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개요Ⅳ - 키슬러에게 ‘수용자의 주체성’이란 무엇이었는가?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키슬러는 건축이든, 디자인이든, 조각이든 제작자의 사고방식을 수용자에게 강요하지 않고 사용자, 수용자, 보는 사람들의 입장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수용자의 마음에서 발생하는 이미지네이션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이 될 수 있다고까지 생각했다.
이같이 수용자의 입장을 우선 고려하는 태도는 ‘손님은 왕이다’라는 식의 수용자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이나 아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근대기능주의와 같이 기능성의 추구를 명목으로 수용자를 획일적인 틀에 끼워 맞추는 것과도 다르다.


근대개인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거의 대부분의 예술은 자신의 영역이 최고의 미를 창출한다고 믿어왔다.
나아가 ‘예술을 위한 예술’의 논리와 결탁해 대중을 멸시해왔다.
여기서 말하는 대중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수용자 측의 개성을 무시한 것이다.
지난 동안 많은 예술가들이 대중에게 예술을 근접시킨다는 명목으로 필요 이상으로 큰 전람회를 기획하고, 카탈로그를 대량으로 제작했으며, 때에 따라서는 판화와 같은 복제방법을 이용하기도 했다.
미술이 작품이라는 절대적인 틀에서 벗어나 해프닝이나 이벤트 등과 같이 관객의 참여를 고려하게 된 것은 겨우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이다.
그러나 키슬러는 1930년대에 이미 수용자의 입장을 고려한 작업을 선보였다.
그 대표적인 디자인이 1942년에 결실을 본 ‘금세기 예술’ 화랑의 전시공간설계이다.
그는 여기에서 회화작품을 에워싸고 있는 액자를 떼 내고 작품을 뒤쪽 벽으로부터 떨어뜨려 작품을 공간상에 독립시켰다.
또한 회화작품은 벽으로부터 튀어나와 있는 각목에 의해 지지되고 조명이나 관객이 보는 위치에 따라 지지대의 각도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각각의 작품을 구별하여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관객의 손에 수평과 수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회화 감상용 프레임을 쥐어주는 것을 생각했다.
회화로부터 액자를 떼 내는 대신에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프레임을 준 것이다.


같은 종류의 발상으로 감상자의 피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벽면, 작품, 감상자의 상호관계를 보다 적극적으로 의식하면 다양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작품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움직이지 않은 채 보든 보면서 걸어가든 몸이 피로를 느껴서는 안 된다. 작품을 앞에 두고 앉기도 하고 몸을 비틀기도 할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가벼운 마음으로 옆으로 누울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 저런 이유에서 나는 그 같은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일종의 의자와 같은 형태를 개발했다.
<프리-포름 Free-Form>이 바로 그것이다.3


<프리-포름>을 디자인해놓고 보니 애초에 예상했던 것 이상의 기능이 새롭게 발견되었다.
결국 이 형태에는 18개의 각각 다른 기능이 있음을 알게 되는데, 이같이 다양한 기능은 <프리-포름> 형태 안에 이미 잠재되어 있던 것이다.
곡면으로 된 인체처럼 연속적인 장력에 의해 만들어진 <프리-포름>의 유연한 형태가 18가지의 다양한 기능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프리-포름>은 미술관이 안고 있는 보편적인 문제인 관객의 피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이며, 동시에 인간의 신체적 조건에 적합한 형태를 띠고 있어서 마치 살아 숨 쉬듯 스스로의 기능을 확장시켜나간 것이다.
이 <프리-포름> 디자인이야말로 미술관을 방문하는 관객의 입장을 반영한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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