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피트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


피트 몬드리안은 바르트 반 데어 렉, 데오 반 뒤스부르크, 빌모스 훗자르와 함께 1917년 데 스틸의 결성에 참여한 네 명의 화가 중에 한 사람이다.
데 스틸과는 무관하게 몬드리안은 이미 입체파의 영향을 받아 플러스(+)와 마이너스(-) 기호에 의한 독자적인 추상화를 그리고 있다.
1914년에서 15년에 걸쳐 제작된 <부두와 대양>에서는 플러스와 마이너스 기호를 의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그가 엄격한 추상적 구성작품을 제작하기 이전의 것으로 우주적 서정주의을 칭송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마치 바다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파동의 보편적인 리듬을 사각형의 캔버스 평면상에 옮겨온 듯한 이것은 동적 리듬에 충만한 화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데 스틸 운동에 참가하면서 서정주의적 요소는 사라지고, 보다 보편적인 균형을 추구하게 되어 결과적으로는 더욱더 철저한 추상적인 구성을 지향한다.


몬드리안은 자연주의적 세계관에 기초하여 인간을 파악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개개의 가치관을 중심에 둔 세계관으로부터 보편성을 중심에 둔 세계관으로의 전환을 추상적 리얼리티에 기초를 두고 실현하고자 했다.
그것을 구체화하는 표현형식으로 신조형주의(Neo-plasticism)를 제창한 것이다.
이같이 몬드리안의 작업은 신조형주의의 이론에 근거하여 전개된 것이다.


몬드리안의 작품을 추상적인 형태를 구성하는 일종의 추상회화의 한 방법 정도로 이해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목격할 수 있으나, 몬드리안은 “입체주의자, 미래파, 다다이스트들이 작품을 다듬어 양식화해가는 과정에서 ‘형태의 조형성’에만 주목하는 한 그들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오랜 전통적인 가치관으로부터도 완벽하게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다시 말하면 추상형태를 조형적으로 구성하는 것만으로는 신조형주의의 이념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서 신조형주의의 이념이 실현될 수 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그가 말하는 ‘관계’의 표현을 통해서이다.


모든 사물은 전체의 부분이다. 각 부분은 전체로부터 가시적인 가치를 수용하며, 전체는 여러 가지 부분으로부터 가시적인 가치를 받아들인다.
모든 사물의 상태는 상호간의 ‘관계’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색채는 그 밖의 다른 색채를 통해서만 존립 가능하며, 크기는 다른 크기에 의해 확정된다.
‘그 밖의’ 위치에 대한 대립이 없는 위치는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관계’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3


여기서 “모든 사물의 상태는 상호간의 ‘관계’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 부분에 주목하자.
그에게 있어서 화면은 구성(Composition)이 완결된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상호간의 ‘관계’를 나타내주는 규준이었다.
그 후 몬드리안은 이 같은 생각을 보다 명확한 표현을 빌려 설명했다.


‘예술’은 선과 색채를 특정한 형태로부터 해방시켰다.
중립적인 것, 즉 보편적인 것. 지금까지 예가 없는 조형수단에 의해 스스로를 표현해내고 있다.
나아가서 ‘등가적 관계(equilibrated relationship)’를 통해 지금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고 있다.4


‘예술’은 그같이 중립적인 또는 보편적인 형태조차도 소멸시키기 위해서 정확한 ‘등가적 관계’를 실현시키고 선과 색채를 자유롭게 표현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5


여기서 사용된 ‘등가적 관계’라는 것은 선, 면, 색채 등의 여러 가지 조형수단의 상호관계가 다이나믹한 균형 상태에 달한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단순히 서로가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몬드리안의 회화작품 대부분은 단지 화면이라는 한정된 공간상에서 형태의 상호관계를 컨트롤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화면 밖의 세계와의 상호관계에 진정한 표현의도가 숨어있다고 할 수 있다.
알렉산더 캘더가 몬드리안의 아틀리에를 방문한 후 움직이는 추상조각의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몬드리안의 작품이 화면 밖 공간과의 등가적 관계를 의식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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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뒤스부르크가 1924년 파리에서 새로운 주택건축을 전시했을 때 언급한


몬드리안은 회화의 표현대상영역을 2차원의 평면에 한정하지 않았다.
이 같은 사실은 신조형주의의 이념뿐만 아니라, 그가 보여준 문화전반에 대한 태도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예술 또는 문화의 문제를 특정형태의 문화와 순수관계의 문화로 나누고, 특정의 형태를 다루는 문화보다 순수하게 관계만을 다루는 문화가 대두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모든 ‘자연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모든 특정형태의 지배’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곧 ‘순수한 관계들’을 실현시키게 될 것이다.6


