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리아는 메디아인과 바빌로니아인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이 승리에는 군사적 이해득실보다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사서에 기록되어 있듯 이 승리 덕에 “위대한 신 마르두크께서 진노를 거두시고 다시 이 땅을 보살피러 돌아오셨다”고 하니 말이다. 네부카드네자르는 마르두크를 바빌론의 수호신일 뿐만 아니라 온 바빌로니아를 다스리는 모든 신 가운데 최고신으로 선포했다. 이런 행보에는 엘람 왕국을 상대로 힘들게 얻어낸 드문 승리를 효과적으로 선전하려는 속셈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바빌론의 군주들은 매년 마르두크 신전에서 그들의 통치권을 확인하는 신년의식에 참여했다. 이 의식을 위해 주변 대도시의 수호신들이 바빌론으로 이송되었다. 다른 도시들의 수호신들이 마르두크 신전에서 거행되는 의식의 증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관행은 사회가 너무 불안정하여 다른 도시들에서 바빌론까지 신상을 옮기는 것이 너무 위험해진 네부카드네자르의 통치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는 별다른 권력투쟁을 하지 않았다. 전쟁이라고 해봐야 몇 차례 일어난 소규모 접전이 전부였다. 아시리아는 티그리스 강과 그 주요 지류가 합류하는 지점을 중심으로 바빌론 북부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시리아의 완만한 구릉지대에는 주기적으로 비가 내렸고, 덕분에 목자와 농부들이 이곳에서 삶을 이어갔다. 아시리아에서는 바빌로니아와 달리 대추 재배가 불가능했다. 대신에 포도 재배가 가능했고, 아시리아인은 포도를 그대로 먹거나 포도주를 담갔다. 성경에는 칼라흐(님루드의 고대명)라는 명칭으로 등장하는 님루드에서 엄청난 규모의 포도주 저장고와 포도주 리스트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님루드는 이라크 북부 아르마우실의 남동쪽 35km 지점에 있는 아시리아의 대도시이다. 이라크 북부의 티그리스 강 서쪽 기슭에 있던 아슈르와 니네베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님루드는 아시리아 군대의 사령부가 위치한 도시였을지도 모른다.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평정하여 아시리아 신제국을 건설한 아슈르나시르팔 2세가 전쟁의 신 니누르타에게 바친 님루드 신전에는 고대의 잔혹상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870년경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치가 떨리는 방식으로 적들을 처치했다. 그는 적의 “목을 밟고 서서 옷감을 물들이듯 그들의 피로 산맥을 빨갛게 물들였다”고 한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해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왕은 포로들의 “코, 귀와 사지를” 잘라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눈을 뽑아내고”, “죄수들을 태워 죽였으며”, “반란군들의 살을 베어내거나” 산 채로 “가죽을 벗겼다”고 한다. 끝까지 굴종을 거부한 적국 통치자의 가죽을 벗겨 “니네베 성벽에 걸어 놓았을” 정도였다. 학살・약탈・대규모 이주정책은 아시리아 통치자들이 즐겨 사용한 정복의 도구였다. 그들은 “위대한 신 아슈르와 아다드로부터 부여받은 최고의 통치권”을 들어 이런 야만적인 정복방식을 정당화했다. 아시리아의 통치자들이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이 같은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갈 수 있었던 건 아시리아의 막강한 군사력 덕분이었다.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아슈르바니팔의 궁전 부조에는 니네베 사람들이 포도를 즐겨 먹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부조에는 그리스인처럼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 포도주를 마시는 광경이 새겨져 있다. 토론장에서 남성들과 어울려 포도주를 즐겼던 그리스인과는 달리 아슈르바니팔은 아내 아슈르-슈라트 왕비와 술잔을 나누었다. 그녀는 왕 앞에 있는 옥좌에 앉아 군주이자 주인인 남편을 응시하며 포도주잔을 입술에 갖다대었다. 파리를 쫓는 하인들의 손이 바빠졌다. 벌레들이 국왕 부부의 휴식을 방해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근처 나뭇가지에는 엘람족의 왕 테-우만의 목이 매달려 있었다. 아늑한 정원에도 유혈이 낭자한 아시리아 통치자의 천성이 흘러 넘쳤다. 잘린 목 주위에 새까맣게 내려앉은 새들이 눈을 파내고 시뻘건 살을 쪼아댔다. 막강한 절대권력자 아슈르바니팔은 포도주를 음미하며 고대 서아시아의 종주국 아시리아가 불멸의 대제국이라는 생각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기원전 627년 그가 생을 마감하고 15년 뒤에 아시리아는 멸망한다. 그의 두 아들이 왕권을 놓고 벌인 다툼 때문이었다.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아시리아는 메디아인과 바빌로니아인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위대한 제국: 바빌론・아시리아・페르시아

