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아시아에서 최초로 근대화의 길을 걸은 나라다

근대 남아시아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사건은 1857년에 발발한 세포이 항쟁이었다. 세포이 항쟁 이후에 무굴의 마지막 황제가 폐위되었고, 이는 독립이야말로 식민주의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모두에게 각인시켰다. 특히 간디는 인도 독립에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11장에서는 독립의 열망을 품은 지식인 간디의 불굴의 의지와 생애에 관해 살펴볼 것이다. 비폭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한 간디의 이념은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이었지만 현실의 더러움, 예를 들어 유혈사태와 같은 모든 폐단을 막기에는 역부족인 이념이었다. 1947년 인도에서는 국토 분리와 관련한 대혼란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무려700,000명이 목숨을 잃었고, 단기적으로만 보자면 간디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런 대혼란의 시대에 인도와 새로 독립한 파키스탄은 세 차례에 걸쳐 전쟁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1971년에 벌어진 마지막 전쟁에서 방글라데시가 독립을 쟁취한다. 스리랑카도 독립 이후 각 계층과 집단 간의 화합을 이루는 데 따르는 당면과제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 비록 반군세력인 타밀 타이거즈2에게는 승리를 거뒀지만 말이다. 골이 깊은 이런 문제들은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오스만투르크의 경우처럼 극단적 쇠퇴를 겪은 건 아니지만, 중국도 근대에 들어서 침략국들에게 강력한 억압을 받을 정도의 약체로 전락했다. 1840~1842년에 벌어진 아편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함으로써 중국의 허약함이 만천하에 여실히 드러나고 말았다. 영국령 동인도회사는 차茶의 구입자금으로 필요한 은이 부족해지자, 아편을 밀매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중국 정부가 이런 밀매를 규제하는 걸 막기 위해 무력을 동원했고 이를 계기로 중국 국정에 다른 열강들이 간섭하기 시작했다. 12장에서는 1911년 청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의 열강의 위협에 관해 살펴볼 것이다. 프랑스・러시아・일본과 같은 당대의 강대국들이 위태한 청나라에게서 이득을 얻어내기 위해 어떤 억압을 했는지에 관해서 말이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최초로 근대화의 길을 걸은 나라다. 이러한 선택 덕에 새로운 열강으로 급부상한 일본은 힘의 균형을 바꾸어 놓았다. 일본은 한반도・중국・동남아시아, 즉 동아시아 각지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제국주의 야심을 드러냈다. 새로 부상한 나라의 이러한 제국주의 야심은 서구열강의 기존 식민왕국을 위협했다.
13장에서는 근대 중앙아시아가 겪어야만 했던 고난의 여정에 관해 다룰 것이다. 영국과 대립각을 세운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과 티베트에서 유목민들을 정복하려고 했다. 물론 그 지역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차지하고 싶은 속내도 있었다. 소련 체제 하에서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은 값싼 노동력과 아랄 해 덕분에 얻을 수 있는 풍부한 수자원을 이용해 목화를 재배하는 거대한 목화농장으로 변모하는 최악의 변이를 겪어야 했다. 현대에 와서야 이들은 점진적으로 진정한 독립을 완성해가고 있다. 다분히 내부적인 문제인 이들의 민족갈등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시베리아와 만주의 일부분은 아직도 러시아의 지배 하에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강건한 백성만큼은 외세의 힘을 견딜 정도로 힘을 키웠지만 말이다.
마지막 14장에서는 근대 동남아시아의 성쇠를 거시적으로 조망하면서 아시아 역사를 면밀히 살펴볼 것이다. 상당히 이른 시기에 인도의 독립을 승인하는 역사적인 결정을 내린 이후 영국은 식민지에 주둔하던 세력을 차례차례로 철수했다. 반면 네덜란드와 프랑스는 세상이 변한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아니 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식민지를 보유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세월엔 장사가 없다. 반프랑스 운동의 선봉에선 베트남에서는 사상 최악의 비극이 빚어졌다. 얼마 후 미국이 이 전쟁에 동참하면서 그 비극은 한층 확대되었다. 월남전은 인간이 저지른 냉전시대의 오류를 뼈아프게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심지어 미국은 북베트남인이 갈망한 베트남의 통일이라는 본질적인 목표를 제대로 이해조차 못했다.
필리핀의 경우 2차 세계대전이 태평양 전쟁으로 번지는 국면이, 1946년 7월 4일로 예정되어 있던 이 나라의 독립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마닐라가 폐허가 된 것은 독립이라는 기념비적인 사건의 빛을 바래게 했다. 당시 마닐라는 바르샤바와 부다페스트에 비견될 정도로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타이와 미얀마와 마찬가지로 필리핀도 어떻게든 군사 쿠데타를 피하려고 애썼지만 민주주의가 대중의 혼란에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반면 말레이시아 연방에 속한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식민시대 이후의 변화과정을 비교적 잘 극복했다. 1960년대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의 정복욕을 막기 위해서는 말레이시아 연방에도 타국의 원조가 필요했지만 말이다.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팽창주의의 또 다른 피해국이자 유럽 최후의 식민국가였던 동티모르는 1999년 돌연 해방을 맞게 되었다. 동티모르는 향수의 원료가 되는 백단유가 자라는 숲이 도처에 있는 산림자원이 풍부한 나라다. 이를 놓칠리 없는 포르투갈은 1642년 이미 이곳에 교역소를 설치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