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개의 언어들이 내 주위를 맴돌고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키슬러와 동향인 빈 출신의 문필가 후고 폰 호프만스탈은 세기의 전환기인 1901년부터 1902년에 걸쳐 대단히 흥미로운 에세이 『첸더스 경(卿)의 편지』를 적은 바 있다.
가공의 인물을 등장시켜 다가올 시대를 예견하고 있는 이 책은 독일 문학사상 20세기의 문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서기 1603년이라는 과거시점에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를 끈다.
이 책에서 호프만스탈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학적 전통 또는 유럽인들이 교양의 기준으로 여기고 있던 고전주의사상을 축으로 하나의 통일된 세계관을 유지하고 있던 유럽문화의 붕괴상태’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근대 이후 유럽은 자기 확인 가능성을 시사하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구호 아래 일치단결하고 있었다.
호프만스탈은 이 같은 유럽의 위대함과는 별도로 인간존재의 모든 측면에서 허위와 결함투성이였던 당시의 상황을 지적하고자 했다.
모든 것이 부분으로 해체되고 그 부분이 다시 부분으로 나뉘어져서 이제 하나의 개념으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개개의 언어들이 내 주위를 맴돌고, 그것들이 응결되어 줄곧 나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나도 그것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지켜보면 볼수록 현기증이 나는 소용돌이 같은 것입니다.
끊임없이 빙빙 도는 그것을 통과하면 허무에 이를 수밖에 없는 소용돌이.1
유럽은 언어의 해체현상 속에서 스스로를 지탱해왔던 원리를 잃어버렸다.
회화나 조각 등의 미술 분야에서 어떤 대상물의 시각적 재현이라는 전통이 붕괴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인상주의(Impressionism)를 시작으로 입체파(Cubism), 미래파(Futurism), 다다이즘(Dadaism) 등을 거치면서 발전된 회화의 혁명사는 그것 자체가 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왔던 전통적인 미술사의 붕괴를 의미하는 동시에, 붕괴상황을 실증하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첸더스 경의 편지』가 출판된 뒤 유럽은 세계적 규모로 확대된 혁명과 전쟁을 경험하게 된다.
입체파가 탄생시킨 파피에 콜레(papier coll?, 콜라주(collage) 등의 표현기법은 표현주의(Expressonism), 미래파, 다다이즘에 이르러 포토몽타주(photomontage), 타이포그래피(typography) 등으로 발전된다.
활자, 사진, 인쇄 등 매스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발달은 정보의 양적 팽창을 유도했다.
당시까지 원근법은 어떤 사물이나 공간을 시각적으로 기록하기 위한 주된 수단이었다.
이것으로부터의 탈피를 목적으로 시작된 콜라주는 이미지의 해체과정에서 발견된 새로운 조형문법으로 공인받게 된다.
나아가서 러시아 구성주의(Russian Constructivism), 데 스틸(De Stijl), 바우하우스(Bauhaus), 초현실주의(Surrealism) 등에서도 부분이나 단위(unit)의 재구성기법이 탐구되기 시작한다.
일체의 구체적인 이미지를 배제하고 기본적인 요소인 추상적 형태만이 존재하는 구성 원리를 추구했던 이 같은 동향의 목표는 새로운 리얼리즘의 구축에 있었다.
이 같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작가로는 리시츠키, 로드첸코, 타틀린, 가보, 펩스너, 말레비치, 모홀리-나기, 반톤게를루, 반 되스브르그, 몬드리안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 작가와 그들이 참여했던 운동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경향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키슬러가 ‘갤럭시’라고 부른 구성수법을 들 수 있다.
같은 내용을 키슬러의 독자적인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상호현실주의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앞서 열거한 작가들과는 다르게 키슬러는 그 같은 원리를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작품과 환경연출에 이르기까지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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