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기술환경과 도구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물에게 ‘환경’은 지리적인 것과 동물적인 것이 있다.
그런데 인간은 기술환경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환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기술환경과 인간이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다시 말하면 기술환경이 인간에게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대하여 연구하는 학문은 없다.
키슬러는 이 같은 연구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디자인에 관한 새로운 이론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 오늘날의 현실을 개탄할 필요는 없다.
중세의 과학자들이 말(馬)이 벌새를 낳고, 나귀는 벌새의 변종을 낳고, 치즈는 쥐(鼠)를 낳는다고 생각했던 것과 같이 현대인은 산업이 기술환경을 탄생시켰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기술환경은 인간의 요구, 즉 절대적인 요구와 모방적인 요구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기술환경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그것은 인간이 자연을 보다 잘 제어하기 위하여 개발한 ‘도구’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도구’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여기에는 나름대로의 의도가 있다.
일반적으로 ‘도구’와 ‘기계’의 차이는 그것을 조작하는 힘이 인력(人力)인지 주변 환경에 존재하는 힘-자연에 존재하는 물을 이용한 인공의 전기 등-인지에 따라 구별된다.
그러나 기술 분야에 따라 각양각색인 ‘도구’의 차이점에 주목하기보다는, 기술적 발전 전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나는 ‘도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자 한다.
‘도구란 자연의 힘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인간이 창조한 모든 수단’이라고. 나는 ‘기계’보다는 ‘도구’라는 단어가 좀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도구’ 개념은 기계가 탄생했던 시점으로 우리들을 인도해준다.
이것으로 보다 높은 생산성을 성취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시킨다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이 같은 입장에서라면 인간의 생존경쟁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 다시 말하면 인공적인 기술환경의 일부-셔츠에서 피난소까지, 대포에서 시(詩)까지, 전화에서 회화까지-가 ‘도구’로 인식될 수 있다.
또한 어떠한 ‘도구’도 단독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기술적 발안(發案)은 ‘현실과 함께(co-real)’하는 것이다.7
이상의 설명보다 키슬러가 말하는 ‘도구’의 개념정의는 훨씬 더 폭이 넓다.
그는 ‘도구’의 발전 형태에 유전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발전 형태에 따라 나타나는 ‘도구’의 타입에는 어떤 원칙적인 힘이 작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같은 ‘도구’에 관한 질적 고찰은 그가 1936년부터 지도한 ‘디자인 상호관련 연구소’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는 디자인 상호현실주의 연구소에서의 연구결과를 차트로 정리했다.
여기서는 칼(刀)이라는 도구가 대상으로 선택되었다.
기술환경은 인간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며, 유전의 법칙에 따라 기술은 발전한다.
특히 산업생산 시스템 하에서 생산된 ‘도구’를 3가지 타입으로 분류하여 생각했다.
표준 타입:절대적인 요구에 의해 전개된다.
변종 타입:보조적인 수단을 위해 표준 타입으로부터 진화한다.
모방 타입:앞의 두 가지 타입으로부터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파생된다.
이것은 앞의 두 가지 타입 보다 훨씬 더 큰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재료사용상의 효율 결여 및 디자인 또는 사용된 재료가 변경되었다는 점에서 표준 타입 및 변종 타입과는 구별된다.
이상의 3가지 타입은 각각 나름대로 발전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표준 타입은 과학적 지식으로부터 생성된다.
변종 타입은 표준 타입으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어떤 조건에 의해 자연스럽게 파생된 것이라는 점에서 나름대로 타당성을 찾아볼 수 있다.
모방 타입은 우연히 발생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사회 환경에 대한 무지의 산물이다.
모방 타입은 다른 것들보다 넓게 퍼져 있으며, 단기간에 소멸되므로 교체가 빠르다.
그 결과 에너지의 분산이 진행되어 새로운 표준타입의 출현 시기를 늦추거나, 표준 타입이 보다 효율적인 레벨에 도달하는 시기를 늦출 정도의 파괴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인간의 기본적인 요구를 충족시킨다는 의미에서라도 모방 타입을 제거하고, 변종 타입을 바꾸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산업화 사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재조정은 모방 타입을 만들어내고 있는 (인력 및 기계적인 힘을 포함하는) 모든 힘을 표준 타입과 변종 타입의 영역에 흡수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생산성이 증가될 것이다.8
도구와 기계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가능하다.
윌리엄 모리스가 기계기술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수공업을 통해 실천가능한 공예의 부활을 주장했었던 것도 기계제품의 질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바우하우스에서 그로피우스가 기술직(craft)을 중요시한 것도 산업사회에서 생산된 제품의 질을 높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작업에 의한 제품이라고 해서 전부 질이 좋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질의 문제를 단순히 파악해서 어떤 제품이 기계에 의한 것인지 수작업에 의한 것인지, 다시 말하면 기계 제작인지 도구 제작인지를 따진다고 해도 산업사회가 직면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답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도 현실을 직시하는 키슬러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키슬러는 기계와 도구를 단지 대상물로 인식하는 수준에서는 그것으로부터 파생하는 문제점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날이 변화하는 산업사회에서 경제적인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생산된 모든 제품이 인간과 환경 속에서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에 주목했다.
키슬러가 분류한 세 가지 타입은 제품을 만들어낸 수단의 문제, 다시 말하면 기계생산인지 수작업인지와는 무관한 것이다.
또한 전기스탠드에서부터 건축물까지 3가지 타입 중에 어느 하나의 그룹에 분류 가능하다.
여기서 문제는 어떤 대상물이 어느 타입에 속하는가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과, 모방 타입 제품을 가능한 한 표준 타입과 변종 타입으로 흡수시킬 수 있는 방법론의 탐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