여기에 언급된 내용은 단지 예술상의 주의(ism)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생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예술은 인생의 표현이라는-나아가서 그것에 선행하는 것이라는-사실을 입증해왔다.
따라서 ‘순수한 관계들’은 새로운 인생에 직결된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예술영역에서, 특히 조형수단에 관한 한 실제로 그러한 것과 같이 ‘새로운 인생’을 위해서 우리의 정신이 많든 적든 순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으로 인생은 과거의 예술이 그러했던 것과 같은 방법-개별적인 것들 사이의 순수관계를 달성하는것-으로 점진적인 자유, 진정한 균형 상태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7


몬드리안이 주장했던 ‘순수관계’라는 개념은 키슬러의 ‘상호현실주의’과 대단히 닮아 있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해서 킴 레빈은 「키슬러와 몬드리안 - 생활에의 예술 Kiesler and Mondorian, art into Life」(Art News, 1964)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키슬러는 그의 친구 몬드리안과 함께 세계의 실체 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간에는 많은 ‘관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술은 생활이 되지 않으면 안 되며, 현실은 추상적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몬드리안은 키슬러와 같이 생명력과 유연성을 열망했고 형태에 의한 한계에 저항했다.
나아가서 몬드리안의 ‘연속적 대치’와 ‘동적 균형’은 키슬러가 말하는 ‘연속장력’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개념이다.8


몬드리안은 ‘순수관계’를 실제로 표현하기 위해 회화라는 2차원 공간을 선택할 필요가 있었다.
만약 그가 3차원의 공간을 출발점으로 하는 현실세계의 생활을 직접 대상으로 했다면 아마도 그가 말하는 ‘특정형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순수관계’도 순수한 상태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데 스틸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3차원의 건축적 구성에 대한 관심을 보여 현실적인 공간으로 전개한 데 반해 몬드리안이 그들과 같이 행동할 수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 뒤스부르크가 1924년 파리에서 새로운 주택건축을 전시했을 때 언급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면, 이것이 키슬러의 갤럭시와 같은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새로운 건축은 대칭적인(symmetry) 구성기법을 이용하지 않고도 동일하지 않은 부분들 사이의 평형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동일하지 않은 부분이란 각각의 기능적 특성에 기초하여, 위치, 크기, 비례, 설정 등이 서로 다른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이 같은 부분들이 이루는 평형관계는 유사성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서로 다른 성질에 의한 것이다.
나아가서 새로운 건축에서는 정면, 뒷면, 우측, 좌측, 위, 아래는 각각이 등가적인 요소를 지닌 것으로 취급한다.9


1918년에서 1924년경에 이르기까지 데 스틸의 중심과제는 좌우대칭에 관한 미학적 탐구와, 구체적인 형태나 장식적인 형태를 배제한 조형이론의 확립에 있었다.
또한 그것은 중심을 상실하고 모든 부분이 해체되어버린 당시의 유럽에 새로운 문화 이념을 확립시키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같이 회화와 조각은 물론 그 밖의 조형예술에 있어서도 부분들 사이의 관련성을 회복하고 보편성을 지니는 균형 상태를 발견한다는 공통된 목표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유럽의 정치적 경제적 재건을 의미하는 동시에 문화적인 해체상태를 넘어서는 20세기의 문화적 원리에 대한 탐구이기도 했다.
이같이 반 뒤스부르크와 몬드리안, 그리고 키슬러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예술의 목적을 인생이나 생활의 목적과 일치시키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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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각 ‘갤럭시’


최초의 갤럭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 직후 시도되었다.
우연의 일치이겠으나 갤럭시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부활된다.
최초의 갤럭시는 조형적 실험수준이었으나, 이미 논고한 바와 같이 여기서 실험된 갤럭시 개념은 건축을 통해 ‘엔드리스’로 발전되고 ‘상호현실주의’이론으로 논리화되는 등 키슬러의 조형관을 결정짓는 기본 이론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뉴욕에서 활동했던 초현실주의자들과 빈번하게 교류한 키슬러는 그 후 보다 표현적인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키슬러는 몇 개의 전람회장구성을 통해 제2차 갤럭시를 제작했다.
제2차 갤럭시 작품에는 크게 회화에 의한 것과 조각에 의한 것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전자는 주로 벽면에 구성된 것이고, 후자는 바닥, 벽, 천장 등 모든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것은 후에 ‘엔드리스 조각(Endless Sculpture)’ 또는 ‘환경조각(Environment Sculpture)’이라고 불렸다.2)


키슬러가 제작한 최초의 조각은 1947년 파리에서 개최된 초현실주의 국제전에 발표된 <모든 종교를 위한 토템 Totem for All Religions>이다.
이 작품은 현재 뉴욕 근대미술관(MoMA)에 상설 전시되어 있는데, 지난 역사상 인류가 지니고 있던 여러 가지 종교적 상징이 목조에 의해 연속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것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의 토템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상징을 빌어 종교적인 의미를 담은 갤럭시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후기의 활동 중 최초에 해당하는 이 작품에 나타나 있는 종교적 성격 또는 정신성은 이후 작업의 주된 주제가 되고 있다.
여기에 관해서는 후에 상세하게 논고할 예정이다.


