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힌두교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보살을 칭송하는 내용이 담긴 쿠샨의 비문이 마투라Mathura에서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니슈카의 개인적인 믿음의 깊이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측정이 불가능하다. 당시는 대승불교의 사상이 아직 완성되기 전이었다.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의 보살의 강조와 대승불교의 부흥은 불교의 성인 나가르주나의 사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의 일이었다. 나가르주나의 사상이 세상에 알려진 뒤에야, 서방정토 붓다인 아미타불Amithbha, 미래불인 미륵Maitreya, 그리고 자비의 신 관세음보살Avalokitesvara의 존재가 완벽하게 정립되었다. 아미타불・미륵・관세음보살은 대승불교에서 붓다는 아니지만 여러 생을 거치며 선업을 닦아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른 위대한 반신半神으로 추앙받았다. 나가르주나는 관세음보살이 남자・여자 혹은 동물의 형태로 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 덕에 관세음보살이 중국의 자비의 신 관음으로 변신한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해졌다. 중국 동진東晋의 승려 법현은 자신이 목격한 대승불교 반신들의 기념행렬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불교의 여러 반신들을 태운 정교하게 꾸며진 의식용 마차를 한 무리의 가수・음악가・승려들이 에워싸고 시가를 행진했다고 한다. 힌두교사찰의 행사용 운송수단과 마찬가지로 이 마차는 그 높이가 웬만한 건물 5층 높이에 이를 정도로 높아서, 도시를 대표하는 거대한 건축물이나 성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이 마차 꼭대기에서 내려다보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시기에 불교와 힌두교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불교 내에서는 대승불교와 소승불교학자들 간에 피 튀기는 논쟁이 한창이었다. 갈등의 골이 어찌나 깊었던지 붓다가 살아 있었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정도였다. 나가르주나의 말을 빌어 표현하면 “붓다의 가르침이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절묘한 논리로
불교의 모든 종파의 사상적 오류를 지적해갔다. 나가르주나 자신의 논리에 대해 설명해보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설명할 것도 없다는 무생無生의 논리를 폈다. 감각의 소용돌이에 둘러싸여 있는 마음으로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유한 형태를 가진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특정 현상에 대해서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설명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그의 논리에 따르면, 모든 것이 우리가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관계에 존립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은 실재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나가르주나는 모든 것의 무상함을 받아들여야만 궁극의 진리에 대한 직관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논리는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논리만이 붓다가 중생에게 전하고자 했던 심오한 가르침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반감을 품은 몇몇 사람이 그의 ‘무無’에 대한 사상 때문에 불교계 전체가 파멸에 이르게 되었다고 나가르주나를 비난했다. 이에 대해 나가르주나는 그들이 ‘무’의 개념을 잘
못 이해하고 있다고 답했다. 붓다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진리를 깨달은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사물을 통한 매일의 경험에 대한 진리와 이 명백한 현실 이면에 모든 것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 심오한 두 가지 진리를 깨우친 불자만이 꿈과 같은 매일의 삶에서 해방되어 붓다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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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빠지면 혼이 공중으로 날아가 혼비백산魂飛魄散이 된다

 

 

 

한의학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은 정기신精氣神 , (), ()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은 살(), (), ()로 구성되어 있고, 는 천기天氣(), 지기地氣(), 인기人氣()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음은 혼()과 얼魄意志(), ()으로 구성되어 있다.

은 몸의 형체를 가지고 있고, 은 기의 작용으로 음양이 조화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은 마음처럼 행방이 묘연한 존재이다.
은 마음의 핵이고, 얼은 넋과 뜻意志을 합한 것이다. 얼빠진 경우 얼이 쉽게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얼빠진 사람을 보면 알 수 있다넋과 뜻이 모두 실종된 것이다.
혼이 마음의 중심이라면 얼은 마음의 몸이고, 은 마음의 에너지 양이다. 따라서 얼빠지면 혼과 넋이 이리저리 흩어져 그야말로 혼비백산魂飛魄散이 된다.
죽어야 혼이 몸에서 이탈되는데 죽지도 않았는데 혼비백산되었다면 죽음 일보직전까지 갔다는 말이다. 넋이 흩어지는 바람에 폐는 기가 빠져 가쁜 숨을 몰아쉬고, 진땀을 흘리게 된다.
魄意志()에는 넋과 뜻意志이 내포되어 있는데, 뜻 지는 신의 기능활동機能活動을 기반으로 발현되는 결정이나 판단 및 정보를 기억(저장)하는 정신활동을 말한다. 얼빠지면 이런 정신활동이 중지된다.
정신을 다스리는 넋은 폐에 깃들어 있으면서 걱정을 많이 하거나 슬픈 일을 당하면 몹시 힘들어 한다. 한숨을 쉬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폐가 얼마나 저기압인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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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살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주름살에 대한 행법

 

1. 주름이 생긴 부위를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쥔다. 피부를 쥔 손가락에 약간 힙을 준다. 마치 구김살을 펴듯이 주름살이 생긴 부위를 만져나간다. 다 주무르고 나면 손바닥을 비벼 따뜻하게 한 뒤 주름살 부위에 갖다 대고 약간 힘을 주어 세 번 비빈다.

