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무지의 역을 맡은 통치자와 이난나의 역할을 맡은 여사제

 

 

 

 

속세의 왕은 신성한 혼인을 하는 신년의식을 통해 여신의 매개자 신분을 획득했다. 우루크에서 이를 증명하는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신년의식에는 두무지의 역을 맡은 통치자와 이난나의 역할을 맡은 여사제가 등장한다. 의식이 어떻게 행해졌는지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는 우루크 왕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정결한 식물이 흩뿌려진 아름다운 침대에 이난나와 함께 누워…

해는 지지 않았으며 밤이 지나지도 않았도다.
짐은 열다섯 시간 동안 내리 이난나와 함께 누워 있었노라.

 

 

왕의 표현대로 끊임없이 사랑을 나눌 정도로 정력적인 여신은 사람들의 욕망을 각성시키고 곡식을 무르익게 하는 힘을 상징했다. 통치자가 “여신의 신성한 음부의 달콤함”을 즐기는 것은 수메르인에게 지극히 중요한 의식이었다. 그들은 이 신성한 결합을 통해서만 도시의 생존이 보장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두무지가 명계에서 이난나의 “영원한 젊음의 침대”로 돌아갔다는 건 새 계절이 시작하는 걸 의미했다.
수메르인은 설레는 봄의 전갈에 흠뻑 취한 채 새해맞이 축제를 벌인 것이다. <솔로몬의 노래>로 알려진 「아가서」 2장 17절에도 수메르인의 신년 축제를 연상케 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노래의 화자는 사랑하는 이에게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서” 자신을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처럼 나긋나긋하게 대해달라고 부탁한다. 이 짧은 사랑 시의 내용은 성스러운 결혼, 즉 수메르의 여신과 왕의 결혼식에 대한 묘사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하지만 <솔로몬의 노래>는 중동의 신화가 아니라 이집트 문명에서 영감을 받아 쓴 시라는 학설도 있다. 언제 누가 지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다. 이 노래가 성경에 편입된 시기는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우루크는 바빌로니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 무대이기도 하다.
길가메시는 수메르의 전설적인 왕으로 수메르어로는 빌가메스Bilgames이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우루크의 기틀을 닦은 군왕들의 무용담에 홀린 후대 바빌로니아 시인들의 작품이다. 트로이 전쟁 영웅들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가 기념비적인 서사시를 남겼듯 말이다. 음유시인들은 왕실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왕궁의 주인들은 대를 이어 수메르 영웅들의 서사시에 귀를 기울였다. 현존하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길가메시 설화 판본은 니네베의 아시리아 왕가 서고에서 발견되었다. 사실 수메르 문명이 기록문화를 확립한 때는 기원전 3000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당시 슐기 왕은 점토판에 기록을 남기는 필경 학교를 우르에 설립했다. 이 서사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1872년 대영박물관에서 가져온 니네베 출토 점토판을 해독한 조셉 스미스의 덕이다. 점토판을 훑어 본 스미스는 “모든 인류를 진흙으로 되돌린” 홍수에서 인간을 구한 우트나피스팀Utnapishtim을 방문한 길가메시의 이야기를 묘사한 대목에서 주인공의 이름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서구 각국에서 해독불가 문자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이는 니네베판 길가메시 서사시 전문의 해독으로 이어졌다. 길가메시의 조상인 우트나피스팀은 바빌로니아판 아트라하시스라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길가메시 서사시에 등장하는 현인으로 신화 속의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영생을 얻게 된 인물이다. 신들에게 영생을 하사받은 이 고결한 현자는 그를 찾을 능력이 있는 인간에게만 진실을 전해주려고 했다. 한편 친구 엔키두를 잃은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길가메시는 생과 사의 비밀을 캐기 위해 선조 우트나피스팀을 찾아 나선다. 비탄으로 정신이 마비된 나머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과 맞서기로 결심한 것이다. 우트나피스팀을 찾는 여정을 떠나기 전 통한에 사무친 초인 길가메시는 엔키두의 “시신 앞에서 울며 7일 밤낮을 지새운” 것도 모자라서 “시신의 한쪽 콧구멍에서 구더기가떨어질 때까지 시신을 매장하길 거부했다.”
길가메시는 우여곡절 끝에 우트나피스팀의 지하 저택에 다다른다. 그곳에서 길가메시를 기다린 건 “죽음은커녕 잠조차 이길 수 없다”는 우트나피스팀의 청천벽력 같은 답변뿐이었다.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저 시커먼 바다 밑에 잠겨 있는 ‘불로초’란 환상의 식물을 구하면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일한 방법이라곤 했지만 밑져야 본전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불로초를 손에 넣은 길가메시는 가뿐한 발걸음으로 우루크로 향했다. 금의환향 길에 긴장이 풀린 길가메시는 한적한 물웅덩이 부근에서 잠을 청한다. 순간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 버린다. 근사한 향기를 뽐내던 불로초가 그곳을 지나던 뱀의 입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횡재수가 터진 뱀은 허물을 벗고 젊음을 되찾았지만 길가메시에게 남은 건 “흙으로 돌아간 자들의 집”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일뿐이었다.
수메르인 하면 유사 이래 최고의 발명이라 할 수 있는 ‘쓰기 법’의 발명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이 천재적인 발명은 인류에게 많은 선물을 안겨주었다. 인구가 조밀한 도시 간 의사소통의 증진은 경제를 부강하게 만들었으며, 공신력 있는 자료의 보관도 용이해졌다. 또한 서면계약이 구두계약을 대체하게 되면서 상거래가 한층 빈번해졌다. 안전한 거래방식 덕에 새로운 무역로가 여럿 개척되었고 후대의 왕들도 이 무역로를 중시했다. 이 인류 최초의 문명에 대한 기록의 진정한 가치는 고대문명의 면면을 알려주는 자료들을 영구적인 매체에 기록했다는 데 있다. 수메르인의 기록이 없었다면 길가메시 서사시 같은 아름다운 고대의 신화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수메르인이 얼마나 사후의 세계에 깊이 심취해 있었는지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기원전 3000년경, 우루크의 수메르인은 수백 개의 그림문자와 숫자, 치수를 나타내는 기호들을 고안해냈다. 그들은 점토판에 갈대의 뾰족한 끝으로 이 문자와 기호들을 새겼다. 설형문자체계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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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건파 이슬람교” 를 자처하고 있다

