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바우하우스가 하나의 ‘운동’이었다고 한다면, 그 과정에서 나타난 시행착오는 당시의 사회적 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5)
또한 이 운동에 참가한 멤버들이 강한 개성의 소유자였다는 점도 시행착오의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그로피우스의 고희(古稀)를 기념한 연설에서 “바우하우스는 하나의 이념이었다.”라고 회고했는데, 그의 말대로 바우하우스가 하나의 ‘이념’이었다고 한다면 그 원인으로 먼저 멤버들이 강한 개성의 소유자들이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919년 4월 바이마르 국립 바우하우스 창립 당시 그로피우스가 발표한 선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모든 시각예술은 궁극적으로 ‘건축적 형태(Bau)’를 지향한다.6)
과거에는 미술의 고귀한 기능은 건물을 장식하는 데 있었으며, 미술은 위대한 건축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건축가, 조각가, 화가들은 다시 한 번 기술직(크래프트)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예술은 특정의 ‘직업’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본래 예술가와 기술자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예술가란 기술직의 발전 형태에 불과하다.
(중략)
여기서 우리는 예술가와 기술자 사이에서 상대를 무시하는 벽을 만드는 것과 같은 직급차별이 없는 기술직의 새로운 길드를 만들어보지 않겠는가!6


바우하우스의 교육과정에서도 여기에서 언급된 기술직 교육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술을 배우기 위한 공방이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었다.7)


a. 조각가, 석장(石匠), 벽토세공장(壁土細工匠), 목조장(木彫匠), 도자기장,
석고세공장(石膏細匠)

b. 철장(鐵匠), 금구장(金具匠), 주물장(鑄物匠)

c. 가구제조장

d. 장식화장(裝飾畵匠), 유리채색장, 모자이크 세공장, 에나멜장

e. 동판화가, 목판화가, 석판화가, 미술인쇄장, 조금장(彫金匠)

f. 직조장(織造匠)