 

 

 

 

 

고대 아시리아의 존재를 만천하에 드러낸 고고학적 발견에 뒤이어 고대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 유적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니네베 발굴 당시와 같은 대규모 발견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바빌로니아 북쪽에 상당히 발전된 형태의 또 다른 아시아 초기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보였다. 바빌론에서는 공중에 걸쳐 있는 듯한 정원도 발견되었다. 일명 공중정원으로 불리는 이것은 무려 91m에 이르는 계단식 정원이다. 당시의 기술을 짐작케 하는 놀라운 건축물이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다.
엘람족이 수메르를 멸망시킨 직후에 바빌론 제1왕조가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다퉜다. 뒤숭숭한 시절이었지만 강대한 도시국가 바빌론의 거주자들은 다른 지역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정치적 안정을 누렸다. 밥 먹듯이 주인이 바뀌는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바빌론의 주인은 무려 3세기 동안 단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요새화된 이 철벽 같은 도시는 점점 더 넓은 지역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바빌론 제1왕조의 6대 왕 함무라비에 이르러서는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대한 종주권을 확립했다. 한 비문에서 함무라비는 스스로를 바빌로니아와 수메르의 통치자라 추켜세웠다. 그는 전 세계의 4분의 1을 다스리는 명실상부한 왕 중 왕이었다. 기원전 1750년함무라비의 사망 이후 바빌론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바빌론은 외침을 방어하기 바쁜 도시국가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한때 메소포타미아를 호령했던 대제국의 이름만은 영원히 기억되었다.
이 고대도시의 신비로운 흔적만큼이나 바빌론 하면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함무라비 법전이다. 함무라비 법전은 2.25m 높이의 49개의 석판에 새겨져 있다. 법전 내용 중 “눈에는 눈, 이에는이”라는 셈족의 철학이 시민들 간의 분쟁에서 신체 상한 이를 벌금으로 배상하던 수메르인의 벌금제도를 대체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수메르인도 살인자와 강도를 사형으로 다스렸지만 말이다. 함무라비는 수메르인의 벌금제도를 통한 온건한 제재방식이 신생 제국의 범죄를 예방하기에 미흡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이런 엄격한 동해보복同害報復(피해자가 입은 피해와 같은 정도의 손해를 가해자에게 가하는 보복)의 관념은 현대 서아시아 국가들의 모욕에 대한 대응방식에까지 이어진다. 현대에도 서아시아인은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내놓는 것은 어림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라 여기는 것 같다.
바빌론 제1왕조가 쇠락하기 시작한 것은 히타이트의 왕 무르실리스 1세가 기원전 1595년경 바빌론을 함락하면서부터이다. 바빌론을 장악한 무르실리스 1세는 이후 소아시아로 예기치 못한 후퇴를 감행했고, 권력의 공백을 틈타 카시트족이 바빌론을 차지했다. 이란에 살고 있던 카시트족은 함무라비의 후계자들이 바빌론을 다스리는 동안
지속적으로 바빌로니아 북부로 흘러들어왔다. 기원전 1152년경 카시트 왕조는 엘람족의 침략으로 멸망했고, 그 후로는 누구도 카시트의 왕들을 외세의 침략자로 여기지 않았다. 바빌로니아의 최고 성군이었던 네부카드네자르 1세는 엘람족에 의해 폐위된 카시트의 왕들에 대한 의리를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엘람족을 응징하기도 했다. 통상적으
로 사용되는 네부카드네자르의 영어표기는 성경에서 유래한 것이다.
바빌론 제4왕조(이신)의 4대 왕 네부카드네자르는 바빌론을 22년 동안 통치했다.
한 번은 엘람족이 바빌론의 수호신인 마르두크 신상을 약탈해간 일이 있었다. 심한 모욕감을 느낀 바빌론 시민들은 즉각 보복에 나섰지만 신상을 되찾아 에사길라의 위대한 마르두크 신전에 되돌려놓으려는 첫 번째 시도는 어이없이 좌절되었다. 네부카드네자르의 군대에 전염병이 돈 것이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왕은 유리한 징조가 보이자마자 두 번째 신상탈환 원정을 떠났다. 네부카드네자르와 그의 전차부대는 한여름의 찌는 듯한 더위를 이기며 한 발 한 발 엘람 땅으로 나아갔다. 이 원정길이 얼마나 고된 여정이었는지 들어보자.