 

 

 

 

2011년 초, 민중 봉기에 직면한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은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군대는 국가를 효과적으로 통제했고, 국내에서 공정한 선거가 치러지더라도 권력은 다수당을 차지할 가능성이 큰 무슬림 형제단에 돌아갈 것이라는 점은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집트가 그토록 고대했던 민주화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슬람주의식 통치는 권력을 공유하지 않고, 종교적인 전체주의가 세속 권위주의를 갈아치울 따름이다. 1928년에 당을 창건한 전임자들과는 달리, 오늘날의 무슬림 형제단은 그럴듯한 말로 민주정치를 운운하며 다양한 근대화라는 맥락에서 공생할 의지가 있는 “온건파 이슬람교” 를 자처하고 있다. 이것이 단순한 기만(이함) 전술일까, 아니면 새로운 사고방식을 대변하는 것일까? 무슬림 형제단의 어떤 행동을 보고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민주정치라는 시민 문화와 양립할 수 있겠다 싶은가? 정보에 정통하다면 터키 이슬람주의자들이 중동의 신오스만 지도부를 주장하면서, 점차 농도가 짙어지는 무슬림 형제단과 AKP의 커넥션을 눈치챘을 것이다. 무슬림형제단은 미국과 유럽을 비롯하여, 이집트 밖에서도 세력을 키워 명실상부한 다국적 조직으로 부상하고 있다.
최근, 어느 전문가 팀은 이 조직을 연구하여 『무슬림 형제단』이라는 제목으로 단행본을 출간했다.30 편집은 배리 루빈이 맡았다. 사례별 연구에서 저자들은 무슬림 형제단이 민주적인 조직체가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했다. 데이비드 리치는 영국에서 활동하는 조직을 연구하여 “타리크 라마단은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슬람주의 대변자 중 하나” 라고 주장했다. 라마단은 본토인 스위스에서는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지 못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고 그는 덧붙였다. 프랑스에서는 파리의 그랜드 모스크의 이슬람교 지도자(이맘) 달릴 부바커가 대표하는 강력한 진보주의 진영인 프랑스 이슬람교의 세력으로 현지에서도 성과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영국을 밟게 되는데, 리치에 따르면 영국에서는 “무슬림 형제단이 진보적인 민주정치와 대립되는 사상을 선전하며, 형제단의 이데올로기는 근본적인 진보 가치관을 거부했다” 32고 한다. (또 다른 저자인 아나 B. 소에지는 무슬림 형제단을 이끄는 유수프 알카라다위를 이슬람주의 소수집단의 “최고 이데올로기 가이드” 라고 불렀고, 폴 버먼은 라마단이 알카라다위를 숭앙한 점에서 그를 “라마단이 추앙한 영웅” 이라고 했다.) 라마단의 제도적 이슬람주의는 겉으로는 민주정치를 격찬하고 폭력을 금하겠다고 하나, 유럽에 진출하려는 그의 비전은 무슬림 이민자가 “진심으로 유럽 시민이 되어야 한다” 는 의미는 아니다. 라마단이 정말 원하는 것은 버먼이 지적했듯이, “서방 이슬람교의 이름으로 본연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서방세계와 대립하는 무슬림 문화” 였다. 진보주의 무슬림은 이 같은 모험에는 세력을 합류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는 이슬람주의화 정책과도 매우 흡사하다. 유럽을 이슬람주의로 만드느냐, 이슬람교를 유럽식으로 바꾸느냐의 두 가지 대안이 대립하고 있다면 무슬림 형제단을 유럽에까지 확산시킨 것은 전자에 해당될 것이다 .
혹자는 제도적 이슬람주의가 서유럽을 이슬람주의의 망명처로 취급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정작 이슬람세계에서는 취득할 수 없었던 시민권을 유럽에서 누리고 있다. 유럽 국가의 현장조사를 토대로 실시한 최근 연구에서 로렌조 비디노는 무슬림 형제단 조직체가 유럽에서 얻은 권력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했다. 그는 무슬림 형제단을 “그들의 번영을 허용한 그 자유를 되레 파괴하려는 능란한 사기조직” 으로 치부하며, 제도적 이슬람주의를 반박하는 논객들의 말을 인용했다. 비디
노는 이에 동감했으나 무슬림 형제단을 불법 조직으로 규정하려는 정책은 반대했다. 한편, 그의 연구 결과는 “새로운 서방 형제단New Western Brothers의 목표가 서방 조직체와의 대화에서 공개된 것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충분한 증거를 제기했다.” 반면, “비폭력 이슬람주의자들은 간과할 수 없는 실체” 였다. 그렇다면 민주정치는 이 같은 도전에 어떻게 응수해야 할까? 나는 민주정치를 지지하는 자라면 비폭력 이슬람주의자들의 사회참여 권리를 박탈하진 않는다는 비디노의 의견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참여와 위임의 차이는 이슬람세계에서나 유럽의 소수집단, 혹은 미국에서든, 민주국가가 제도적 이슬람주의에 대처할 방안을 짜낼 것이라면 꼭 감안해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식견은 무바라크가 축출된 이후의 이집트와 매우 관계가 깊다. 선거든, 다른 수단으로든 무슬림 형제단이 권력을 쥐게 된다면 이슬람주의 정권이 조성되거나, 인도네시아처럼 민간 이슬람교가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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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우리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을까?

 

 

 

 

