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무지의 역을 맡은 통치자와 이난나의 역할을 맡은 여사제

 

 

 

 

속세의 왕은 신성한 혼인을 하는 신년의식을 통해 여신의 매개자 신분을 획득했다. 우루크에서 이를 증명하는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신년의식에는 두무지의 역을 맡은 통치자와 이난나의 역할을 맡은 여사제가 등장한다. 의식이 어떻게 행해졌는지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는 우루크 왕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정결한 식물이 흩뿌려진 아름다운 침대에 이난나와 함께 누워…

해는 지지 않았으며 밤이 지나지도 않았도다.
짐은 열다섯 시간 동안 내리 이난나와 함께 누워 있었노라.

 

 

왕의 표현대로 끊임없이 사랑을 나눌 정도로 정력적인 여신은 사람들의 욕망을 각성시키고 곡식을 무르익게 하는 힘을 상징했다. 통치자가 “여신의 신성한 음부의 달콤함”을 즐기는 것은 수메르인에게 지극히 중요한 의식이었다. 그들은 이 신성한 결합을 통해서만 도시의 생존이 보장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두무지가 명계에서 이난나의 “영원한 젊음의 침대”로 돌아갔다는 건 새 계절이 시작하는 걸 의미했다.
수메르인은 설레는 봄의 전갈에 흠뻑 취한 채 새해맞이 축제를 벌인 것이다. <솔로몬의 노래>로 알려진 「아가서」 2장 17절에도 수메르인의 신년 축제를 연상케 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노래의 화자는 사랑하는 이에게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서” 자신을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처럼 나긋나긋하게 대해달라고 부탁한다. 이 짧은 사랑 시의 내용은 성스러운 결혼, 즉 수메르의 여신과 왕의 결혼식에 대한 묘사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하지만 <솔로몬의 노래>는 중동의 신화가 아니라 이집트 문명에서 영감을 받아 쓴 시라는 학설도 있다. 언제 누가 지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다. 이 노래가 성경에 편입된 시기는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우루크는 바빌로니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 무대이기도 하다.
길가메시는 수메르의 전설적인 왕으로 수메르어로는 빌가메스Bilgames이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우루크의 기틀을 닦은 군왕들의 무용담에 홀린 후대 바빌로니아 시인들의 작품이다. 트로이 전쟁 영웅들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가 기념비적인 서사시를 남겼듯 말이다. 음유시인들은 왕실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왕궁의 주인들은 대를 이어 수메르 영웅들의 서사시에 귀를 기울였다. 현존하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길가메시 설화 판본은 니네베의 아시리아 왕가 서고에서 발견되었다. 사실 수메르 문명이 기록문화를 확립한 때는 기원전 3000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당시 슐기 왕은 점토판에 기록을 남기는 필경 학교를 우르에 설립했다. 이 서사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1872년 대영박물관에서 가져온 니네베 출토 점토판을 해독한 조셉 스미스의 덕이다. 점토판을 훑어 본 스미스는 “모든 인류를 진흙으로 되돌린” 홍수에서 인간을 구한 우트나피스팀Utnapishtim을 방문한 길가메시의 이야기를 묘사한 대목에서 주인공의 이름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서구 각국에서 해독불가 문자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이는 니네베판 길가메시 서사시 전문의 해독으로 이어졌다. 길가메시의 조상인 우트나피스팀은 바빌로니아판 아트라하시스라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길가메시 서사시에 등장하는 현인으로 신화 속의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영생을 얻게 된 인물이다. 신들에게 영생을 하사받은 이 고결한 현자는 그를 찾을 능력이 있는 인간에게만 진실을 전해주려고 했다. 한편 친구 엔키두를 잃은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길가메시는 생과 사의 비밀을 캐기 위해 선조 우트나피스팀을 찾아 나선다. 비탄으로 정신이 마비된 나머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과 맞서기로 결심한 것이다. 우트나피스팀을 찾는 여정을 떠나기 전 통한에 사무친 초인 길가메시는 엔키두의 “시신 앞에서 울며 7일 밤낮을 지새운” 것도 모자라서 “시신의 한쪽 콧구멍에서 구더기가떨어질 때까지 시신을 매장하길 거부했다.”
길가메시는 우여곡절 끝에 우트나피스팀의 지하 저택에 다다른다. 그곳에서 길가메시를 기다린 건 “죽음은커녕 잠조차 이길 수 없다”는 우트나피스팀의 청천벽력 같은 답변뿐이었다.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저 시커먼 바다 밑에 잠겨 있는 ‘불로초’란 환상의 식물을 구하면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일한 방법이라곤 했지만 밑져야 본전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불로초를 손에 넣은 길가메시는 가뿐한 발걸음으로 우루크로 향했다. 금의환향 길에 긴장이 풀린 길가메시는 한적한 물웅덩이 부근에서 잠을 청한다. 순간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 버린다. 근사한 향기를 뽐내던 불로초가 그곳을 지나던 뱀의 입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횡재수가 터진 뱀은 허물을 벗고 젊음을 되찾았지만 길가메시에게 남은 건 “흙으로 돌아간 자들의 집”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일뿐이었다.
수메르인 하면 유사 이래 최고의 발명이라 할 수 있는 ‘쓰기 법’의 발명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이 천재적인 발명은 인류에게 많은 선물을 안겨주었다. 인구가 조밀한 도시 간 의사소통의 증진은 경제를 부강하게 만들었으며, 공신력 있는 자료의 보관도 용이해졌다. 또한 서면계약이 구두계약을 대체하게 되면서 상거래가 한층 빈번해졌다. 안전한 거래방식 덕에 새로운 무역로가 여럿 개척되었고 후대의 왕들도 이 무역로를 중시했다. 이 인류 최초의 문명에 대한 기록의 진정한 가치는 고대문명의 면면을 알려주는 자료들을 영구적인 매체에 기록했다는 데 있다. 수메르인의 기록이 없었다면 길가메시 서사시 같은 아름다운 고대의 신화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수메르인이 얼마나 사후의 세계에 깊이 심취해 있었는지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기원전 3000년경, 우루크의 수메르인은 수백 개의 그림문자와 숫자, 치수를 나타내는 기호들을 고안해냈다. 그들은 점토판에 갈대의 뾰족한 끝으로 이 문자와 기호들을 새겼다. 설형문자체계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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