 

 


두무지의 달에 병사들의 도끼는 손안의 불덩이와 같이 불타고 있
었고, 길바닥은 화염에 그슬린 것만 같았다. 우물바닥은 말라붙었
고, 지독한 갈등을 해소시켜줄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기력이 쇠
한 말들이 하나둘 나가떨어졌으며, 최고의 전사들마저 과로로 비
틀거렸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지옥의 행군 덕에 전차부대는 엘람족을 불시에 습격할 수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투로 강가에 피어오른 먼지가 “대낮의 빛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우측 진영에 도열해 있던 네부카드네자르의 전차부대가 격전을 마무리지었다. 바빌론 시민들은 승전보를 울리며 마르두크 신상과 함께 금의환향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슬람주의자들이 민주정치를 이용하다

 

 

 

 

 

“온건파 이슬람주의” 는 제도적 이슬람주의가 친민주정치 조직체라는 가정에 근거한 환상이다. 이슬람주의가 이슬람교의 윤리,38 즉 이슬람교를 민주정치와 양립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는 것에 뿌리를 둔다면 모순도, 환상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주의의 정치 이데올로기는 이슬람교의 윤리나, 다원주의와 권력 분담이라는 민주주의 가치관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이슬람주의의 주요 정치적 관심사는 이슬람식 제도,즉 신이슬람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다.
오늘날, 이슬람문명이 특히 중동에서 맞닥뜨린 난제들 가운데 하나는 민주정치 및 인권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집트의 진보주의 무슬림인 사아드 에딘 이브라힘이 지적했듯이, “우리는 집권 독재자와 이를 반대하는 신정주의자 사이에 엉켜 있는 셈이다.” 이슬람주의는 중동에 포진한 권위주의 및 전제주의 정권의 필요한 대안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컨대, 이슬람주의자들은 한 가지 골칫거리를 다른 것으로 바꿀 뿐이다. 이브라힘은 이 같은 소신을 밝혔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아 모국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지금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을 보면 제도적 이슬람주의가 민주주의라는 정치 문화와 양립할 수 있다는, 검증되지 않은 가설의 진위를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일찍이 제기된 제도적 이슬람주의와 지하드운동의 차이는 “급진파” 와 “온건파” 이슬람주의나 이슬람교보다 훨씬 더 유익한 정보를 담은 카테고리를 제시한다는 점이다. 정치 용어인 “급진파” 및 “온건파” 는 “이슬람교” 와 짝이 되면 존재하지도 않는, 독트린의 차이를 암시한다. 게다가 “이슬람주의” 를 “급진주의” 라든가 “광신도” 혹은 “극단주의” 와 혼용하는 것 또한 잘못이다. “급진파” 는 행동이 극단적인 소수를 의미하는데 사실, 이슬람주의는 이슬람세계에서 대중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사상이다. 조직을 갖
춘 이슬람주의자들은 머릿수가 소수이지만 부유한 걸프사Gulf로부터 재정 후원을 받는가 하면 임의로 쓸 수 있는 시설도 아주 많다. 제도적 이슬람주의자와 지하디스트는 전술이 다를 뿐, 독트린이나 이슬람주의식 통치라는 근본 목표에는 차이가 없다. 제도적 이슬람주의자들은 지하드운동의 폭력에 가담하지 않고, 대신 민주정치 놀음을 일삼고 선거에 동의하기도 한다. 그들은 샤리아에 기반을 둔 신이슬람 질서를 이룩하기 위해 이슬람주의 조직체의 목표를 여전히 공유하고 있다. 이슬람주의식 세계관에는 보편적인 신 중심주의rabbaniyya(라바니야)에 근거한 이슬람교의 지배(시야다트 알이슬람)도 포함된다. 종교 기반 이슬람주의식 국제주의는 다원주의 민주정치와 권력 분담과는 상극이다.
민주정치가 단순한 투표 절차에 국한된다면 전체주의 조직체가 집권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때 이를 거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민주정치에는 선거 그 이상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정치 문화는 시민 다원주의를 비롯하여 사회 및 국가의 권력 분담이 필수요소다. 물론 선거가 없는 민주정치는 존재할 수 없으나, 적절한 정치 문화와 국민의 제도가 자리 잡지 않은 민주정치 또한 확산될 수가 없다. 따라서 다양성 개념이 어느 정도 민주정치에 적용되는 것이다. 민주정치 관행에서 파생된 다양한 변수에도, 민주정치에도 인권과 같이 축소될 수 없는 보편성이 수반된다. 진보적인 아랍인 중 민주정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같은 민주정치의 핵심 가치관에 동감한다.
이슬람주의가 이슬람세계에서는 누구도 간과할 수 없는 야권세력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슬람주의 조직체들은 기존 독재자의 유력한 반대파일 뿐 아니라 집권할 각오가 된 주역이기도 하다. 여러 지역들에서 이슬람주의자의 집권 여부보다는 권력에 무엇을 덧붙이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파이낸셜 타임스』지에 게재된 논평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과격한 시각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최선의 희망”이라고 밝힌 것은 서방세계의 보편적 식견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슬람주의자의 역
할을 확대한다고 해서 참여정치의 합류라는 신규 정책으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 예컨대, 하마스는 2006년에 실시된 선거에서 승리하고는 얼마 후, PLO 반대세력을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투옥시켰다. 그리고 1년 후에는 군사 쿠데타로 승리를 이어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강간의 결과로 임신했다면

