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우주적 상상력의 선지자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지금까지 키슬러의 사상과 활동을 개요를 통해 정리해보았다.
그러나 키슬러에게는 이상에서 논고한 내용을 넘어서는 보다 큰 특징이 있다.
결론부터 말해서 키슬러는 20세기라는 시대적 제약을 넘어서는 인물이었다.
20세기 미술을 특징짓는 성격 중의 하나로 이른바 국제성 또는 보편적인 원리의 탐구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서구를 중심으로 전개된 예술체계가 주변의 사회적 문화적 후진지역과의 접촉에 의해 중심을 상실한 채 있었던 탓에, 또는 그 파급효과의 하나로 나타난 것이다.
예를 들어 19세기의 전통을 20세기에 연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상징주의(Symbolism)로부터 아르누보(Art Nouveau)에 이르는 시대에 유럽의 예술이 범유럽 또는 범세계적인 문화적 혼효(混淆)양상을 보인 적이 있다.
이때 전통에 뿌리를 두는 도상(icon)이나 장식 등이 체계적인 통일성을 잃고 뒤섞이는 양상을 띠게 된다.
상징주의에서 아르누보로 옮겨가는 시기에 해당하는 이때 두 개의 커다란 문화적 동향이 오버랩되고 있었다.
주로 비유럽권에서 일어난 움직임인데, 하나는 야성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표현주의, 아프리카의 미개예술, 원시적 축제를 연상시키는 러시아 발레 등이 그것이다.
이것이 야수파를 낳았다.
다른 하나는 문화적 후진지역에 발생한 것으로 기계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문화적 후진지역에서 발생한 이 같은 동향은 기술문명에의 동경과 욕구가 반영된 것으로, 기계의 찬미와 기계적 예술 또는 예술의 기계화를 낳았다.
이것이 미래파, 러시아 구성주의, 바우하우스, 데 스틸 등을 낳은 모체가 되었다.
그런데 언뜻 전혀 무관하게 보이는 야성적 동향과 기계적 동향은 사실은 부르주아 성향의 성숙된 문화에 대한 안티테제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특히 구성주의와 데 스틸, 그리고 바우하우스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시작된 유럽의 해체와 새로운 질서에 대한 바램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것들은 국가나 민족의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고, 개인주의적인 예술표현을 부정하였으며, 보다 보편적인 가치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기계적 동향은 추상적 조형원리에 입각한 새로운 생활환경을 창출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몬드리안이 우주적 균형의 원리를 추구했다면, 키슬러는 ‘엔드리스’와 ‘갤럭시’를 낳았다.
물론 국제양식도 같은 원리를 추구한 결과물이다.
기계적 동향은 기계를 맹목적으로 찬미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적어도 나름대로의 의식을 지니고 있던 예술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눈앞에 두고 기계가 지니는 엄청난 파괴력을 우려했다.
기계기술에 대한 정직하면서도 직접적인 반항은 다다(Dada)을 통해 나타났는데, 이 같은 경향은 결국 기계와의 아이러니컬한 동거를 거쳐 초현실주의으로 바뀌게 된다.
반면 바우하우스에서 발생한 새로운 디자인 이론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의 실험기를 마치고 퇴색되기 시작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더불어 기계적 동향은 나치의 프로파간다에 흡수되어 유럽에서는 실용화될 수 있는 찬스를 잃게 된 것이다.
기계적 동향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을 중심으로 비행기, 군함, 철도, 자동차 등의 디자인에 반영되면서 전 세계에 보급된다.
한편 기계미에 대한 관심은 무용이나 연기, 서커스, 체조 등의 신체표현영역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메이어홀드의 바이오메카닉 체조(Bio-mechanical Exercises)와 슐렘머의 기계적 발레(Mechanical Ballet)가 대표적인 예라 하겠는데, 여기서 우리는 인체의 운동을 기계적 보편성에 입각해 파악하고자 했던 욕구를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인체의 기계적 움직임 또는 집단적인 획일성(uniformity)은 나치의 데몬스트레이션에도 어김없이 적용되고 있다.
인간의 이 같은 집단적인 기계미는 아직까지도 남아 있어서 올림픽 개폐막식 등에서 종종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