그렇다면 그로피우스가 이같이 수공기술을 중요시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 이유를 생각하기에 앞서 우선 그것이 윌리엄 모리스가 미술공예운동을 통해 주장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은 기계기술의 산물인 공업생산품에 의해서 생활주변 환경이 기계화되어간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의 향방을 결정하는 전제조건의 하나로 우선 공업기술을 긍정했다.
그가 뮌헨 공과대학을 졸업한 후 실무에 뛰어든 것은 피터 베렌스의 사무소였는데, 이때 베렌스는 이미 AEG 전기회사공장의 설계와 그곳에서 양산되는 조명기구의 모델을 디자인했었으며 나아가 회사와 제품의 PR 카탈로그나 포스터디자인에 이르기까지 활동 폭을 넓히고 있었다.
이 시기에 그로피우스는 AEG 사장에게 주택건축의 공업화를 제안했는데, 이 제안의 취지는 주문시공주택의 코스트 업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건축 재료의 규격화와 양산체제를 갖추어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예술과 기술의 통합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 근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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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 설립 당시의 목표가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의 교육목표에 기술직의 기초훈련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산업기술을 긍적적으로 수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는 기술직이 기존의 저급한 레벨에 머무르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예술가 리오넬 파이닝거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등을 교사로 초빙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의 발족 당시에는 예술과 산업기술의 통합이라는 그로피우스의 목적에 걸맞은 인재는 발견하지 못 했다.
따라서 기술직에 기초를 둔 교육과정을 표명하는 편이 그로피우스의 당면목적에 가까웠기 때문에 예술과 산업기술의 통합 프로그램은 뒤로 미루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바우하우스는 1923년 요하네스 이텐과 로타르 슈라이어의 사임과 함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이텐의 사임과 함께 바우하우스는 새로운 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새로운 노선의 기폭제가 된 것은 모홀리-나기였다.
초기에 독일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은 나기는 러시아 구성주의의 카시미르 말레비치나 엘 리시츠키의 활동을 알고 나서부터 점점 비대상 회화를 지향하게 된다.
나기를 통해 바우하우스에 구성주의 사상이 흘러들어간 셈이다.
1923년에는 바우하우스 창립 4주년을 맞이하여 바우하우스의 교육성과를 바이마르 정부에 발표하기 위한 바우하우스 전람회가 열렸다.
이미 1922년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의 새로운 향방을 대변하는 슬로건을 발표했는데, ‘예술과 기술 - 새로운 통합’이 그것이다.
이것이 바우하우스의 지표가 되면서 기계기술을 배경으로 탄생한 ‘산업미술(Industrial Art)’이 시민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특히 바우하우스 전람회 이후 주택설계는 물론, 가구나 집기 등 제품디자인 분야의 활동이 활성화되었다.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 설립 당시의 목표가 ‘건축적 형태’를 통한 기술직의 통합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바우하우스 전람회를 기념해서 실험주택의 설계와 건설이 행해졌는데, ‘한 세대가 살기 위한 표준주택’을 테마로 한 이것은 후에 바우하우스 최초의 건축물로 기록된다.
이 건물의 특징은 중앙에 거실을 두고, 주위에 침실, 어린이방, 식당, 부엌, 현관 등이 개별적으로 구분되어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바우하우스 공방의 오리지널 디자인이 양산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설비는 물론 인테리어디자인도 합리적인 설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바우하우스 초기의 실험주택은 평면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가정생활의 기능을 목적별로 분류하고 그에 따라 공간을 분할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단지 기능적 공간의 집합체가 되어버렸다.
여기에 키슬러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근대 기능주의의 맹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1923년 이후 바우하우스는 보다 적극적으로 제품디자인 분야의 활동을 전개한다.
이를 위해서 각 부문별 공방의 역할이 필요했다. 특히 도자공방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기능과 형태의 디자인은 베를린 국립도자기제작소의 양산대상이 되기도 했다.
또한 모홀리-나기, 마르셀 브로이어 등이 지도했던 금속공방은 금속을 가공한 조명기구나 가구 등의 새로운 디자인을 탄생시켰다.
1926년의 <매달린 램프>도 대량생산된 바우하우스 제품 중 하나이다.
또한 금속 파이프를 구부려서 가공한 의자도 기능적 형태를 고취시키고자 하는 바우하우스의 성격을 대변하는 예이다.
마르셀 브로이어의 <안락의자 B3>(1926)는 게리트 리트벨트의 <적과 청의 암 체어>(1918-1923)의 구조를 금속과 가죽을 응용해서 실현하고 있는데, 보다 세련되게 디자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이 충실한 성과를 보이던 바우하우스 내부와는 달리 외부상황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바이마르 바우하우스가 폐교되고 데사우로 이동한 1925년 이후에도 이 같은 생산 활동의 강화가 주요 목표였다.
1926년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 생산 활동의 원칙’을 발표한다.


바우하우스는 대단히 단순한 가구용품으로부터 이미 완성된 거주공간을 포함하는 오늘날의 주택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한다.


모든 일상생활용품에 대해 표준형을 만드는 것은 사회적 요청이다.


바우하우스 공방은 기본적으로 연구소와 같은 성격을 띤다.
여기서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제품의 대량생산에 적합한 프로토타입(prototype)이 신중하게 개발되고 끊임없이 개량되고 있다.7


그러나 바우하우스의 이 같은 개념이 현실사회에 얼마만큼 적용 가능한 것이었는지는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우하우스는 어디까지나 ‘학교’였으며, 그 지도적 이념을 실질적으로 실천하는 것도 학교라는 유토피아 내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을 배경으로 사회체제의 개혁을 실천목표로 삼았던 구성주의와는 달리 바우하우스는 이상의 제시와 실험에 그쳤다는 견해도 있는데, 그 원인은 그들의 이념을 받아들이는 사회에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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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데 스틸과 디자인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리더인 반 뒤스부르크가 1917년 데 스틸 그룹을 결성했을 때, 멤버 중에는 이미 건축가로서 활동하고 있던 로베르트 반 호프나 야곱스 요하네스 아우트가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데 스틸의 주요활동에 디자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데 스틸은 멤버의 가입과 탈퇴가 빈번했는데, 키슬러가 참가한 것은 1923년이다.


레이너 벤함은 『제1기계시대의 예술 Theory and Design in the First Machine Age』(Architectural Press, London, 1960)에서 데 스틸을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시기와, 리시츠키와 키슬러가 참가하는 등 국제적으로 활동의 폭을 넓혔던 시기로 양분하고 있다.