 

 

 

 

톰슨의 주장에 따르면, 일정한 시간 동안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음을 알면서도 신장병 환자를 나의 몸에 연결하도록 허락한다면 더 없는 자비라고 하겠지만, 그래야만 할 의무가 없다. 거기에는 도덕적 필요조requirement도, 도덕적 의무duty도 없다. 그 환자가 죽는다 하더라도 나는 나의 권리를 내세워 연결을 끊을 수 있다는 것이다. 환자가 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또 연결이 끊어지면 죽을 것이 분명하더라도, 그에게는 나의 몸을 이용할 권리가 전혀 없다. 그 환자 역시 한 인간으로서 생명의 권리를 지녔지만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아무 짓이나 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가 쓰려고 하는 것은 나의 몸이기에 나의 동의 없이 단순히 뛰어들어 채어갈 수는 없다. 나의 신체를 이용할 권리가 그에게 있다는 말은 무엇보다 나의 신체를 소유하고 있음을 내가 부정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나의 몸은 공동재산이 되어 누구나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써도 될 것이다.
톰슨의 주장은 낙태의 권리를 내세우는 여성단체에 힘이 된다. 또 3장 도덕은 우리에게 남을 도울 의무를 얼마나 요구하는가 이 주장은 가톨릭교회 같은 기구에서 낙태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여성의 자기 신체에 대한 권리를 무시하는 것이란 견해를 뒷받침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가톨릭교회는 여성을 이류 시민 정도로 치부하여 자기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지닌 독립적, 도덕적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애나 낳는 장치쯤으로 안다는 것이다. 한편, 톰슨의 주장은 낙태를 불완전하게 옹호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앞의 사례를 임신에 비유한다면, 특히 강간에 따른 임신과 가장 비슷하다는 것을 눈치 빠른 독자들은 벌써 알아챘을 것이다. 이 사례의 핵심은 그 환자가 나의 동의 없이 나의 신장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비유하자면, 동의한 바 없는 성관계로 임신했다는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비유에 비추어볼 때, 환자와의 연결을 끊어버릴 권리가 있다는 톰슨의 주장은 훨씬 강력한 설득력을 얻는다. 그렇지만 강간이 아닌 다른 경위로 임신했을 때에도 톰슨의 주장에 반드시 설득력이 있을지는 분명하지 않다. 예를 들어 반대에 속하는 또 하나의 극단적인 사례를 생각해보자. 임신하게 할 목적으로 저지른 고의적 강간의 결과로 임신한 여성이 나중에 마음을 바꿔 스스로 바라던 임신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경우다. 태아도 생명의 권리를 지닌 인간일진대, 스스로 바라던 태아를 낙태로 없애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누구나 여길 것이다(앞의 사례를 같은 방식으로 수정하여, 처음에는 자기의 신체를 이용하도록 환자에게 허락했다가 나중에 마음을 바꾼다고 가정할 수 있다).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낙태는 대체로 처음에는 임신 가능성이 있음을 알지만 실제로 임신을 바라지는 않으면서 성관계를 맺고 그 결과 임신하는 경우다. 이는 도덕적 회색지대라 할 것이다(환자에게 처음부터 허락한 것만큼 완전히 자발적인 것도 아니고, 강간으로 이루어진 임신만큼 완전히 강제적인 것도 아닌 상황이다). 톰슨의 견해에 대한 반론은 낙태의 전면 허용을 주장하는 이들에게서 특히 거세게 일고 있다. 이들은 톰슨의 견해가 상황의 도덕을 너무 혼란스럽게 파악한다고 지적한다(그러나 또 다른 논자들은 이러한 혼란을 이해할 때 톰슨의 설명에 깃들어 있는 현실주의가 어쩔 수 없이 빚어낸 결과라고 할 것이다) .
