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기능주의에서 ‘바이오테크닉’으로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형태는 기능에 따른다’는 공식에 의해 탄생된 건축을 면밀하게 검토한 키슬러는, 근대기능주의의 디자인 철학으로는 무엇하나 새로운 기능이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근대기능주의란 오랜 장식을 비판하고 그 대신에 새로운 세공을 첨가한 것이며, 단지 인습적인 생활방식을 새로운 형태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키슬러는 기능이 형태에 따른다거나 형태가 기능에 따른다는 식의 논의는 결과적으로 문제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환경과 인간의 상호관련. 그 결과 새로운 가능성이 탄생한다.
그러나 이 같은 결과는 외부적인 여건에서 유추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생리학적으로 볼 때, 생체 내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이 환경을 통해서 표출된 것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16


인간의 진화는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이 환경의 변화에 의해 증대되기도 하고 감소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17


여기에 언급된 바와 같이 키슬러는 인간에게 내재된 힘과 그 잠재적인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 힘과 환경과의 상호관련을 통해서 새로운 의미를 지니는 ‘기능’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키슬러는 여기서 말하는 ‘기능’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이제 디자이너는 ‘기능’을 ‘힘이 활동하는 종(種)의 핵’으로 인식해야 한다.
형태는 기능에 따른다고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제 기능의 개념을 ⑴ 구조, ⑵ 기능, ⑶ 형태라는 정당한 단계에 따라 다시 배치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기능과, 모든 형태는 구조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18


건축디자이너는 사물이 아니라 힘을 다루는 직업이기 때문에 나는 디자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자 한다.
디자인은 개체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종(種)으로서의 인간’이 자연이 지니고 있는 힘에 일정의 목적을 지니고 신중하게 극성(極性)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이 같은 디자인에 관한 과학을 나는 ‘바이오테크닉’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것은 생명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인간이 개발해야 할 고유기능이기도 하다.19


여기에서 키슬러가 사용하고 있는 ‘바이오테크닉(Biotechnique)’이라는 단어는 생체공학을 지칭하는 ‘바이오테크닉스(Biotechnics)’와는 다르다.11)
키슬러도 언급한 바와 같이 생체공학이라는 단어는 19세기 말로부터 20세기에 걸쳐 활약한 패트릭 게데스에 의해 사용된 개념이다.
게데스는 생물학적 관점을 사회현상에 접목시킨 독창적인 학자인데, 루이스 멈포드는 그의 저서에서 여러 번에 걸쳐 그를 자신의 스승으로 여긴다고 쓴 적도 있다.
키슬러는 게데스가 사용한 생체공학이라는 단어는 ‘자연계의 건축수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의 건축수단’을 지칭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키슬러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은 점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은 두 개의 다른 원리에 기초하여 건축한다.
다시 말하면 자연은 세포분열을 통해 연속성이라는 고유의 목적을 달성한다.
반면 인간은 연속성이 없는 특별한 구조 속에서 다양한 부분을 접합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낸 접합체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아니라 자연에 의해서 컨트롤된다.
이같이 자연의 힘에 의해 컨트롤되는 접합체는 결국 만들어진 순간부터 붕괴를 시작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건축을 디자인할 경우 그 같은 붕괴과정을 의식하며 보다 강도 높은 저항성, 보다 높은 강성(剛性), 보다 용이한 유지, 보다 낮은 가격 등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같은 사실을 숙고한 결과 나는 ‘연속 구조체’를 개발했다.20


