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슬러는 주택을 폐쇄적인 에코시스템의 하나로 인식했다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키슬러의 작업 중 수용자의 입장이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으로는 역시 <엔드리스 하우스>이다.
<엔드리스 하우스>는 사용자의 일상생활을 디자인 대상으로 삼고 있다.
또한 개인보다는 가족 단위의 집단을 대상으로 한다.
프라이버시 문제도 적극 고려되었는데, 가족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와 가족 구성원 중 어느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 모두를 충족시키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프라이버시 문제는 단지 공간적인 격리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집 밖에서의 활동을 통해 방출된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또한 개인 공간 이외에 가족 간의 공동생활을 위한 공간도 필요하다.
이 같은 요구는 종래의 주택설계에도 있었으나, 대부분 건축가의 전문성에 해결의 열쇠를 찾는 경우가 많아서 사용자 측의 생활방식은 그다지 고려하지 않았다.
물론 주택에 관한 키슬러의 생각이 이 같은 가족단위의 생활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계절의 변화, 빛과 그림자의 변화, 야간조명, 온도조절, 환기의 문제 등 다양한 환경조건에 관해서도 세심하게 배려했다.
키슬러는 주택을 폐쇄적인 에코시스템(ecosystem)의 하나로 인식했다.
뿐만 아니라 목욕시설과 난로 등의 설비도 건강과 위생상 필요한 조건을 고려해서 계획되었으며, 동시에 정신적 기능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용자에 대한 키슬러의 관심은 일상생활의 한 부분에 국한된 개별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라, 인간생활의 전부를 대상으로 한다.
인간의 잠재적인 힘은 살아가면서 여러 방향으로 파급될 가능성을 갖고 있어서 언제라도 그것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키슬러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이같이 다양한 요구 중에서 어느 하나만 잘라내어 해결하는 것으로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전문가를 지향하는 20세기의 나쁜 풍조라고 할 수 있다.
키슬러의 철학은 이 같은 풍조를 마감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키슬러 혼자의 힘만으로 20세기의 주된 조류라 할 수 있는 이 엄청난 흐름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키슬러의 사후인 19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고도로 발전한 도시기술문명이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만 것이다.
그리고 환경파괴와 에너지 자원의 한계가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환경개발이 생태계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생활이나 문화적 측면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기계기술문명을 비판했던 키슬러의 주장이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시작했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사용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키슬러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이제야 겨우 키슬러가 추구했던 시대의 입구에 도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