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의 결과로 임신했다면

톰슨의 주장에 따르면, 일정한 시간 동안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음을 알면서도 신장병 환자를 나의 몸에 연결하도록 허락한다면 더 없는 자비라고 하겠지만, 그래야만 할 의무가 없다. 거기에는 도덕적 필요조건requirement도, 도덕적 의무duty도 없다. 그 환자가 죽는다 하더라도 나는 나의 권리를 내세워 연결을 끊을 수 있다는 것이다. 환자가 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또 연결이 끊어지면 죽을 것이 분명하더라도, 그에게는 나의 몸을 이용할 권리가 전혀 없다. 그 환자 역시 한 인간으로서 생명의 권리를 지녔지만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아무 짓이나 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가 쓰려고 하는 것은 나의 몸이기에 나의 동의 없이 단순히 뛰어들어 채어갈 수는 없다. 나의 신체를 이용할 권리가 그에게 있다는 말은 무엇보다 나의 신체를 소유하고 있음을 내가 부정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나의 몸은 공동재산이 되어 누구나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써도 될 것이다.
톰슨의 주장은 낙태의 권리를 내세우는 여성단체에 힘이 된다. 또 3장 도덕은 우리에게 남을 도울 의무를 얼마나 요구하는가 이 주장은 가톨릭교회 같은 기구에서 낙태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여성의 자기 신체에 대한 권리를 무시하는 것이란 견해를 뒷받침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가톨릭교회는 여성을 이류 시민 정도로 치부하여 자기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지닌 독립적, 도덕적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애나 낳는 장치쯤으로 안다는 것이다. 한편, 톰슨의 주장은 낙태를 불완전하게 옹호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앞의 사례를 임신에 비유한다면, 특히 강간에 따른 임신과 가장 비슷하다는 것을 눈치 빠른 독자들은 벌써 알아챘을 것이다. 이 사례의 핵심은 그 환자가 나의 동의 없이 나의 신장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비유하자면, 동의한 바 없는 성관계로 임신했다는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비유에 비추어볼 때, 환자와의 연결을 끊어버릴 권리가 있다는 톰슨의 주장은 훨씬 강력한 설득력을 얻는다. 그렇지만 강간이 아닌 다른 경위로 임신했을 때에도 톰슨의 주장에 반드시 설득력이 있을지는 분명하지 않다. 예를 들어 반대에 속하는 또 하나의 극단적인 사례를 생각해보자. 임신하게 할 목적으로 저지른 고의적 강간의 결과로 임신한 여성이 나중에 마음을 바꿔 스스로 바라던 임신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경우다. 태아도 생명의 권리를 지닌 인간일진대, 스스로 바라던 태아를 낙태로 없애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누구나 여길 것이다(앞의 사례를 같은 방식으로 수정하여, 처음에는 자기의 신체를 이용하도록 환자에게 허락했다가 나중에 마음을 바꾼다고 가정할 수 있다).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낙태는 대체로 처음에는 임신 가능성이 있음을 알지만 실제로 임신을 바라지는 않으면서 성관계를 맺고 그 결과 임신하는 경우다. 이는 도덕적 회색지대라 할 것이다(환자에게 처음부터 허락한 것만큼 완전히 자발적인 것도 아니고, 강간으로 이루어진 임신만큼 완전히 강제적인 것도 아닌 상황이다). 톰슨의 견해에 대한 반론은 낙태의 전면 허용을 주장하는 이들에게서 특히 거세게 일고 있다. 이들은 톰슨의 견해가 상황의 도덕을 너무 혼란스럽게 파악한다고 지적한다(그러나 또 다른 논자들은 이러한 혼란을 이해할 때 톰슨의 설명에 깃들어 있는 현실주의가 어쩔 수 없이 빚어낸 결과라고 할 것이다) .
강간에 비유하는 경우만을 보면,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는 톰슨의 주장이 미온적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톰슨이 선택한 사례는 그가 주로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를 잘 말해준다. 두말할 나위 없이 그녀의 주된 관심은 설령 태아를 인간으로 본다 하더라도 낙태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음을 강조하는 데 있다. 이 주장의 핵심은 태아에게 생명의 권리가 있다 해도, (예를 들자면 그 엄마의 노력으로) 계속 생존할 권리가 있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의 동의 없이 어느 환자가 나의 몸에 연결되어 있다면 나에게는 그걸 끊어버릴 권리가 있다. 강간의 결과로 임신했다면 나에게는 태아를 없앨 권리가 있다. 그러므로 생명의 권리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생존해나갈 권리까지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톰슨의 주장이 안고 있는 복잡성은 생명의 권리가 보장하는 것은 다만 일정 조건을 충족하는 경우에만 계속해서 살아갈 권리가 허용된다는 데 있다(달리 말하면, 내가 생명의 권리를 지닌다는 것은 곧 나의 주장을 무력화하는 다른 조건들이 존재하지 않는 한 생존할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일단 낙태를 둘러싼 논의의 세부 논점들을 제쳐놓으면, 톰슨의 주장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세계적 빈곤이란 주제에도 타당성을 띠는 수많은 논점들을 제기한다. 그녀의 논의에서 핵심이 되는 기본 주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이바지해야 하는가이다. 이제 급진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반론을 내놓기 위해 톰슨이 제시한 사례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두 번째와 세 번째 반론에도 공명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할 수 있다. 비록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우리가 그들을 구해줄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그렇다고 가정하자); 나아가 그들의 가치가 우리의 가치와 평등하고 생명, 자유, 행복 추구 등에 대한 권리가 우리의 권리와 평등하다 하더라도, 그리고 우리가 뛰어들어 돕지 않으면 그들이 죽을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털어 반드시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법은 없다. 우리에게는 도와주기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 톰슨의 사례에 나오는 환자에게도 이것은 들어맞는 말이다. 톰슨의 사례에서 보듯이,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면서까지 그 환자의 목숨을 지탱해줄 의무는 전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