급진주의 견해에 대한 두 번째와 세 번째 반론은 예컨대, 어떤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거나 연장하는 데 도움을 주려고 옥스팜에 돈을 기부하는 것과 내가 새 신발을 사는 것을 단순 비교할 일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두 번째 반론은 소유권의 개념을 이 토론에 끌어들이려 하고, 세 번째 반론은 못 본 체하는 잘못이 적극적인 악행과 같은지를 따지고 나온다. 이러한 반론들이 타당한지를 가리기 위해 먼저 그 바탕에 깔린 원칙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들이 과연 쓸모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앞 장에서 한 것처럼 이들이 몇 가지 문제 영역에서 모순 없이 고르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검토한다. 이제 낙태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기로 하자. 그 과정에서 2장에서 살펴본 인간 완성도의 기준과는 아무 상관없는 놀라운 사례를 만날 것이다. 이 사례는 두 번째와 세 번째 반론에 나타난 견해를 대변한다.
이 사례는 주디스 자비스 톰슨12의 「낙태를 옹호함A Defense of Abortion」이란 논문에 나온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바이올린 연주자와 등을 맞댄 채 누워있다. 의식을 잃었지만, 그는 아주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신장병으로 위중한 상태였는데, 음악사랑 모임의 회원들이 모든 의료 관련 자료를 훑어보며 그를 살릴 수 있는 혈액형을 가진 사람을 찾다가 오직 나뿐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간밤에 나를 납치하여 바이올린 연주자와 나의 순환계를 이어붙여 나의 신장으로 두 사람의 혈액을 정화할 수 있게 했다. 병원장이 말한다. “이봐요. 미안해요. 음악사랑 모임의 회원들이 이렇게 하라고 했어요. 미리 알았더라면 허락하지 않았을 거예요. 어쨌건 저 사람들 때문에 지금 바이올린 연주자는 당신과 이어져 있죠. 연결을 끊으면 이 사람은 죽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홉 달이면 되니까. 그때가 되면 이 사람은 나을 것이고 당신과의 연결을 끊어도 되죠.” 나는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할 도덕적 의무를 지고 있을까? 받아들인다면 나는 더없이 훌륭한 사람이다. 대단한 자비를 베푸는 일이다. 하지만 이를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까?
아홉 달이 아니고 아홉 해라면 어찌할까? 그보다 훨씬 더 오래간다면 어찌할까? 병원장이 또 이렇게 말한다. “참 불행한 일이네요. 인정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제 이 바이올린 연주자와 연결된 채 침대에 누워서 여생을 보내야 해요. 왜냐하면요, 이걸 기억 하세요. 모든 사람이 생명의 권리를 지니고 있는데, 바이올린 연주자도 사람이죠. 물론 당신의 몸 속에서나 당신의 몸에 대해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결정하는 건 당신의 권리지만, 당신의 그 권리보다는 생명의 권리가 우선이든요. 그래서 당신 맘대로 연결을 끊을 수 없어요.” 이에 이르면, 분노를 참을 수 없으리라.