키슬러가 <갤럭시>라고 명명한 최초의 조각작품은 1948년 쥴리어드 음악원에서 상연된 다리우스 미요 작곡, 장 콕도 각본의 <애처로운 수부 Le Pauvre Matelot>의 무대장치 중 하나로 제작된 것이다.
당시의 사진을 보면 무대장치 자체가 대단히 상징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른쪽에는 기둥에 뱀이 감겨있는 듯한 부분이 있고, 위쪽에는 불가사리 형태의 오브제가 띄워져 있다.
조각작품과 같은 무대장치 안쪽에는 배우가 앉아 있다.
또한 1951년에 그려진 갤럭시 조각의 드로잉을 보면 작품 중앙에 한 사람이 편안한 자세로 걸터앉아 있다.
키슬러는 이것을 조각작품으로 발표하기 이전에 작품과 인간과의 관계를 의식했던 것이다.
1952년 뉴욕 근대미술관에서는 이 작품을 포함하는 키슬러의 조각작품이 출품된 15인의 미국인전(Fifteen Americans)이 개최되었는데,3) 당시 『라이프 LIFE』지는 이것을 “살아 있는 조각, 그리고 살 수 있는 조각”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후에 키슬러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내 친구들이 평한 것과 같이 뉴욕 최초의 ‘환경조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살아 있고 또한 살 수 있다는 것은 조각과 건축이 동의어라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새로운 예술개념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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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럭시>는 하늘을 응시하는 자의 건축이다


<갤럭시>의 특징은 뼈조각, 척추, 턱, 이빨과 같은 생물적인 형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조각가 자코메티가 <오전 4시의 신전>에서 시도한 얇은 봉 골조만으로 된 집과 그 곳에 매달려 있는 뼈조각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키슬러의 작품에서는 이 같은 형태가 엄격한 공간구조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같은 공간의 구조적 특성에 주목하여 키슬러의 <갤럭시>는 쟈코메티의 작품과 다른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특히 수직과 수평의 그리드에 의존하지 않는 비합리적인 공간구조를 띠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대해서 알프레드 H. 바는 「키슬러의 갤럭시 Kiesler’s Galaxy」(Harper’s Bazaar, 1952)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갤럭시>는 하늘을 응시하는 자의 건축이다.
그 플랜을 보면 놀라서 높이 쳐든 팔을 조합한 것처럼 보인다.
주요 축선(軸線)은 사파다 궁전에 있는 봇로미니에서 볼 수 있는 의사(疑似) 원급법과 같이 소실점을 향해 이상하게 비뚤어져 있다.11


키슬러는 이 <갤럭시>라는 조각을 통해서 사실상 건축물을 만든 것이다.
키슬러는 회화가 액자라는 틀에 갇혀 공간적 한계를 가지는 것을 의아해했다.
그는 회화를 공간적 존재로 다루기 위한 방법으로 액자라는 틀을 제거해버렸다.
이것은 페기 구겐하임의 ‘금세기 예술’ 화랑의 전시공간설계 및 그 후 두 번에 걸쳐 시도된 초현실주의전의 전시디자인을 통해서도 시도한 바가 있다.4)
이 같은 전시 공간 디스플레이는 결국 회화작품이 건축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는 인식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좌대라는 형식적인 기반 위에 올려져 있는 조각작품도 결국 ‘좌대에서 조각작품의 끝부분까지’를 작품공간으로 한다는 공간적 한계를 지닌다.


