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호현실주의의 탄생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오늘날 근대건축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는 기능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근대기능주의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결여된 채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하지만, 근대기능주의에 논리적 결함이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근대기능주의 비판 그 자체가 아니다.
그보다는 근대기능주의를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제시해야 한다는 데에 좀더 관심이 있다.
근대기능주의가 대두된 이후 이미 반세기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지난 50여 년 간 근대기능주의라는 건축개념은 ‘국제양식’이라고 하는 시각적 형식을 통해 보편화되어 왔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근대기능주의는 형성 당시의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기능주의는 20세기 건축양식의 주류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키슬러의 기능주의 비판은 근대기능주의가 유럽에서 미국으로, 다시 말하면 ‘건축의 산업화’를 실천하는 데 적절한 조건을 갖춘 미국으로 활동의 중심을 옮기기 시작한 1930년대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키슬러의 근대기능주의 비판은 1930년 발표한 선언서를 통해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지금 필자의 손에 들려있는 이 선언서는 7장의 거친 종이를 스테이플러로 철한 볼품없는 모양을 하고 있다.
본문도 타이프로 친 것을 등사 인쇄한 것인데, ‘CORREALISM’이라는 영문제목만이 고무판으로 찍혀 있다.
그 밑에 트레이드마크가 달려 있고, “이 논문의 사용 및 판매에 관해서는 모든 부분에 있어서 권리를 제한한다”고 적혀 있다.
그 옆에는 10센트라는 가격이 명시되어 있다.
키슬러의 상호현실주의 선언서는 그 내용의 중요성에 비해 소박한 형태로 발표된 것이다.
겉보기와는 달리 이 팜플렛은 키슬러가 주장한 디자인 이론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표지에는 “프레데릭 키슬러, 상호현실주의, 바이오테크닉 - 디자인을 위한 새로운 접근”라고 적혀있다.2)
그리고 표지 안쪽 페이지에는 “이 ‘상호현실주의’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앞으로 팜플렛, 책, 논문, 건축상의 토픽, 과학, 예술, 산업에 대해서, 나아가서 사회경제생활 전반에 관한 토픽 등을 포함하는 흥미 있는 테마를 다루어나갈 것”이라고 적고 있다.
키슬러의 이 같은 예고는 1937년에서 1939년에 걸쳐 『아키텍추얼 레코드Architectural Record』지에 발표된 ‘디자인 상호관련(Design Corration)’에 관한 논문 6편에 의해 실현된다.3)
한편 앞장에서 다룬 ‘바이오테크닉’을 중심으로 한 ‘디자인 상호관련’에 관한 언급으로는 1934년 <공간주택>에 관하여 쓴 「<공간주택>에 관한 노트 Notes on Architecture, The Space House: Annotations at Random」(Hound and Horn, vol.7, No.2, Jan.-Mar. 1934, pp. 292-297)를 들 수 있다.
키슬러가 1930년 발표한 「상호현실주의 선언」이 활자로 인쇄된 것은 1939년 9월 잡지 『아키텍추얼 레코드』에 게재된 논문 「상호현실주의과 바이오테크닉에 관하여/건축디자인에 관한 새로운 접근방법에 관한 실험」을 통해서였다.
이 논문은 키슬러가 1930년 이후 행해온 연구와 실험, 특히 1936년부터 1938년까지4) 컬럼비아 대학 건축과에 개설된 ‘디자인 상호관련연구소’에서 행해진 <움직이는 가정용 책장>의 설계와 시작(試作)을 통해서 산업사회에서 디자인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검토한 후에 쓴 것이다.
이것을 정독해보면 상호현실주의는 단지 디자인에 관한 이론적 제안을 넘어서서 사회과학적 측면을 고려한 대단히 설득력 있는 문헌임을 알 수 있다.
이 논문은 1938년 6월 메사추세스 주의 공과대학에서 열린 심포지엄 ‘과학과 디자인’에서 발표되기도 했다.5)
다소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고 있으나 1943년 초현실주의 계열의 잡지 『VVV』에서도 「건축적 계획을 위한 접근으로서의 디자인 상호관련」이라는 제목으로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6)
또한 1949년 발표된 「상호현실주의 선언」(Boulogne, Architecture d’Aujourd’hui, pp.80-105)에서는 <움직이는 가정용 책꽂이>와 <프리-포름>, 그리고 두 개의 초현실주의 전람회장 설계 등의 실례를 들면서 상호현실주의를 설명하고 있다.7)
1930년 이후 약 20년에 걸쳐 발표된 상호현실주의는 키슬러의 독자적인 디자인 이론으로 그가 행한 근대기능주의 비판 및 실천을 뒷받침하는 논리적 근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