 

20대에 접어들면 여성의 피부는 노화가 시작된다. 주름살은 세포가 노화되면서 생기는 것이다. 주름살을 없애는 행법은 노화를 막아주는 행법이기도 하다. 이 행법을 하루에 한 시간씩 하면 효과가 곧 나타난다.

눈초리를 손끝으로 쥐면 통증을 느끼는데, 그 부위의 세포가 노화로 죽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행법을 하고 2-3일이 지나면 세포가 되살아나기 때문에 통증이 사라지고 3주쯤 지나면 주름살이 엷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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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와 신정질서를 위한 탐구

 

 


 

 

 

 

 

 

냉전이 종식된 이후, 세계의 질서를 둘러싼 종교와 세속적 비전의 경쟁이 주목을 받게 되었다. 미국 학자 마크 위르겐스마이어는 탈양극성 정치를 논하기 위해 “신냉전”이라는 개념을 언급했다. 신냉전에서는 서방세계의 숙적인 공산주의를 이슬람이 대신해왔다. 왜일까? 좌파에서는 문명의 통일을 확신하던, 숙적을 잃은 서방세계가 이슬람교에서 “새로운 적” 을 만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이념의 전쟁에서는 이슬람혐오증이 반공을 대체한 셈이다. 이 같은 분석은 종족중심주의적 성향을 띤다. 즉, 서방세계의 정치적 라이벌에 집중한 나머지, 이슬람 자체는 거의 관계가 없어 보인다는 말이다. 실제적인 쟁점을 간파하려면 편협한 집착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는 이슬람문명의 “종교의 귀환” 이 현대성에 내민 과제이기도 하다.
유럽이 팽창할 당시, 이슬람교는 반식민지・방어적 문화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지하드는 서방 제국주의의 대응으로 비쳐졌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세계의 리더를 자처하겠다며 한술 더 뜨고 있다. 1950년대 말과 60년대 초 사이드 쿠틉이 쓴 문헌에 따르면, 인류는 “서방세계의 위기와 민주정치의 파산으로 만신창이가 된 데다, 벼랑 끝에 내몰린 것으로 비쳐졌으므로 이슬람교만이 인류를 인도할 자격이 있다” 고 한다. 나중에 나온 『세계 평화와 이슬람교』에서 쿠틉은 이슬람교가 통치해야 세계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면서, 이를 달성하려면 지하드를 “온 인류의 구원과 알라 신의 통치(하키미야트 알라)를 확립하기 위한 영원하고도 포괄적인 세계 혁명” 으로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샤리아는 쿠틉의 구원론을 전시 이데올로기로 바꾸는 데 필요한 기틀이 되었다. 상상속의 다국적 무슬림 공동체에 근간을 둔 이슬람주의식 정치적 국제주의가 실현되려면 샤리아국가뿐 아니라 세속주의를 탈피한 샤리아 기반 세계질서를 갖추어야 한다.
앞서 주장했듯이, 이슬람주의와 샤리아화 프로젝트는 이슬람 민족국가의 개발 위기와 맞물린 근대성 도입의 실패와 어설픈 세속화의 결과다. 이슬람세계가 문화접변acculturation에서 탈문화접변deacculturation으로, 근대화에서 전통화로의 복귀로, 서양화에서 탈서양화로, 세속화에서 세속화 탈피로 이동함으로써 기존의 소득도 잃어가고 있다. 지식의 탈서양화는 합리주의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에까지 이르렀으며, 베버의 보편적인(문화적인 한계는 있었지만) 개념인 합리주의화의 일환인 세속화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샤리아를 둘러싼 이슬람주의 사상은 세속 세계질서를 이슬람교의 신조에 근거한 신정질서로 바꾸려는 야심 차원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꾸며낸 샤리아 전통은 이 같은 세계질서의 주된 정의를 제시한다. 고전 샤리아는 평화와 질서 및 정의의 개념을 포함하나, 현대의 “문화적 전통들 사이의 경쟁” 을 감안해볼 때, 샤리아와 민주적 헌법주의의 갈등에는 새로운 의미가 담겨 있다. 이슬람 신학에 따르면 코란은 알라 신의 말씀으로 신성한 것이나, 이를 탈피한 사상은 인간의 기원에 대한 것이므로 얼마든지 논쟁과 수정・보완의 여지가 있으며, 코란의 말씀과는 다르게 세속적인 특징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마다힙의 네 학파가 샤리아 법체제를 발전시킨 것은 지식인(울레마)과 율법사(푸카하)가 주도한 코란탈피post-Quranic 계획이었다. 얼마 후, 이븐 타이미야의 영향력 있는 문헌에 힘입어, 샤리아는 국가 정치(시야사)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현대 이슬람주의에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꾸며낸 샤리아는 반서양 국가질서를 뒷받침하기 위해 신성한 기원을 주장해야 했다.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 변종 샤리아는 또 다른 프로젝트를 예고한다. 세속화와 세속화의 탈피라는 라이벌 아젠다는 문명이라는 선을 따라 갈라지지 않는다. 세속주의 사상이라고 특히 유럽다운 것은 아니다. 중세 이슬람교에서도 기원을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7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이슬람교의 헬레니즘화에 기초한 일종의 합리주의32인 아베로이즘٢으로 중세 이슬람세계에서는 탁월한 이성이 수용되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합리주의 학파는 이슬람문명에서 점차 수그러든 반면, 합리주의적 계몽사상은 유럽 문화의 영속적인 일원이 되었다. 또한 계몽사상은 유럽의 세계화와 요즘은 서양화로 낮잡아 부르는 유럽사상의 보편화 과정에서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서방세계에서 교육받은 엘리트는 비서양 문화권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나 이슬람세계에서는 지금껏 문화적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해 토착문화주의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다.34 현대 이슬람교에서는 정치의 샤리아화가 “세속화를 탈피한 사회 ”가 아닌 토착문화주의와 관계가 깊다.  새로운 정치적 외양을 갖춘 샤리아의 귀환은 신성한 종교의 귀환 사상에 담겨 있다. 근대성의 위기를 둘러싼 이슬람주의의 대응은 영성이 주도하는 종교적 르네상스라기보다는 정치의 종교화와 종교의 정치화에 더 가까우며, 이 둘은 갈등을 문화로 승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이슬람교의 샤리아화가 그 문제의 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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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법칙

