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엔드리스 하우스> 최종안의 목적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그런데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전시된 <엔드리스 하우스> 최종안은 1950년에 발표된 것보다 복잡한 곡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의 <엔드리스 하우스>는 둥근 빵을 위 아래로 누른 듯한 평평한 타원형이었는데, 이번에는 깨진 달걀껍질을 모아놓은 듯한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실내공간의 활용에 있어서도 첫 번째 것은 기본안을 드로잉으로 보여주는 정도에 머물렀던 데 반해, 이번 작품은 정확한 기본 설계도를 통해 실내공간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키슬러는 최종안의 발표를 통해 <엔드리스 하우스>가 단지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화할 수 있는 주택의 구체적인 제안이라는 사실을 입증한 셈이다.
최종안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대단히 흥미로운 주제에 부딪치게 된다.
“모형이 먼저인가? 도면이 먼저인가?”라는 모형과 도면의 전후관계가 그것이다.
일반적인 건축의 경우 기본적인 구상에 기초한 도면을 근거로 제1차 모형이 제작되는 것이 통례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좀더 구체적인 기본설계에 따라 모형이 제작된다.
다시 말하면 도면이 우선하며 그것을 입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모형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키슬러의 <엔드리스 하우스> 최종안은 분명 모형이 먼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모형을 살펴보면 그려진 형태의 이미지를 정확하게 재현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컨셉트 드로잉과 같은 수법에 의해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철망을 손으로 구부려가면서 어떤 형태를 만들어 본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그 같은 유동적인 형태를 유추해내는 데는 철망을 구부리는 손의 자발적인 반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3)
키슬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철망을 구부리는 과정 자체가 일종의 ‘공간적 드로잉’과 같은 것으로 형태도 이 과정에서 결정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최종안을 위해 제작된 입체적 형태의 모형은 ‘엔드리스’라는 개념에 입각한 ‘공간적 드로잉’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서 이 모형은 <엔드리스 하우스>의 축척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모형을 확대하면 도면을 제작할 수 있다.
이 도면에 따라 시공하면 되는 것이다. 이같이 <엔드리스 하우스> 최종안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모형과는 다르다.
이 모형은 ‘실체화된 이미지의 핵’이라 불러 마땅하다.
만약 우리 주위에서 이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을 찾는다면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예술작품’이라 부르는 것에 해당한다.
키슬러는 <엔드리스 하우스>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비유했는데, 이것은 단순한 비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와 같이 무한하다. 시작도 끝도 없다.
나의 <엔드리스 하우스>는 예각을 지닌 남성적 건축이라기보다는 감각적인 곡선으로 된 여성의 육체에 가깝다.7
키슬러는 공간을 기능적으로 분석하여 각각의 기능을 다시 모으는 기능주의 건축과는 다른 세계를 추구했다.
그는 인간의 삶을 중심에 두고 미와 관능을 포함하는 인간생활 자체를 위한 공간을 꿈꾸었다.
<엔드리스 하우스>는 조각적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 다시 말하면 예술 속의 삶을 추구한 결과물이었다.
주거공간에 관한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엔드리스 하우스>의 중심 테마였던 것이다.
부정형으로 된 <엔드리스 하우스>는 그저 ‘내키는 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인간생활의 스케일에 따라 엄격하게 계산된 구성방식에 따른 것이다.
<엔드리스 하우스>는 건물설계의 일반적인 기준이나 ‘내키는 대로’의 장식적인 취향에 따른 유행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프로세스에 따라 정해진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8
자연은 인간을 창조했다. 예술은 삶을 만들어낸다.
<엔드리스 하우스>에서 산다는 것은 충실한 삶을 영위한다는 것과 같다.
여기서 말하는 충실한 삶이란 단지 먹고 살기 위한 삶이 아니며, 뻔한 사회적 의무를 위한 것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계절의 변화, 자동으로 교대되는 낮과 밤, 또는 대낮의 태양과 한밤중의 달 등과 같이 ‘당연하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엔드리스 하우스>는 돈이 많거나 돈이 많은 척하는 사람들의 표준적인 거주지 이상의 것이 될 수도 있고 이하의 것이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산업,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전제로, 먹는 것, 자는 것, 성행위 등 인간의 기본욕구에 주목하면 보다 이하의 것이 될 수도 있다.
<엔드리스 하우스>는 ‘생활’이라는 인간 활동을 돕는 기계적인 수단으로서의 역할에 목적을 두고 있지 않으며, 생산기술에 근거를 두고 유추된 결과물도 아니다.
필요에 따라 그것을 사용할 수는 있으나 산업이 휘두르는 독재의 노예는 결코 아니다.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