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럭시>는 하늘을 응시하는 자의 건축이다
<갤럭시>의 특징은 뼈조각, 척추, 턱, 이빨과 같은 생물적인 형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조각가 자코메티가 <오전 4시의 신전>에서 시도한 얇은 봉 골조만으로 된 집과 그 곳에 매달려 있는 뼈조각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키슬러의 작품에서는 이 같은 형태가 엄격한 공간구조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같은 공간의 구조적 특성에 주목하여 키슬러의 <갤럭시>는 쟈코메티의 작품과 다른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특히 수직과 수평의 그리드에 의존하지 않는 비합리적인 공간구조를 띠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대해서 알프레드 H. 바는 「키슬러의 갤럭시 Kiesler’s Galaxy」(Harper’s Bazaar, 1952)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갤럭시>는 하늘을 응시하는 자의 건축이다.
그 플랜을 보면 놀라서 높이 쳐든 팔을 조합한 것처럼 보인다.
주요 축선(軸線)은 사파다 궁전에 있는 봇로미니에서 볼 수 있는 의사(疑似) 원급법과 같이 소실점을 향해 이상하게 비뚤어져 있다.11
키슬러는 이 <갤럭시>라는 조각을 통해서 사실상 건축물을 만든 것이다.
키슬러는 회화가 액자라는 틀에 갇혀 공간적 한계를 가지는 것을 의아해했다.
그는 회화를 공간적 존재로 다루기 위한 방법으로 액자라는 틀을 제거해버렸다.
이것은 페기 구겐하임의 ‘금세기 예술’ 화랑의 전시공간설계 및 그 후 두 번에 걸쳐 시도된 초현실주의전의 전시디자인을 통해서도 시도한 바가 있다.4)
이 같은 전시 공간 디스플레이는 결국 회화작품이 건축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는 인식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좌대라는 형식적인 기반 위에 올려져 있는 조각작품도 결국 ‘좌대에서 조각작품의 끝부분까지’를 작품공간으로 한다는 공간적 한계를 지닌다.
회화도 조각도 공간적 존재로 본다면 회화는 액자라는 틀 속에서, 조각은 조각 자체가 지니는 형식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키슬러의 출발점이었다.
여기서 키슬러는 이 같은 예술작품에 대한 인습적인 제약을 타파하고 그것들을 3차원의 물리적 공간으로 해방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그가 갤럭시를 시작한 이유이다.
물론 그는 몇몇 전람회의 회장구성을 통해 회화, 조각, 그리고 건축이 동등한 관계 하에 병립하는 공간연출을 실현한 바 있다.
그러나 그가 다루었던 회화나 조각이 내용이나 형태적 측면에 있어서 급진적인 것이었다는 사실과는 별도로, 그것들은 키슬러가 생각하고 있던 작품의 존재방식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여전히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틀이라는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자기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기존의 관습을 부정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조각작품의 거의 모두가 인간에게 있어서 보기 위한 대상물이었으며, 감상자는 조각의 주위를 맴도는 것만으로 작품과의 관계를 지니게 된다.
아무리 공간적인 구성을 의식한 작품이라고 해도 인간에게 있어서 환경적인 존재이지는 못했던 것이다.
인간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조각작품. 건축가다운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철근 콘크리트로 된 사각형 입체를 만들고 있는 건축가의 머리속에는 결코 ‘살 수 있는 조각’에 관한 아이디어는 떠오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근대 건축양식을 부정하고 공간의 다이나미즘을 표현대상으로 하는 무대디자인의 실험을 거친 키슬러였기에 이 같은 조각적 환경건축의 구상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