리로 120개의 탑을 쌓았다고 한다. “이슬람의 검”으로 불린 티무르였지만 그는 함부로 사람의 목숨을 앗는 자는 아니었다.
같은 종교를 믿었지만 티무르의 적이었던 이슬람 세력의 행보에 비하면 티무르는 기독교인・유대교도・불교신자・힌두교도 모두에게 참극만은 피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관대한 정복자였다. 물론 티무르도 그들에 대한 분노가 폭발할 때가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어느 정도는 형평에 맞는 것처럼 보였다.
9장에서는 중세 동남아시아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이 시기에 동남아시아에서는 상당히 다양한 문명들이 싹트기 시작했다. 맨 처음 베트남이 1000년간의 중국 지배에서 벗어나 939년에 최초로 독립된 응오 왕조를 건립했다. 하지만 응오 왕조는 끝내 깊게 뿌리내린 중국의 관습을 뿌리 뽑진 못했다. 특히 유교는 1900년대에 호치민이 베트남 관료들을 모집하는 데 유교를 평가기준으로 삼지 못하도록 조치할 때까지 베트남의 주류문화를 점령했다. 베트남 남부의 참파・캄보디아・인도네시아 군도 등지는 인도 문화가 사회 저변을 깊이 잠식한 곳이었다. 특히 인도네시아 군도에선 힌두교국가들이 번성했다. 스리랑카를 통해 오늘날의 미얀마인 버마로 불교가 전래되었다.
필리핀은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출현하기 전까진 외부사상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땅이었다.
16세기, 스페인을 통해 기독교가 필리핀에 전래되었다. 초기에는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이 향신료 무역을 독점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자바 섬을 근거로 한 영구적인 무역로를 구축한 네덜란드가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란 이름의 인도네시아 식민제국을 구축한 것은 물론이고 말이다. 14세기에는 타이족, 즉 현재의 윈난雲南을 떠나온 부족이 뒤늦게 이 정복자 대열에 합류했다. 이처럼 화려한 문명을 꽃피운 아시아에 근대의 시작과 함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내륙과 해상 양방위로 공략해오는 서구세력의 거센 흐름을 막을 수 없었던 아시아 각국은 식민국과 속국으로 전락해버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적 현실은 급물살을 타게되었지만, 기술적 우위를 바탕으로 한 유럽과 미주의 서구열강은 아시아에 유례가 드물 정도로 공고한 지배체계를 구축했다.
서아시아에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붕괴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10장에서는,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내리막길을 걷던 오스만투르크에 관해 서두에서 살펴본 후, 이 지역이 어떤 방식으로 나뉘어 여러 국가들이 각각의 길을 가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적개심은 서아시아 신생국가들이 공유한 몇 안 되는 정서들 가운데 하나였다. 서로 간의 차이는 불신과 의심을 낳았다. 이라크와 이란은 개와 고양이와 다를 바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고, 시리아와 레바논은 불안한 동침을 이어갔으며, 요르단과 사우디아라비아는 결국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반면 터키는 건국의 아버지아타튀르크의 영도 아래 근대화를 거치면서 엄청난 성장을 이뤘다. 현재의 터키는 유럽 연합의 예비회원국으로 거론되는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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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적 이슬람주의의 두 가지 사례: AKP와 무슬림 형제단

 

 

 

 

 

 