톰슨은 이 논문에서 태아가 생명의 자유를 지닌 사람이란 이유로 낙태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생명의 권리가 있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용납될 수 없기에, 낙태 역시 허용될 수 없는 일로 간주할 만하다. 낙태는 생명의 권리가 있는 존재를 죽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낙태를 둘러싼 논의는 대체로 무엇이 우리에게 생명의 권리를 허용하는지, 그리고 태아는 이러한 권리를 지닐 만큼 발달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언제 그렇게 되는지 같은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톰슨은 이런 논의가 그릇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지적한다. 설령 태아에게 생명의 권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낙태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낙태와 상통하면서도 명백히 온전한 하나의 인간적 존재가 등장하는 사례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설정을 배경으로, 톰슨은 이 인간적 존재의 생존을 거부하는 것이 자신의 권리라고 부르짖는다. 도덕적으로 낙태를 용인해야 한다는 이 충격적인 주장은 앞서 언급된 급진주의 견해에 대한 반론과도 조화를 이룬다. 톰슨은 도움을 받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을 옳지 않은 행위라고는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주장에서 출발하여 낙태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낸다. 알고 보면 톰슨의 주장은 앞서 살펴본 첫 번째 반론과 일치한다. 둘 다 같은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자신이 번 돈을 자선을 위해 쓰기보다는 자신을 위해 쓰듯이, 자신이 희생하지 않으면 남이 죽는다 해도 상황에 따라서는 권리를 내세워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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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철蘇轍의 <상추밀한태위서上樞密韓太尉書>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며, 소순, 소식과 함께 삼소三蘇로 불리는 소철蘇轍(1039~1112)은 북송 미주眉州 미산眉山 사람으로 자는 자유子由 또는 동숙同叔이고, 호는 난성欒城 또는 영빈유로潁濱遺老이다. 소순蘇洵의 아들이고, 소식蘇軾의 동생이다. 인종仁宗 가우嘉祐 2년(1057) 19살 때 형 소식과 함께 진사시험에 급제하고 다시 제과制科에도 합격했다. 처음에 상주군사추관商州軍事推官이 되었다. 신종神宗 희녕熙寧 연간에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여 지방 관리로 좌천되어 하남추관河南推官으로 나갔다. 진주교관陳州敎官과 응천부첨서판관應天府簽書判官 등을 지냈다. 원풍元豊 중에 형 소식이 시 때문에 죄를 얻자 감균주염주세監筠州鹽酒稅로 폄적되었다.철종哲宗이 즉위하자 불려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이 되고, 우사간右司諫으로 옮겨 신당新黨의 채확蔡確과 장돈章惇 등을 탄핵했다. 어사중승御史中丞과 상서우승尙書右丞을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이 되었다. 그러나 소성紹聖 연간에 다시 신법당에 의해 뇌주雷州로 귀양갔다. 휘종徽宗 숭녕崇寧 중에 조청대부朝請大夫로 강등된 뒤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허주許州에서 저작에 몰두했다. 나중에 대중대부大中大夫로 치사致仕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시문 외에도 많은 고전의 주석서를 남겼다. 저서에『난성집欒城集』84권과『난성응조집欒城應詔集』,『시전집詩集傳』과『춘추집전春秋集傳』,『논어습유論語拾遺』,『맹자해孟子解』,『시경전詩經傳』,『도덕경해道德經解』,『춘추집해春秋集解』,『고사古史』등이 있다.