회화도 조각도 공간적 존재로 본다면 회화는 액자라는 틀 속에서, 조각은 조각 자체가 지니는 형식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키슬러의 출발점이었다.
여기서 키슬러는 이 같은 예술작품에 대한 인습적인 제약을 타파하고 그것들을 3차원의 물리적 공간으로 해방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그가 갤럭시를 시작한 이유이다.
물론 그는 몇몇 전람회의 회장구성을 통해 회화, 조각, 그리고 건축이 동등한 관계 하에 병립하는 공간연출을 실현한 바 있다.
그러나 그가 다루었던 회화나 조각이 내용이나 형태적 측면에 있어서 급진적인 것이었다는 사실과는 별도로, 그것들은 키슬러가 생각하고 있던 작품의 존재방식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여전히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틀이라는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자기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기존의 관습을 부정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조각작품의 거의 모두가 인간에게 있어서 보기 위한 대상물이었으며, 감상자는 조각의 주위를 맴도는 것만으로 작품과의 관계를 지니게 된다.
아무리 공간적인 구성을 의식한 작품이라고 해도 인간에게 있어서 환경적인 존재이지는 못했던 것이다.


인간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조각작품. 건축가다운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철근 콘크리트로 된 사각형 입체를 만들고 있는 건축가의 머리속에는 결코 ‘살 수 있는 조각’에 관한 아이디어는 떠오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근대 건축양식을 부정하고 공간의 다이나미즘을 표현대상으로 하는 무대디자인의 실험을 거친 키슬러였기에 이 같은 조각적 환경건축의 구상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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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존슨 저택을 위한 ‘갤럭시’>

 

<갤럭시>라는 이름의 작품이 하나 더 있다.
최초의 갤럭시가 무대디자인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라는 이유에서 조각적 구성보다는 시각적 구성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면, 두 번째의 <갤럭시>는 애초부터 야외전시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생물적 이미지는 감소되는 대신 유기적인 형태의 추상성이 강조된다.
전체적인 구성에서도 커다란 V자형 구조를 띠어 공간의 다이나미즘이 강조된다.
이 작품에는 목재가 사용되고 있는데, 그 형태는 금속에 버금갈 정도의 강렬함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미국 현대조각은 초현실주의의 영향 탓인지 식물 또는 생물적인 형태를 띤 것이 많았고, 스케일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시각적 이미지에 편중되는 경향을 보이며, 상대적으로 작품의 공간성은 2차적인 문제였다.
그 같은 상황에서 키슬러의 작품이 지니는 공간성과 표현적인 구성력은 미국의 조각계에 유형무형의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두 번째의 <갤럭시>는 1951년에 제작되어 건축가 필립 존슨의 저택 정원에 놓여졌다.
필립 존슨은 바우하우스의 멤버였으며 미국에서 국제양식전도사 역할을 했던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제자이다.
그러한 존슨과 키슬러의 관련을 의아하게 여기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키슬러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1925년 이후(이것은 키슬러가 미국에 도착한 이후를 말한다. - 필자) 필립 존슨은 <엔드리스 하우스>의 정당성을 인정했습니다.
1950년 쿠츠 갤러리에서 개최된 전람회에서는 조각가, 화가, 건축가가 공동으로 작품을 제작했었습니다.
건축가로 초대된 것은 존슨, 그로피우스, 브로이어, 그리고 그 밖의 몇몇 건축가들뿐이었습니다.12


키슬러는 애당초 초대작가로 선정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초현실주의 조각가 데이빗 헤어로부터 자신의 작품을 위한 주택을 디자인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헤어와의 공동 프로젝트로 <엔드리스 하우스>이 출품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출품된 작은 <엔드리스 하우스> 모델을 근대미술관 건축부문 큐레이터였던 존슨이 미술관 소장품으로 구매하겠다고 요청했다.
이때 존슨은 키슬러의 <갤럭시>도 구매한 것 같다.
존슨 저택은 국제양식의 대표작으로도 유명한 <글래스 하우스 Glass House>(1949)이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영향을 받은 이 주택은 금속 프레임과 대형유리의 투명한 쉘터(shelter)에 의해 건축의 내부와 외부가 연속되어 있다.
당시로써는 최첨단의 건축기술을 이용해 인간이 유사 이래 추구해왔던 주거공간의 꿈을 정점에 이르기까지 달성한 예로도 유명한 건축이다.
유리로 된 커튼 벽이 거주자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는 이유에서 유리건축을 비난해온 키슬러의 조각이 존슨 저택의 정원에 놓이게 된 것은 아이러니일 것이다.
직선과 평면에 의해 최대한으로 단순화한 구성과 개방적인 공간처리.
이와는 상반되게 목재에 의한 유기적인 형태의 구성과 다이나믹한 공간처리 양상을 보인 키슬러의 조각, 주택이라는 이름의 물리적인 쉘터와 조각이라는 정신적인 쉘터 등, 이 같은 사실들은 언뜻 상호상반된 것으로 서로 부조화할 것이라는 생각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이 둘을 잘 관찰해보면 이복형제와도 같은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존슨 저택의 <갤럭시>는 1956년 벼락을 맞아 현존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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