강간에 비유하는 경우만을 보면,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는 톰슨의 주장이 미온적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톰슨이 선택한 사례는 그가 주로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를 잘 말해준다. 두말할 나위 없이 그녀의 주된 관심은 설령 태아를 인간으로 본다 하더라도 낙태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음을 강조하는 데 있다. 이 주장의 핵심은 태아에게 생명의 권리가 있다 해도, (예를 들자면 그 엄마의 노력으로) 계속 생존할 권리가 있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의 동의 없이 어느 환자가 나의 몸에 연결되어 있다면 나에게는 그걸 끊어버릴 권리가 있다. 강간의 결과로 임신했다면 나에게는 태아를 없앨 권리가 있다. 그러므로 생명의 권리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생존해나갈 권리까지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톰슨의 주장이 안고 있는 복잡성은 생명의 권리가 보장하는 것은 다만 일정 조건을 충족하는 경우에만 계속해서 살아갈 권리가 허용된다는 데 있다(달리 말하면, 내가 생명의 권리를 지닌다는 것은 곧 나의 주장을 무력화하는 다른 조건들이 존재하지 않는 한 생존할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일단 낙태를 둘러싼 논의의 세부 논점들을 제쳐놓으면, 톰슨의 주장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세계적 빈곤이란 주제에도 타당성을 띠는 수많은 논점들을 제기한다. 그녀의 논의에서 핵심이 되는 기본 주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이바지해야 하는가이다. 이제 급진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반론을 내놓기 위해 톰슨이 제시한 사례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두 번째와 세 번째 반론에도 공명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할 수 있다. 비록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우리가 그들을 구해줄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그렇다고 가정하자); 나아가 그들의 가치가 우리의 가치와 평등하고 생명, 자유, 행복 추구 등에 대한 권리가 우리의 권리와 평등하다 하더라도, 그리고 우리가 뛰어들어 돕지 않으면 그들이 죽을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털어 반드시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법은 없다. 우리에게는 도와주기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 톰슨의 사례에 나오는 환자에게도 이것은 들어맞는 말이다. 톰슨의 사례에서 보듯이,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면서까지 그 환자의 목숨을 지탱해줄 의무는 전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카드의 몰락 이후 수메르 문화의 마지막 전성기가 도래했다

 

 

 

 