 

소철의 상추밀한태위서上樞密韓太尉書

 

 

轍生好爲文철생호위문: 저는 타고 난 성격이 글짓기를 좋아하여

思之至深사지지심: 거기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본 결과

以爲文者이위문자: 글 짓는 일이란

氣之所形기지소형: 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然文不可以學而能연문불가이학이능: 그런데 글이란 배움으로서 잘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나

氣可以養而致기가이양이치: 기란 보양함으로서 얻어질 수가 있습니다.

孟子曰맹자왈: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我善養吾浩然之氣아선양오호연지기: 나는 호연지기를 잘 보양한다고 하였습니다.

今觀其文章금관기문장: 지금 그 분의 문장을 볼 것 같으면

寬厚宏博관후굉박: 넓고도 두텁고 크고도 탁 트여서

充乎天地之間충호천지지간: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어

稱其氣之小大칭기기지소대: 그 분의 기의 크기와 어울리고 있습니다.

太史公行天下태사공행천하: 사마천은 천하를 여행하면서

周覽四海名山大川주람사해명산대천: 온 세상의 유명한 산과 큰 강물을 두루 구경하고

與燕趙間豪俊交遊여연조간호준교유: 연나라 조나라 지방의 호걸 명사들과 교유하였습니다.

故其文疏蕩고기문소탕: 그러므로 그의 글은 거리낌이 없고

頗有奇氣파유기기: 매우 특이한 기운이 있습니다.

此二子者차이자자: 이들 두 분은

豈嘗執筆기상집필: 어찌 일직이 붓을 들고

學爲如此之文哉학위여차지문재: 이러한 글을 짓는 일을 배운 일이 있겠습니까?

其氣充乎其中기기충호기중: 그분들의 기가 그분들 속에 가득 차서

而溢乎其貌이일호기모: 그분들 외모로 넘쳐흐르며

動乎其言而見乎其文동호기언이견호기문: 그분들 말 속에 움직이고 그분들 글 속에 드러나는 것인데

而不自知也이불자지야: 그분들 자신은 알지도 못하고 있는 일입니다.

轍生十有九年矣철생십유구년의): 저는 나이 열아홉 살입니다.

其所居家與遊者기소거가여유자: 집에 살아오면서 함께 교유한 사람들이란

不過其鄰里鄕黨之人불과기린리향당지인: 불과 이웃 마을 한 고장 사람들이고

所見不過數百里之間소견불과수백리지간: 본 것이란 불과 수백 리 사이입니다.

