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아시아에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붕괴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

 

 

 

 

 

 

중국 문명은 절정에 달했고, 정점에 달한 문화는 한반도와 일본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 영향으로 한반도와 일본에도 나름의 문화가 자리 잡았다. 한반도에는 유교가 깊이 뿌리내린 반면, 봉건주의 사회였던 일본에서는 유교가 설 자리가 없었다. 끊임없는 전란에 시달려야 했던 일본 열도는 중국 황제처럼 무소불위의 권한을 보유한 황제가 등장할 수 없는 땅이었다. 중국은 1276~1368년 몽골의 지배를 받았지만 명나라의 건국으로 다시 한족의 세상이 도래했다. 명나라는 만리장성을 개보수하여 북방수비를 강화했고, 환관제독 정화鄭和의 영도하에 남해원정단을 남대양으로 보내기도 했다. 이 대규모 선단의 원정 행보는 어느 순간 갑자기 멈췄다. 만약 1433년까지 정화의 원정대가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녔더라면, 바스코 다 가마는 자신의 선단 네 배에 육박하는 중국 함대와 마주쳤을 것이다. 아시아 국가들이 아시아의 해상에 관심을 두지 않자, 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프랑스・영국까지 자신들이 최초로 이곳을 항해한 탐험가라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
중세 중앙아시아의 군세는 최고조에 달하여, 누구도 그들을 굴복시킬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몽골의 영웅 칭기즈 칸은 일련의 정복을 통해, 아시아・러시아・페르시아・한반도・중국・캄보디아・자바까지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티베트군과 만주군 또한 강력한 주변국가들을 하나둘 물리치고 제국의 앞날을 개척했다. 티베트군과 만주군 모두 중국 대륙을 노렸지만 결국 1644년 중국 역사상 마지막 제국 청나라를 건국한 승리자는 만주에서 온 전사들이었다.
8장에서는 그리 길지 않았던 티무르 왕조가 어떤 이유로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인식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왕조의 창시자 티무르는 적의 머리를 베어 탑을 쌓는 걸 좋아했다. 바그다드를 점령한 1401년에는 무려 90,000개의 머리로 120개의 탑을 쌓았다고 한다. “이슬람의 검”으로 불린 티무르였지만 그는 함부로 사람의 목숨을 앗는 자는 아니었다.
같은 종교를 믿었지만 티무르의 적이었던 이슬람 세력의 행보에 비하면 티무르는 기독교인・유대교도・불교신자・힌두교도 모두에게 참극만은 피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관대한 정복자였다. 물론 티무르도 그들에 대한 분노가 폭발할 때가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어느 정도는 형평에 맞는 것처럼 보였다.
9장에서는 중세 동남아시아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이 시기에 동남아시아에서는 상당히 다양한 문명들이 싹트기 시작했다. 맨 처음 베트남이 1000년간의 중국 지배에서 벗어나 939년에 최초로 독립된 응오 왕조를 건립했다. 하지만 응오 왕조는 끝내 깊게 뿌리내린 중국의 관습을 뿌리 뽑진 못했다. 특히 유교는 1900년대에 호치민이 베트남 관료들을 모집하는 데 유교를 평가기준으로 삼지 못하도록 조치할 때까지 베트남의 주류문화를 점령했다. 베트남 남부의 참파・캄보디아・인도네시아 군도 등지는 인도 문화가 사회 저변을 깊이 잠식한 곳이었다. 특히 인도네시아 군도에선 힌두교국가들이 번성했다. 스리랑카를 통해 오늘날의 미얀마인 버마로 불교가 전래되었다.
필리핀은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출현하기 전까진 외부사상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땅이었다.
16세기, 스페인을 통해 기독교가 필리핀에 전래되었다. 초기에는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이 향신료 무역을 독점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자바 섬을 근거로 한 영구적인 무역로를 구축한 네덜란드가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란 이름의 인도네시아 식민제국을 구축한 것은 물론이고 말이다. 14세기에는 타이족, 즉 현재의 윈난雲南을 떠나온 부족이 뒤늦게 이 정복자 대열에 합류했다. 이처럼 화려한 문명을 꽃피운 아시아에 근대의 시작과 함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내륙과 해상 양방위로 공략해오는 서구세력의 거센 흐름을 막을 수 없었던 아시아 각국은 식민국과 속국으로 전락해버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적 현실은 급물살을 타게되었지만, 기술적 우위를 바탕으로 한 유럽과 미주의 서구열강은 아시아에 유례가 드물 정도로 공고한 지배체계를 구축했다.
서아시아에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붕괴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10장에서는,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내리막길을 걷던 오스만투르크에 관해 서두에서 살펴본 후, 이 지역이 어떤 방식으로 나뉘어 여러 국가들이 각각의 길을 가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적개심은 서아시아 신생국가들이 공유한 몇 안 되는 정서들 가운데 하나였다. 서로 간의 차이는 불신과 의심을 낳았다. 이라크와 이란은 개와 고양이와 다를 바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고, 시리아와 레바논은 불안한 동침을 이어갔으며, 요르단과 사우디아라비아는 결국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반면 터키는 건국의 아버지아타튀르크의 영도 아래 근대화를 거치면서 엄청난 성장을 이뤘다. 현재의 터키는 유럽 연합의 예비회원국으로 거론되는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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