 

 

 

 

 

지금까지 왜 칸트가 도덕적 요건이 곧 합리성의 요건이라고 주장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는 이 주장을 어떻게 증명할까? 우리는 왜 그의 주장을 믿어야 할까? 도덕을 합리성 일부로 보는 칸트의 추론은 칸트가 내세우는 도덕론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쉽사리 다가서기 어려운 그의 사상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모름지기 보편법칙universal laws에 따라 행동해야 하며, 행위 자체가 보편법칙이 되도록 행동하라는 것이다. 보편법칙의 핵심 논리에 따르면, 합리성의 요건은 무엇이건 보편적이어야 한다. 합리성의 요건은 모든 이성적 존재에 다 같이 고르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설령 도덕적 요건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더라도, 도덕적 요건들이 모든 이성적 존재에 고르게 적용되는 정언명령이 되려면 그것들은 반드시 보편적이어야 한다. 또한 도덕적 요건들은 개개인이 어떤 욕구를 지니고 있건 간에, 모든 이성적 행위자에게 적용되는 정언명령의 형태를 따라야 한다. 이것이 보편법칙의 전부다. 칸트는 보편법칙의 사상은 실제로 적용될 수 있는 정언명령의 형태를 따른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보편법칙에 대해 제기되는 비평 가운데 하나는 보편법칙 이 실제에서는 아무런 지침조차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헤겔과 밀을 거쳐 현대에 이르는 많은 철학자들은 보편법칙을 가리켜서 속이 텅 빈 형식주의라고 공격했다. 보편법칙이 되도록 행동하라는 요구는 도무지 어떻게 행동하라는 말인지 종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비평이 정당한 것인지를 가리기 위해 보편법칙이 어떤 절차를 밟아 작동하는지에 관한 칸트주의자들의 설명을 더 들어보아야 한다.
먼저 칸트의 보편법칙이 작동하는 절차를 그와 형식만 비슷한 다른 두 가지 대안과 비교해보자. 하나는 이른바 황금률로 알려진 것이고, 또 하나는 규칙 공리주의다. 황금률이 가르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대우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다른 사람을 대우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황금률은 고작 하나의 단순한 가언명령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나는 거칠고 야성적인 사람인지라 시합에 나온 모든 선수를 때려눕힐 것이다. 그러지 못하면 때려눕힐 때까지 노력할 것이다. 나는 칼에 살고 칼에 죽는 사람이다. 내가 아는 남자란 바로 그런 것이니까. 황금률을 따르자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황금률은 그들이 나를 대하기를 바라는 방식대로 그들을 대하라고 한다. 내 처지에서 보면, 이것은 곧 남들이 온 힘을 다해 나를 사정없이 잔인하게 대해주기를 바란다는 뜻이 된다. 내가 그들에게 해주려는 것처럼 그들도 나를 잔인하게 대해줄 때, 내가 행복할 것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황금률은 통상의 도덕적 규칙이 왜 내게 적용될 수 없는지를 말해준다. 여기서 황금률은 우리가 남들에게서 좋은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것으로 가정하는데, 문제는 바로 이런 가정에 있다. 자신이 남들을 잔인하게 대하는 방식 그대로 남들이 자신을 잔인하게 대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조차 왜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지, 황금률은 그걸 설명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도덕이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이번에는 규칙 공리주의의 경우를 보자. 규칙 공리주의는 어느 사회의 모든 사람이 (그 사회에서 공인된 똑같은 규칙에 따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때, 어떤 행위가 나쁜 결과를 빚어낸다면 그런 행위는 나쁘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거짓말하는 행위가 나쁜 까닭은 모든 사람이 예사로 거짓말을 하면 사회의 신뢰와 협동이 무너지고, 무정부 상태만도 못한 세상이 되는 나쁜 결과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규칙 공리주의자들이 볼 때, 규칙의 가치를 평가하려면 좋다거나 나쁘다는 식으로 어떤 행위의 효과를 구체적으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칸트의 의무론적 시각에서 보면, 규칙은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에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타당성을 지닌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칸트의 견해는 일종의 직관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다. 