無高山大野可登覽以自廣무고산대야가등람이자광: 올라가고 구경함으로서 스스로를 넓힐만한 높은 산과 큰 들도 없습니다.

百氏之書백씨지서: 제자백가들의 책을

雖無所不讀수무소불독: 비록 읽지 않은 것이 없다고는 하더라도

然皆古人之陣迹연개고인지진적: 모두가 옛 사람들의 낡은 발자취에 지나지 않아

不足激發其志氣불족격발기지기: 저의 뜻과 기를 격발시키기에는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恐遂汨沒공수골몰: 마침내는 저의 뜻과 기가 없어져 버리고 말까 두려워서

故決然捨去고결연사거: 결연히 고향을 버리고

求天下之奇聞壯觀구천하지기문장관: 천하의 특이한 견문과 장관을 찾아 나섬으로써

以知天地之廣大이지천지지광대: 천지의 광대함을 알려 하게 되었습니다.

過秦漢之故都과진한지고도: 진나라와 한나라의 옛 도읍을 찾아가서는

恣觀終南嵩華之高자관종남숭화지고: 종남산과 숭산과 화산의 높은 모습을 실컷 구경하였고

北顧黃河之奔流북고황하지분류: 북쪽으로는 황하의 세찬 흐름을 둘러보면서

慨然想見古人之豪傑개연상견고인지호걸: 옛날의 호걸들은 감개 속에 생각하여 보았으며

至京師지경사: 서울 변경에 이르러

仰觀天子宮闕之壯앙관천자궁궐지장: 천자의 궁궐의 장대함과

與倉廩府庫여창름부고: 곡식 창고 재물과

城池苑囿之富且大也성지원유지부차대야: 무기창고 및 성과 해자, 숲과 호수의 풍부하고도 광대함을 우러러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而後知天下之巨麗이후지천하지거려: 그런 뒤에야 천하의 광대하고 장대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見翰林歐陽公견한림구양공: 한림 구양공을 뵈어

聽其議論之宏辨청기의론지굉변: 그분 이론의 광대한 논리를 듣고

觀其容貌之秀偉관기용모지수위: 그분 용모의 빼어나고 위대함을 본 뒤

與其門人賢士大夫遊而後여기문인현사대부유이후: 그분 문인들인 현명한 사대부들과 교유한 뒤에야

知天下之文章지천하지문장: 천하의 문장이

聚乎此也취호차야: 모두 여기에 모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太尉以才略태위이재략: 태위께서는 재능과 지략에 있어서

冠天下관천하: 천하의 으뜸이 되시어

天下之所恃以無憂천하지소시이무우: 온 천하가 의지하고 걱정하지 않을 수 있고

四夷之所憚사이지소탄: 또 사방의 오랑캐들이 꺼리어

而不敢發이불감발: 감히 싸움을 걸지 못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入則周公召公입칙주공소공: 나라 안으로 들어와서는 천하를 평화롭게 한 주나라 무왕 때의 주공과 소공 같이 하시고

出則方叔召虎출칙방숙소호: 나라 밖으로 나가셔는 주 선왕 때 넓은 땅을 경략한 방숙과 소호처럼 활동하셨습니다.

而轍也未之見焉이철야미지견언: 그러나 저는 아직도 뵙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且夫人之學也차부인지학야: 또한 사람이 학문을 함에 있어서

不志其大불지기대: 그의 뜻이 크지 않다면

雖多而奚爲수다이해위: 비록 많이 배운다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轍之來也철지래야: 저는 고향을 떠나와

於山見終南嵩華之高어산견종남숭화지고: 산에 있어서는 종남산, 숭산, 화산의 거대함을 보았고

於水見黃河之大且深어수견황하지대차심: 강물에 있어서는 황하의 광대하고도 깊음을 보았고

於人見歐陽公어인견구양공: 사람에 있어서는 구양공를 뵈었지만

而猶以未見太尉也이유이미견태위야: 아직 태위님은 뵙지 못하였음을 유감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故願得觀賢人之光耀고원득관현인지광요: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의 광채를 뵙고

聞一言以自壯문일언이자장: 한 말씀 들음으로서 스스로를 장대하게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然後可以盡天下之大觀연후가이진천하지대관: 그런 뒤에야 천하의 위대한 경관을 다 구경함으로써

而無憾者矣이무감자의: 유감이 없게 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轍年少철연소: 저는 나이가 적어

未能通習吏事미능통습리사: 아직도 관청의 일을 다 익히지 못하였습니다.