바이오테크닉은 자연의 구축방식을 모방한 것이 아니다.
그 예로 키슬러는 런던의 <수정궁Crystal Palace>을 들고 있다.
수정궁은 자연에 존재하는 유기적인 형태만을 이용했기 때문에 종국에는 붕괴되고 만다.
바이오테크닉은 단지 유기적인 형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키슬러의 ‘엔드리스’개념에 입각한 작품의 외형에 주목하여 그것을 기하학적인 국제양식과는 상반되는 표현주의적 유기체 건축으로 본다던가, 낭만주의의 산물인 환영건축의 하나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한편 바이오테크닉의 관점에서 인간의 신체기능을 분석해보면 인체의 어떤 부분도 한 가지 기능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무리 미세한 부분이라도 어떤 체계에 속해 있다.
따라서 각각은 계기능(系機能)의 핵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신체기능은 핵과 핵의 총체적 집합체이다.
어떤 디자인이든 바이오테크닉 개념에 입각한 복합적 기능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같은 바이오테크닉적 어프로치를 실증하기 위해 키슬러는 <움직이는 가정용 책장 Mobile Home Library>을 설계하고 실물대의 모형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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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움직이는 가정용 책꽂이>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키슬러가 「상호현실주의와 바이오테크닉에 관하여」를 통해 표명한 이론을 실천한 예로 <움직이는 가정용 책장>의 디자인을 들 수 있다.
컬럼비아 대학 건축과에 개설된 디자인 상호관련연구소(Design Correlation Laboratory)에서 학생들과 함께 1936년에서 38년에 걸쳐12)제작된 이것을 통해 키슬러는 산업생산품의 라이프사이클 및 공업기술의 인간공학적 접근 등에 관한 그의 이론을 실증하고 있다.


바이오테크닉에 기초한 이 디자인은 우선 진보적인 디자인 수법을 적용하고 있다는 데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디자인에 앞서 책이라고 하는 ‘정보용기(情報容器)’에 관한 연구와 역사적 관점에서 그것을 소장하는 행위의 의미 등에 대한 조사가 선행되었다.
키슬러의 디자인은 일반적인 경우와 같이 기존의 형태나 형식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았다.
키슬러는 기술환경을 구성하는 모든 도구에 관해 그것이 왜 발생했는가를 추적하고, 그 결과 유추된 대상물의 개념이 명확해진 후에야 디자인을 시작한다.


그는 우선 책장의 역사적 변화과정을 검토한 결과 인쇄물의 형식 변화와 책장형태의 변화가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아가서 오늘날 가정에서 책과 그 밖의 인쇄물이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유형이 유추되었다.


⑴ 일시적인 소장

⑵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소장

⑶ 소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소장

⑷ 사장(死藏)


이상의 4가지 단계는 가정에서 일어나는 서적의 물리적, 목적론적, 경제적 폐퇴(廢頹)과정과도 일치한다.
일종의 라이프사이클이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은 서적 이외의 모든 사물에도 적용 가능하다.


한편 책장의 형태를 디자인하기 위해 책장과 그것을 이용하는 인간의 동작에 관해 조사했다.
책장을 이용할 때 인간의 시선, 손, 팔, 몸통, 그리고 다리 등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분석했다.
책장에서 책을 꺼내고 그것을 원래의 자리에 되돌려놓는 행위는 각각의 신체기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책장의 형태는 인간의 동작에 대응하는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동작과 그것에 대응하는 책장의 기능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 상호현실주의의 중심개념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상관관계를 충족시키는 도구를 디자인하는 것이 디자인 상호관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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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을 지니는 책장이 개발되었다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움직이는 가정용 책장>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책의 증가와 감소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약 250권을 넣을 수 있는 책장을 하나의 단위로 하고 그것을 조합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상에서 소개한 조사와 디자인의 결과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니는 책장이 개발되었다.

(1) 공간:10인치에서 12인치에 이르는 일반적인 크기를 15인치로 확대시켜 책의 수용 량을 증가시켰다.
⑵ 유연성:조합된 부분 및 각 부분의 유니트가 360°회전 가능하다. 조합방법은 물론 위치의 이동이 자유롭다.
따라서 각 유니트의 부착 및 제거가 용이하여 수용 량의 증감이 가능하다.
⑶ 건설 시스템:이용 가능한 제조설비와 현재의 가격수준이 디자인에 반영되었다.
⑷ 방진(防塵) 컨트롤: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책은 마치 인간과도 같이 외부 공기상태에 따라 수명이 좌우된다.
문짝을 떼낼 수 있으므로 언제나 환기가 가능하다.
먼지는 투명한 차폐판(遮蔽板)으로 차단할 수 있다.
⑸ 내용분류:이 책장의 유니트는 책의 크기에 따라서도 내용에 따라서도 분류 가능하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⑹ 피로의 경감: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고려하여 각 유니트 및 조합된 상태 등을 고려한 디자인이 적용되고 있으므로 이용자의 스트레스를 최소화시킬 수 있다.21

