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법칙

 

 

 

 

 

지금까지 왜 칸트가 도덕적 요건이 곧 합리성의 요건이라고 주장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는 이 주장을 어떻게 증명할까? 우리는 왜 그의 주장을 믿어야 할까? 도덕을 합리성 일부로 보는 칸트의 추론은 칸트가 내세우는 도덕론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쉽사리 다가서기 어려운 그의 사상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모름지기 보편법칙universal laws에 따라 행동해야 하며, 행위 자체가 보편법칙이 되도록 행동하라는 것이다. 보편법칙의 핵심 논리에 따르면, 합리성의 요건은 무엇이건 보편적이어야 한다. 합리성의 요건은 모든 이성적 존재에 다 같이 고르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설령 도덕적 요건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더라도, 도덕적 요건들이 모든 이성적 존재에 고르게 적용되는 정언명령이 되려면 그것들은 반드시 보편적이어야 한다. 또한 도덕적 요건들은 개개인이 어떤 욕구를 지니고 있건 간에, 모든 이성적 행위자에게 적용되는 정언명령의 형태를 따라야 한다. 이것이 보편법칙의 전부다. 칸트는 보편법칙의 사상은 실제로 적용될 수 있는 정언명령의 형태를 따른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보편법칙에 대해 제기되는 비평 가운데 하나는 보편법칙 이 실제에서는 아무런 지침조차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헤겔과 밀을 거쳐 현대에 이르는 많은 철학자들은 보편법칙을 가리켜서 속이 텅 빈 형식주의라고 공격했다. 보편법칙이 되도록 행동하라는 요구는 도무지 어떻게 행동하라는 말인지 종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비평이 정당한 것인지를 가리기 위해 보편법칙이 어떤 절차를 밟아 작동하는지에 관한 칸트주의자들의 설명을 더 들어보아야 한다.
먼저 칸트의 보편법칙이 작동하는 절차를 그와 형식만 비슷한 다른 두 가지 대안과 비교해보자. 하나는 이른바 황금률로 알려진 것이고, 또 하나는 규칙 공리주의다. 황금률이 가르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대우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다른 사람을 대우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황금률은 고작 하나의 단순한 가언명령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나는 거칠고 야성적인 사람인지라 시합에 나온 모든 선수를 때려눕힐 것이다. 그러지 못하면 때려눕힐 때까지 노력할 것이다. 나는 칼에 살고 칼에 죽는 사람이다. 내가 아는 남자란 바로 그런 것이니까. 황금률을 따르자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황금률은 그들이 나를 대하기를 바라는 방식대로 그들을 대하라고 한다. 내 처지에서 보면, 이것은 곧 남들이 온 힘을 다해 나를 사정없이 잔인하게 대해주기를 바란다는 뜻이 된다. 내가 그들에게 해주려는 것처럼 그들도 나를 잔인하게 대해줄 때, 내가 행복할 것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황금률은 통상의 도덕적 규칙이 왜 내게 적용될 수 없는지를 말해준다. 여기서 황금률은 우리가 남들에게서 좋은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것으로 가정하는데, 문제는 바로 이런 가정에 있다. 자신이 남들을 잔인하게 대하는 방식 그대로 남들이 자신을 잔인하게 대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조차 왜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지, 황금률은 그걸 설명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도덕이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이번에는 규칙 공리주의의 경우를 보자. 규칙 공리주의는 어느 사회의 모든 사람이 (그 사회에서 공인된 똑같은 규칙에 따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때, 어떤 행위가 나쁜 결과를 빚어낸다면 그런 행위는 나쁘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거짓말하는 행위가 나쁜 까닭은 모든 사람이 예사로 거짓말을 하면 사회의 신뢰와 협동이 무너지고, 무정부 상태만도 못한 세상이 되는 나쁜 결과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규칙 공리주의자들이 볼 때, 규칙의 가치를 평가하려면 좋다거나 나쁘다는 식으로 어떤 행위의 효과를 구체적으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칸트의 의무론적 시각에서 보면, 규칙은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에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타당성을 지닌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칸트의 견해는 일종의 직관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다. 예를 들어, 노예제 같은 것을 나쁘다고 말하는 까닭은 그것이 단순히 행복보다는 더 큰 불행을 가져온다는 가시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설령 노예제가 총체적으로 더 큰 행복을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그와 상관없이 노예제는 나쁜 것이다. 노예로 묶여 있는 사람들의 존엄과 자유를 희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보편법칙에 대한 견해는 어떤 제도나 행위를 보편화하는 것이 나쁜 일임을 주장하기 위해 행위의 결과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이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보편법칙의 절차에 대한 칸트의 견해는 공리주의자들의 견해보다 훨씬 단순하고 이성적이다. 간단히 말하면, 보편화할 수 없는 것은 이성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칸트는 어떤 행위를 하기로 한다는 것은 그와 동시에 누구라도 그 행위가 정당하다는 것을 암암리에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요컨대, 내가 하나의 자유로운 존재로서 어떤 행위
를 할 때, 나는 단순히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바탕으로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주어진 상황을 고려하여 그 행위를 그런 방식으로 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예컨대, 탈세행위는 당국을 속여서 돈을 아끼려는 행위다. 그렇지만 이러한 속임수가 자기 이익을 위하는 것이라면, 누구라도 같은 상황에서 그러한 속임수를 쓸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돈을 아끼려고 탈세한다면, 누구라도 같은 이유로 탈세할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자신이 그렇게 행위하는 이유가 같은 상황에서 남이 그렇게 행위하는 이유보다 더 강력할 까닭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 나름의 방식으로 어떤 행위를 할 때, 그것은 곧 남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그런 행위를 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행위가 문제되지 않을까? 남들이 자신의 행위와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을 허용할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같은 방식으로 행위한다면, 공공 서비스를 납세로 뒷받침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본래의 기대는 자신이 탈세하더라도 남들이 납세하여 공공 서비스의 결손을 메워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식의 행위를 계속할 수가 없다. 자신이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은 곧 누구나 같은 행위를 해도 좋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이렇게 되고 보면, 남들은 그런 행위를 해도 되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하는 셈이 된다. 스스로 모순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불합리하다. 칸트에 따르면, 그래서 자신이 그런 식의 행위를 해서는 안 될 요건이 성립한다. 자신은 오직 보편법칙이 되는 방식으로만 행위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완전히 이성적으로 행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순에 빠지고 만다. 일종의 마술처럼 자신만을 예외의 자리에 올려놓고, 자신만이 세금을 내지 않을 이유가 있고 자신과 같은 상황에 있는 다른 사람은 그럴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꼴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