嚮之來향지래: 전에 고향을 떠나왔던 것은

非有取於升斗之祿비유취어승두지록: 몇 말의 녹을 받으려는 목적이 아니었으나

偶然得之우연득지: 우연히 녹을 받게 된 것이어서

非其所樂비기소락: 그것을 즐거워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然幸得賜歸待選연행득사귀대선: 그러나 다행히도 고양으로 돌아가 다시 벼슬자리에 뽑히기를 기다릴 수 있는 허락을 받아

使得優游數年之間사득우유수년지간: 몇 년 동안 여유 있게 지내면서

將以益治其文장이익치기문: 저의 글을 더욱 닦고

且學爲政차학위정: 또 정사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太尉苟以爲可敎태위구이위가교: 태위께서 진실로 가르칠만한 상대라고 여기시고

而辱敎之이욕교지: 욕되이도 저를 가르쳐만 주신다면

又幸矣우행의: 더욱 다행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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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귀 행법

 

1. 눈을 감고 꿇어앉아 입으로 천천히 숨을 쉰다.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쉰 뒤 오른손으로 코를 쥐고 콧구멍을 막는다. 코를 쥔 채로 눈동자만 왼쪽으로 가져갔다가 오른쪽으로 가져간다. 이때 시야가 흐려지고 눈물이 나올 만큼 세차게 움직이도록 한다. 눈동자를 좌우로 가져가는 시간은 숨을 멈추고 있는 시간의 절반씩이다. 숨이 차면 코에서 손을 떼고 입으로 크게 숨을 내쉰다.

특별한 병이 없는 데에도 귀가 쇠약해짐을 느낀다면 몸 전체의 노화도 상당히 진전되어 있는 상태이다. 거꾸로 말하면 귀가 먹을 때까지 몸의 노화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젊어서부터 몸이 건강하여 이상적으로 나이를 먹어온 것이다.

다른 감각기관에 비해 일찍부터 귀의 노화가 시작된 사람은 신장이 약해진 것이다. 귀에는 200개의 경혈이 모여 있다. 특히 신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귀가 약한 사람은 신장 행법도 함께 하는 것이 좋다.

귀 행법은 이명(귀울음)을 고치는 동시에 병으로 한때 잘 안 들리던 귀도 잘 들리게 하는 효과가 있다. 또한 감기 등으로 생긴 두통을 치료한다.

 

2. 다리를 쭉 펴고 앉아서 검지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 사리에 귓바퀴를 끼고 아래위로 귀언저리를 마찰한다. 이렇게 상하왕복을 18회 반복한다. 귀언저리를 마찰할 때 귓바퀴만이 아니라 귀언저리의 피부도 마찰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귀와 귀언저리 전체의 기혈 흐름이 좋아진다. 다음으로 양 검지손가락을 귓구멍에 넣고 약간 힘을 주어 누른다. 2-3초쯤 있다가 두 손가락을 동시에 뺀다. 이것을 3회 반복한다. 이대 가능하면 펑 하는 소리가 나도록 하면 귀가 시원해진다.

이것은 귀울음을 고치는 행법이다. 귀언저리를 며칠 동안 계속 마찰하다보면 피부가 벌겋게 되면서 아플 수도 있는데, 그 부분이 쇠약해진 탓이다. 잠시 쉬었다 하면 마찰의 효과도 나타나고 약해졌던 피부가 튼튼해지면서 통증도 사라진다. 또한 귓병은 축농증과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코 행법을 함께 실시하라.

이명의 원인은 오랫동안 귀의 손질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다. 귀언저리를 청소하거나 귀를 늘 깨끗이 씻는 것만으로 손질을 깨끗이 했다고 볼 수 없다. 귓속에서 쇳소리가 난다든지 매미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늘 들리는 증상은 귀에 쌓인 사기를 완전히 몰아내고 기혈의 정체를 해소하지 않는 한 완치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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