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로운 <발레 메카닉>의 발견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1977년 10월 하순 뉴욕의 키슬러 부인 릴리안으로부터 소포가 도착했다.
열어보니 『전위영화 보관 프로그램』 도록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10월 19일 밤에 열린 것으로, 페르낭 레제, 닷드레이 머피, 월터 루트만, 조셉 코넬, 마야 대렌, 알프렛 레슬리 등 6명이 만든 영화의 상연을 소개하고 있었다.
부제는 ‘프레데릭 키슬러에게 바치는 밤’으로 되어 있다.
주최는 조나스 메카스가 이끄는 필름 자료보관소(Anthology Film Archives)였다.2)


왜 여기에 키슬러의 이름이 실려 있는지 생각하면서 도록을 펼쳐보았다.
이 프로그램에 실려 있는 레제의 <발레 메카닉 Ballet m럄anique>과 랏드맨의 <엑셀시오 라이판>이 새로 발견된 필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이 기사를 읽어보니 이 필름들을 발견하게 된 동기를 제공한 것이 필자인 듯하다.


1975년 11월 필름이 ‘구조’되었다. 릴리안 키슬러가 그녀의 집에 잠들어 있던 레제의 <발레 메카닉>과 랏드맨의 <엑셀시오 라이판>을 발견한 것이다.


1975년 11월 중순 일본의 디자이너이며 문필가인 야마구치 가쓰히로가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당시 이미 세상을 등진 남편 프레데릭 키슬러에 관해서 잡지 『미술수첩』에 15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1


그는 그날의 방문에 말을 더듬을 정도로 흥분되어 있었다.
그의 팔에는 레제의 단채화(單彩畵)가 그려져 있는 스타디쉬 D. 로더의 『입체주의자 영화』(1975)가 들려 있었다.2


필자는 그날 뉴욕 근대미술관의 서점에 들러 이 책을 발견했다.
무심코 펼쳐보니 키슬러의 (1923) 무대디자인 사진이 실려 있어서 읽어보니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레제가 디자인한 영화 <무정한 여자 L’inhumaine>(1924)는 키슬러의 영향을, 프란츠 랭의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1927)는 레제의 영향을 받고 있음에 틀림없다.3


이것을 보고 키슬러 부인을 방문했을 때 이 책을 보여 주었다.
갓 출판되었으므로 부인은 그 책을 알지 못했다.
짐짓 놀라면서 앞서 인용한 부분을 읽어보았으나, 연재를 위한 사진과 그 밖의 자료 선택에 시간이 흘러 그 책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도록에서 키슬러 부인은 다음과 같이 계속하고 있다.


야마구치의 의도는 로더의 언급을 근거로 키슬러가 전위영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같은 지적은 우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애석하게도 야마구치는 곧 돌아갔다. 나도 책 전체를 읽어 볼 시간이 없었다.


오랜 뒤에 야마구치는 키슬러가 필름을 새로운 환경을 창출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고 논한 바 있다.


나는 야마구치가 들고온 『입체주의자 영화』의 표지그림이 레제의 <발레 메카닉>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나는 뉴욕 근대미술관 서점에 달려갔다.
드디어 이 신비스러운 책이 내 손에 들어왔다.4


벽장 안에서 레제의 <발레 메카닉>과 랏드맨의 <엑셀시오 라이판> 필름을 찾아내게 된 동기는 야마구치의 방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입체주의자 영화』를 읽으면서 마치 열병에라도 걸린 듯 밤을 새웠다.
자칫하면 필름 3통이 깊고 어두운 다락 안에서 사장될 뻔했던 것이다.
후에 벽장 안에는 비킹 에겔링의 <대각선 교향곡>과 한스 리히터의 <리듬 21>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쨌든 이 책에 실려 있는,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레제의 단채화가 다락 안의 골동품과도 같은 필름과 관계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키슬러는 뉴욕에 올 때(1926) 3개의 대단히 중요한 물품을 가지고 왔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월터 루트만의 장미빛 책 『풀잎』과 에드워드 고든 크레이그의 『프롤레타린 저널』의 카피, 그리고 레제의 <발레 메카닉> 프린트가 그것이다.
그는 이것들이 자신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준 것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런저런 일들을 나는 마치 스톱모션과도 같이 단편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모든 것이 연결되었다. 밤새도록 나는 테이프가 붙어 있는 통을 찾기 위해 벽장을 들락거렸다.
그리고 왠지 그것을 혼자서 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5


대단히 흥분해 있던 나는 도저히 필름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새벽에 마리에드 샬튼을 불러냈다.
그녀는 곧 도착했다.
우리는 벽장에 있는 무거운 통을 간신히 꺼내 둥근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리고 그 통 위에서 키슬러가 또박또박 적어놓은 ‘LEGER, RUTTMANN’이라는 글씨를 발견했다.
마리에드가 신중하게 테이프를 떼 냈다.
통에서 몇 개의 필름을 꺼내보면서 우리는 ‘필름자료보관소‘의 조나스 메카스를 부르기로 했다.
그는 전위영화를 살려내기 위하여 영웅적인 봉사정신을 발휘하고 있었다.
조나스가 왔다.
그리고 필름을 보았다.
이것으로 영화사의 한 페이지가 다시 기록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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