예를 들어, 노예제 같은 것을 나쁘다고 말하는 까닭은 그것이 단순히 행복보다는 더 큰 불행을 가져온다는 가시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설령 노예제가 총체적으로 더 큰 행복을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그와 상관없이 노예제는 나쁜 것이다. 노예로 묶여 있는 사람들의 존엄과 자유를 희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보편법칙에 대한 견해는 어떤 제도나 행위를 보편화하는 것이 나쁜 일임을 주장하기 위해 행위의 결과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이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보편법칙의 절차에 대한 칸트의 견해는 공리주의자들의 견해보다 훨씬 단순하고 이성적이다. 간단히 말하면, 보편화할 수 없는 것은 이성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칸트는 어떤 행위를 하기로 한다는 것은 그와 동시에 누구라도 그 행위가 정당하다는 것을 암암리에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요컨대, 내가 하나의 자유로운 존재로서 어떤 행위
를 할 때, 나는 단순히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바탕으로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주어진 상황을 고려하여 그 행위를 그런 방식으로 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예컨대, 탈세행위는 당국을 속여서 돈을 아끼려는 행위다. 그렇지만 이러한 속임수가 자기 이익을 위하는 것이라면, 누구라도 같은 상황에서 그러한 속임수를 쓸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돈을 아끼려고 탈세한다면, 누구라도 같은 이유로 탈세할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자신이 그렇게 행위하는 이유가 같은 상황에서 남이 그렇게 행위하는 이유보다 더 강력할 까닭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 나름의 방식으로 어떤 행위를 할 때, 그것은 곧 남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그런 행위를 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행위가 문제되지 않을까? 남들이 자신의 행위와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을 허용할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같은 방식으로 행위한다면, 공공 서비스를 납세로 뒷받침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본래의 기대는 자신이 탈세하더라도 남들이 납세하여 공공 서비스의 결손을 메워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식의 행위를 계속할 수가 없다. 자신이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은 곧 누구나 같은 행위를 해도 좋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이렇게 되고 보면, 남들은 그런 행위를 해도 되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하는 셈이 된다. 스스로 모순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불합리하다. 칸트에 따르면, 그래서 자신이 그런 식의 행위를 해서는 안 될 요건이 성립한다. 자신은 오직 보편법칙이 되는 방식으로만 행위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완전히 이성적으로 행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순에 빠지고 만다. 일종의 마술처럼 자신만을 예외의 자리에 올려놓고, 자신만이 세금을 내지 않을 이유가 있고 자신과 같은 상황에 있는 다른 사람은 그럴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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