현재 민주화 정책은 일부 학자와 정책입안자들이 제도적 이슬람주의에 대한 달라진 분석법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어낸, 터무니없는 “온건파 이슬람주의” 개념에 의존한다. “급진파 이슬람교” 를 배격한 것이, 테러를 반대하고 민주정치에 아첨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으로 전환되어 온 것이다. “온건파 이슬람주의자” 라는 개념은 지하디스트라는 정체를 대놓고 떠벌리지 않는 이슬람주의 지도자가 민주정치를 옹호하는 사람일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런 이슬람주의자라면 사람들이 독재자와 독재정권을 다스릴 만한 적임자로 떠받들 것이다. 예컨대, 이라크에서는 민주정치의 본보기가 되지 못한 시아파 이슬람주의자들이 사담 후세인을 지지하는 수니파 바스당원들B'hists을 대체했다. 여기서 나는 터키의 AKP와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에 중점을 둘까 한다. 후자는 “두려움을 모르는 이슬람교” 17를 대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이 붕괴된 이후 정계를 장악할 테니 말이다. 미국 정책입안자들은 형제단이 이집트를 통치하는 방식이 AKP가 장악한 터키와 닮을 거라고 기대하며 그들에게 찬사를 보낼지도 모른다. 일부 서양인은 AKP가 이상적인 정권이라고 생각한다.
“온건파 이슬람교 공화국” 이라며 터키를 옹호하는 미국인들 중에는 랜드연구소the Rand Corporation의 스티븐 라라비도 눈에 띈다. 그는 “AKP가 집권한 터키는 지역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 당을 법으로 금하는 것은 개혁과 민주주의를 장려하려는 노력을 깎아내릴 수도 있다” 고 주장했다.18 2008년 7월, 터키 헌법재판소는 AKP가 세속 헌법을 훼손한다고 협박한 탓에 소집을 금한다고 밝혔으나 결국에는 판결을 번복했다. 그럼에도 라라비는 헌법재판소가 AKP를 해체하면 “미국은 주요 우방을 잃을 것” 으로 우려했다. 이것이 바로 뉴스 분석의 허울을 쓴 검증되지 않은 가정의 한 가지 사례다. AKP가 집권한 터키의 대외정책은 이 분석이 거짓임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좀 더 그럴듯한 견해는 터키계 미국인 분석가 제이노 바란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민주화라는 미명 아래 탈세속화를 진행하고 있다는 터키의 “점진적 이슬람주의화” 를 규명했다. 바란의 『찢긴 국가』를 살펴보자.
증거에 따르면, AKP 지도자들은… 이슬람주의를 찬성하는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국가의 제도를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남녀가 평등하고, 소수의 종교・민족을 존중해야 한다는 덕목이 하향세를 보이는 통계수치는 종교와 국민의 삶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질지도 모른다는 케말주의자들의 우려를 확증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 세속 민주정치가 약화될 수 있다. 이는 터키 유권자의 의지를 반영하는 국내 정책 및 개혁안을 시행하고 있다는, AKP의 주장과는 대립된다.
이 책이 출간된 이후의 사건은 터키의 이슬람주의화를 우려한 바란의 경고와 일맥상통한다. 2010년 9월 12일, 결국 터키의 세속적 헌법을 개정하게 된 국민투표로 AKP는 특히 사법부와 서방세계가 교육하고 훈련한 군당국에 대하여 공화국의 세속적인 주축을 약화시키겠다는 발의안을 상정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국민투표를 “역동적” 민주정치의 징후라며 격찬했으나— 『뉴욕 타임스』지를 비롯한— 언론들은 국민투표를 가리켜 “AKP 이슬람주의자들과 세속적인 엘리트가 벌이는 권력다툼의 최근 라운드” 라 생각했다고 밝혔다.20 본지는 헌법재판소의 쇄신과 판・검사 최고위원회의 재구성이 “사법부의 독립을 저해하며, 터키의 세속주의 수준을 낮추기 위한 장기적 전략의 일환으로 AKP의 지지세력을 사법부 고위직에 앉히려는” 꼼수라고 말했다. 이 같은 변화는 1923년, 공화국을 창건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세속질서를 파괴하기 위한 권력다툼을 반영한다. 탈세속화와 케말주의 공화국의 탈서양화 과정은 나토 회원국이자, 비전투부대를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하고 EU 가입을 원하는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다.
AKP가 이란과 하마스 및 헤즈볼라와 가까워지자 그와 서방세계의 인연이 의심을 받게 되었다. 혹자는 AKP를 터키의 “이슬람주의에 기반을 둔 정부” 로 인도하는 정당으로 규정하여,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답다는 것의 차이를 인정하는 『뉴욕 타임스』지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나,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지를 비롯한 유럽 언론들은 자기기만적이다. 이를테면, AKP를 “이슬람 보수주의” 로 간주한 것이다. 그러나 AKP는 “전반적으로 새로운 헌법” 을 위한 기초작업의 일환으로 세속적인 제도를 이슬람주의자의 수하에 넘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언론인에 맞서는 검사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는 EU의 진술도 충격을 준다. EU는 “언론의 자유를 침해” 한다며 터키를 맹비난했는데,22 이 같은 정책에서는 민주주의 사고방식을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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