인간의 언어를 점토판에 새겨넣을 수 있게 한 이 횃불과도 같았던 발명은 고대 무역로를 따라 이방에도 전해졌다. 바빌론에서도 아카드어Akadian(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지방을 포함하는 지역의 셈족의 언어)를 설형문자로 기록했다. 이는 수메르어가 사멸된 한참 후에도 고등교육을 받은 계층은 수메르인이 개발한 설형문자체계를 섭렵하고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르네상스 시대까지 유럽 지배계층이 라틴어를 애호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셈족은 수메르인이 바빌로니아 북부지역에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이곳에 진출했다. 그 후 지속적으로 이어진 셈족의 유입으로 결국 수메르인은 설 자리를 잃고 만다. 엘람Elam은 이란에서 최초로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의 예를 따른 도시였다. 엘람족은 바레인Bahrain 섬을 지나 인도로 가는 메소포타미아와 인도 간 무역로를 개척했다. 이 무역로를 통한 메소포타미아와 인도 간의 상거래는 인더스 문명 내 기록체계의 탄생을 촉발시켰다. 하지만 인도로 전해진 이 기록체계가 중국으로 전파되었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근방의 요새 마을터인 반파 유적에서 이 주장을 뒤엎을 만한 증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반파 유적에서 중국 상형문자의 전신이라 할 만한 문자들을 새겨놓은 도기가 발견된 것이다. 이는 수메르인이 설형문자를 점토판에 쓰기 시작했던 것과 얼추 비슷한 시기에 중국인이 고유의 기록체계를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비록 완전히 발전된 문자체계의 흔적은 상나라의 유물에서나 발견할 수 있지만 말이다.
상나라의 왕들은 신처럼 받들던 조상들에게서 얻은 신탁의 내용을 신성한 뼈에 새겼다. 하지만 수메르인의 문명에 비견될 정도로 오래전에 자리 잡은 중국 고대문명의 흔적에서 문자의 기록이 발견된 것은 설형문자 전래설을 반박할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수메르인의 국가 통일로 인해 종전에 왕이 중재에 나서야만 해결되었던 도시 간의 분쟁이 현격히 감소했다. 아울러 발전된 정부제도 덕에 현존하는 최고의 법전을 담은 점토판인 우르남무 법전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메르 도시국가 시대가 막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인류 최초의 법이 탄생한 것이다. 그 후로 유명한 함무라비 법을 비롯하여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법이 제정되었다. 수메르 도시국가 말기의 라가시Lagash 왕 우르남무는 선대 왕들이 사원의 재산을 압류한 것을 개탄하여 과감한 사회개혁을 단행했다. 법전의 제정 및 압류한 재산의 반환은 이런 개혁조치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반대파에 의해 라가시에서 내몰린 그는 라가시 북서쪽의 도시국가 기르수Girsu의 왕이 된다. 그리고 기원전 2340년 아카드의 셈족 통치자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 죽음을 맞는다. 아카드가 정확히 어디에 위치했는지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지만, 이 고대도시는 바빌로니아 북쪽 근방 어딘가에 위치했다. 셈족의 한 갈래로 유목민이었던 아카드인으로 대변되는 황제 권력의 등장은 수메르인의 독립국가 시대를 종식시켰다. 수메르인의 도시국가들을 정복하여 메소포타미아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한 아카드인이 선호한 지배의 도구는 대규모 학살이었다. 아카드인은 동부 소아시아뿐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피와 공포로 제국의 명맥을 영원히 이어갈 수는 없었다. 아카드에는 반유목민 구티족이라는 적수가 있었다. 이란 산지에서 내려온 이 용맹한 종족은 아카드인이 사용한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셈족과 수메르인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아카드의 몰락 이후 수메르 문화의 마지막 전성기가 도래했다. 우르 제3왕조의 2대 왕 슐기의 사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기원전 2050년경 슐기 왕은 수도 우르에 산을 등진 성벽을 건설하여 호시탐탐 이라크 남부를 노리는 이란의 호전적인 침략자들을 막아냈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슐기 왕과 같은 태평성대를 누리지는 못했다. 이란과 동맹
을 맺은 엘람 왕국1의 맹렬한 공격에 수메르의 마지막 왕조는 힘없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고국의 멸망을 한탄한 한 수메르인의 말이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끔찍하게 메마른 수로에선 잡초 한 뿌리도 자라지 않고, 비옥한
토양에 울리던 곡괭이질 소리는 들리지 않네. 씨앗이 심기지 않은
빈 땅을 일구는 이 없고, 평원에는 소를 치는 목자의 노래가 울려
퍼지지 않으며, 외양간에서도 우유 젓는 소리를 들을 수 없네.

 

고대의 삶은 영원한 저편으로 사라졌다. 폐허가 된 도시 우르에서는 사람의 흔적은 고사하고 개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