이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장을 사용할 경우 책 하나를 찾기 위해서 책상에 올라갈 필요가 없다.
책은 앞뒤로 배치되어 뒤쪽 열의 책장은 유니트를 회전시킴으로써 순식간에 앞으로 나오게 된다.
장서의 수는 250권에서 300권까지 늘일 수 있다.
책장의 조합은 모든 유니트가 수분 만에 끝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재료, 가공기술, 가격 면에서도 당시의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어서, 가정용 책장의 수요를 예상한 설계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 같은 책장의 발생학적 조사와 실제 디자인상의 체크 포인트를 모아둔 것이「‘움직이는 가정용 책장’의 신진대사표」이다.
이 챠트는 ‘상호현실주의’과 ‘바이오테크닉’의 과학적 원리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이 차트는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기술환경을 형성하는 모든 도구의 분석에도 응용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같은 키슬러의 이론은 오늘날의 디자인에 적극적으로 응용되고 있는 인간공학(Ergonomics)13)의 원류로도 볼 수 있다.
미국의 건축가이며 환경론의 맥락에서 건축을 논하고 있는 제임스 마스톤 피치는 『미국의 빌딩: 환경적인 힘, 그것을 형성하는 힘 American Building The Environmental Forces That Shape it』에서 키슬러의 연구를 선구적인 예로 지목했다.

후에 키슬러는 상호현실주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형태는 기능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다.
형태는 비전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전은 현실에서 탄생한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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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개의 언어들이 내 주위를 맴돌고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키슬러와 동향인 빈 출신의 문필가 후고 폰 호프만스탈은 세기의 전환기인 1901년부터 1902년에 걸쳐 대단히 흥미로운 에세이 『첸더스 경(卿)의 편지』를 적은 바 있다.
가공의 인물을 등장시켜 다가올 시대를 예견하고 있는 이 책은 독일 문학사상 20세기의 문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서기 1603년이라는 과거시점에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를 끈다.
이 책에서 호프만스탈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학적 전통 또는 유럽인들이 교양의 기준으로 여기고 있던 고전주의사상을 축으로 하나의 통일된 세계관을 유지하고 있던 유럽문화의 붕괴상태’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근대 이후 유럽은 자기 확인 가능성을 시사하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구호 아래 일치단결하고 있었다.
호프만스탈은 이 같은 유럽의 위대함과는 별도로 인간존재의 모든 측면에서 허위와 결함투성이였던 당시의 상황을 지적하고자 했다.


모든 것이 부분으로 해체되고 그 부분이 다시 부분으로 나뉘어져서 이제 하나의 개념으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개개의 언어들이 내 주위를 맴돌고, 그것들이 응결되어 줄곧 나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나도 그것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지켜보면 볼수록 현기증이 나는 소용돌이 같은 것입니다.
끊임없이 빙빙 도는 그것을 통과하면 허무에 이를 수밖에 없는 소용돌이.1


유럽은 언어의 해체현상 속에서 스스로를 지탱해왔던 원리를 잃어버렸다.
회화나 조각 등의 미술 분야에서 어떤 대상물의 시각적 재현이라는 전통이 붕괴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인상주의(Impressionism)를 시작으로 입체파(Cubism), 미래파(Futurism), 다다이즘(Dadaism) 등을 거치면서 발전된 회화의 혁명사는 그것 자체가 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왔던 전통적인 미술사의 붕괴를 의미하는 동시에, 붕괴상황을 실증하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첸더스 경의 편지』가 출판된 뒤 유럽은 세계적 규모로 확대된 혁명과 전쟁을 경험하게 된다.


