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제국: 바빌론・아시리아・페르시아

고대 아시리아의 존재를 만천하에 드러낸 고고학적 발견에 뒤이어 고대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 유적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니네베 발굴 당시와 같은 대규모 발견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바빌로니아 북쪽에 상당히 발전된 형태의 또 다른 아시아 초기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보였다. 바빌론에서는 공중에 걸쳐 있는 듯한 정원도 발견되었다. 일명 공중정원으로 불리는 이것은 무려 91m에 이르는 계단식 정원이다. 당시의 기술을 짐작케 하는 놀라운 건축물이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다.
엘람족이 수메르를 멸망시킨 직후에 바빌론 제1왕조가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다퉜다. 뒤숭숭한 시절이었지만 강대한 도시국가 바빌론의 거주자들은 다른 지역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정치적 안정을 누렸다. 밥 먹듯이 주인이 바뀌는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바빌론의 주인은 무려 3세기 동안 단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요새화된 이 철벽 같은 도시는 점점 더 넓은 지역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바빌론 제1왕조의 6대 왕 함무라비에 이르러서는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대한 종주권을 확립했다. 한 비문에서 함무라비는 스스로를 바빌로니아와 수메르의 통치자라 추켜세웠다. 그는 전 세계의 4분의 1을 다스리는 명실상부한 왕 중 왕이었다. 기원전 1750년함무라비의 사망 이후 바빌론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바빌론은 외침을 방어하기 바쁜 도시국가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한때 메소포타미아를 호령했던 대제국의 이름만은 영원히 기억되었다.
이 고대도시의 신비로운 흔적만큼이나 바빌론 하면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함무라비 법전이다. 함무라비 법전은 2.25m 높이의 49개의 석판에 새겨져 있다. 법전 내용 중 “눈에는 눈, 이에는이”라는 셈족의 철학이 시민들 간의 분쟁에서 신체 상한 이를 벌금으로 배상하던 수메르인의 벌금제도를 대체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수메르인도 살인자와 강도를 사형으로 다스렸지만 말이다. 함무라비는 수메르인의 벌금제도를 통한 온건한 제재방식이 신생 제국의 범죄를 예방하기에 미흡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이런 엄격한 동해보복同害報復(피해자가 입은 피해와 같은 정도의 손해를 가해자에게 가하는 보복)의 관념은 현대 서아시아 국가들의 모욕에 대한 대응방식에까지 이어진다. 현대에도 서아시아인은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내놓는 것은 어림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라 여기는 것 같다.
바빌론 제1왕조가 쇠락하기 시작한 것은 히타이트의 왕 무르실리스 1세가 기원전 1595년경 바빌론을 함락하면서부터이다. 바빌론을 장악한 무르실리스 1세는 이후 소아시아로 예기치 못한 후퇴를 감행했고, 권력의 공백을 틈타 카시트족이 바빌론을 차지했다. 이란에 살고 있던 카시트족은 함무라비의 후계자들이 바빌론을 다스리는 동안
지속적으로 바빌로니아 북부로 흘러들어왔다. 기원전 1152년경 카시트 왕조는 엘람족의 침략으로 멸망했고, 그 후로는 누구도 카시트의 왕들을 외세의 침략자로 여기지 않았다. 바빌로니아의 최고 성군이었던 네부카드네자르 1세는 엘람족에 의해 폐위된 카시트의 왕들에 대한 의리를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엘람족을 응징하기도 했다. 통상적으
로 사용되는 네부카드네자르의 영어표기는 성경에서 유래한 것이다.
바빌론 제4왕조(이신)의 4대 왕 네부카드네자르는 바빌론을 22년 동안 통치했다.
한 번은 엘람족이 바빌론의 수호신인 마르두크 신상을 약탈해간 일이 있었다. 심한 모욕감을 느낀 바빌론 시민들은 즉각 보복에 나섰지만 신상을 되찾아 에사길라의 위대한 마르두크 신전에 되돌려놓으려는 첫 번째 시도는 어이없이 좌절되었다. 네부카드네자르의 군대에 전염병이 돈 것이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왕은 유리한 징조가 보이자마자 두 번째 신상탈환 원정을 떠났다. 네부카드네자르와 그의 전차부대는 한여름의 찌는 듯한 더위를 이기며 한 발 한 발 엘람 땅으로 나아갔다. 이 원정길이 얼마나 고된 여정이었는지 들어보자.
두무지의 달에 병사들의 도끼는 손안의 불덩이와 같이 불타고 있
었고, 길바닥은 화염에 그슬린 것만 같았다. 우물바닥은 말라붙었
고, 지독한 갈등을 해소시켜줄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기력이 쇠
한 말들이 하나둘 나가떨어졌으며, 최고의 전사들마저 과로로 비
틀거렸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지옥의 행군 덕에 전차부대는 엘람족을 불시에 습격할 수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투로 강가에 피어오른 먼지가 “대낮의 빛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우측 진영에 도열해 있던 네부카드네자르의 전차부대가 격전을 마무리지었다. 바빌론 시민들은 승전보를 울리며 마르두크 신상과 함께 금의환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