입체파가 탄생시킨 파피에 콜레(papier coll?, 콜라주(collage) 등의 표현기법은 표현주의(Expressonism), 미래파, 다다이즘에 이르러 포토몽타주(photomontage), 타이포그래피(typography) 등으로 발전된다.
활자, 사진, 인쇄 등 매스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발달은 정보의 양적 팽창을 유도했다.
당시까지 원근법은 어떤 사물이나 공간을 시각적으로 기록하기 위한 주된 수단이었다.
이것으로부터의 탈피를 목적으로 시작된 콜라주는 이미지의 해체과정에서 발견된 새로운 조형문법으로 공인받게 된다.
나아가서 러시아 구성주의(Russian Constructivism), 데 스틸(De Stijl), 바우하우스(Bauhaus), 초현실주의(Surrealism) 등에서도 부분이나 단위(unit)의 재구성기법이 탐구되기 시작한다.
일체의 구체적인 이미지를 배제하고 기본적인 요소인 추상적 형태만이 존재하는 구성 원리를 추구했던 이 같은 동향의 목표는 새로운 리얼리즘의 구축에 있었다.


이 같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작가로는 리시츠키, 로드첸코, 타틀린, 가보, 펩스너, 말레비치, 모홀리-나기, 반톤게를루, 반 되스브르그, 몬드리안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 작가와 그들이 참여했던 운동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경향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키슬러가 ‘갤럭시’라고 부른 구성수법을 들 수 있다.
같은 내용을 키슬러의 독자적인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상호현실주의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앞서 열거한 작가들과는 다르게 키슬러는 그 같은 원리를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작품과 환경연출에 이르기까지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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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갤럭시’의 발단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키슬러가 ‘갤럭시’라고 명명한 작업의 발단은 19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키슬러가 의식적으로 행한 최초의 조형 활동이기도 하다.
여기에 대해서 키슬러는 1956년 그의 첫 번째 부인 스테피와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도 기억하고 있는 것과 같이 제1차 세계대전 중 나는 비인의 슈발첸베르그 광장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의 신문반에서 일한 적이 있지.
그 일 덕분에 스위스의 신문을 읽을 수 있어서 휴전협정 조약체결 몇 일전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어.
그래서 나는 사무소에 들어가 회색 골판지를 이용해 커다란 갤럭시를 만들기 시작했지.
그것들은 흰 트레싱 페이퍼를 덮은 약 20매의 불규칙적인 크기들이었는데 나는 그것들을 각각 다른 간격으로 벽에 붙였어.
그리고 그 위에 검은 색으로 신체의 프로포션이 점점 크고 높게 늘어나는 장면을 그려 넣었지.
스테피, 기억하겠지?”


“물론 확실히 기억하고 있지요.”


“그리고 12년 전 나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 파악된 개성 있는 초상화를 그렸다.
갤럭시의 아이디어가 부활된 것이야.
E. E. 커밍스와 마르셀 뒤샹, 그리고 앙리 로제의 초상화가 그것이지.”2


여기에 소개한 키슬러의 회상에 의하면 최초의 갤럭시는 거의 직감적인 수준의 영감에서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같이 몇 개의 유니트가 각각 상관관계을 지니는 이른바 ‘상호관련’개념은 이후 키슬러의 모든 작업에 적용되기 시작한다.
키슬러가 행한 작업의 핵이라 할 수 있는 개념이 여기서 출발된 것이다.
예를 들어 1923년에 최초의 발상을 보인 ‘엔드리스’는 이 책의 전반부에서 이미 소개한 것처럼 구형(球形) 극장안(案)을 통해 제시된 개념이다.
그런데 ‘엔드리스’는 장력에 의해 유지되는 각체구조(殼體構造)에 기반을 두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연속적인 표면에 의한 일체구조(一體構造)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갤럭시는 분리된 각각의 유니트 사이에 작용하는 연속적인 힘에 발상의 기저를 두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각체구조는 표면의 연속성을 통해 그곳에 작용하고 있는 힘의 관련을 가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반면 갤럭시는 힘의 관련이 비가시적이기 때문에 각 유니트의 연속성은 인간에게 지각된 조형인식에 의해 파악된다.


키슬러의 갤럭시는 사각형의 캔버스 평면상에서 발생하는 조형적인 균형을 추구했던 몬드리안의 회화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같은 데 스틸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몬드리안이 2차원의 평면을 표현대상공간으로 한정했던 데 반하여, 키슬러는 3차원의 구체적인 공간을 구성의 장으로 선택했다.
키슬러와 몬드리안은 데 스틸의 기본 기념을 각각 독자적인 방향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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