몬드리안과 반 뒤스브르크의 회화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데 스틸의 조형적 특징은 기본 형태에 의한 동적 구성에 있었다.
특히 사각형, 직선과 같은 기하학적 형태들이 일정 공간에서 상호간에 어떠한 관계를 갖는가에 주목했다.
몬드리안의 경우 표현대상공간을 2차원의 평면으로 한정하고 있었으나, 반 뒤스부르크는 3차원의 현실공간을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한편 폴 오버리는 잡지 『데 스틸 De Stijl』에서 리트벨트의 유명한 <적과 청의 암 체어>(1918-1923)8)에 대해서 “데 스틸의 기본 원리를 가장 간결하게 들어낸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의 말대로 리트벨트는 반 뒤스부르크나 몬드리안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데 스틸의 조형원리를 의자라는 형태를 빌어 구체화하고 있다.
라이트의 영향을 받은 리트벨트는 또 한 사람의 데 스틸 건축가 반 호프의 건축양식보다 요소적인 구성에 의한 순수성이 돋보이는 이 작품을 통해 데 스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적과 청의 암체어>과 함께 1919년 발표된 리트벨트의 <식기대>가 데 스틸 가구디자인의 대표적인 예라고 한다면, 1923년에 제작된 반 뒤스부르크와 반 에스트렌의 공동작품 <주택계획안>은 건축적 표현을 통해 데 스틸의 조형원리를 실천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역시 수평과 수직의 공간적 관련성에 의한 요소적 구성이 돋보이는 이것은 건축공학적 또는 구조적인 측면에 주목한 결과라기보다는 데 스틸의 조형원리를 건축적 표현을 통해 실현한 예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그런데 반 뒤스부르크는 1920년대 중반부터 조화나 균형 등에 흥미를 잃게 된다.
반 뒤스부르크의 회화에 대각선이 도입되기 시작했으며, ‘대항구도(counter composition)’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그는 “‘대항구도’에서 면의 균형은 지금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각각의 면은 주변 공간의 일부이다.
따라서 구성은 면과 면 사이의 관련보다는 서로간의 장력현상에 주목해야 한다.”라고 했다.
‘대항구도’에서는 각각의 요소가 마치 장력처럼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대항적인 움직임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반 뒤스브르크는 면과 면이 조합되어있다고 해서 ‘역동적인 균형’이 발생한다고는 단정할 수 없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딱딱한 조화’에 그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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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뒤스부르크는 반 에스트렌과 함께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반 뒤스부르크는 반 에스트렌과 함께 1923년 암스테르담 대학 홀의 실내디자인을 계획했다.9)
이 계획에서 처음으로 현실적 건축공간에 대각선 구성이 등장한다.
이 같은 구성방법은 결국 1927년부터 1928년에 걸쳐 아르프 부부와 공동 제작한 시네마 카페 <아우베테 Aubette>10)에 계승된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점은 건축공간의 기본적인 기호라고 할 수 있는 바닥, 벽, 천장 등의 수직과 수평적인 요소를 무시했다는 데에 있다.
벽과 천장이 면하는 부분을 무시하고 디자인상의 구성요소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장력에 주목한 공간을 창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같은 반 뒤스부르크의 실험적인 실내공간의 구성 원리는 기본적으로 리시츠키의 ‘프로운(Proun)’ 및 키슬러의 ‘연속적 장력(Continuous construction)’과 근접한 것이다.


리트벨트는 1925년 라디오 부품이 전부 노출되어 있는 라디오 캐비닛을 디자인하거나11), 기하학적 추상형태를 한 탁상 등을 디자인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924년 유트레히트(Utrecht)에 건설된 <리트벨트-슈뢰더-하우스>는 그의 대표작 <적과 청의 암체어>에 필적할 정도의 것으로 데 스틸의 조형원리를 건축에 적용한 대표적인 예이다.
이것은 반 뒤스부르크와 반 에스트렌이 자신의 집을 디자인하기 시작한 1927년보다 5년이나 빨리 데 스틸의 공간개념을 실제건축에 적용한 것이다.
<리트벨트-슈뢰더 하우스>의 공간구성은 바우하우스의 실험주택보다 훨씬 더 유연하다.
예를 들어 밖을 향하여 넓게 개방된 유리창은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리트벨트-슈뢰더 하우스>가 벽면에 에워싸인 상자형 건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도한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데 스틸의 디자인 활동은 이 밖에도 베르너 그라페의 <오토바이>(1922)안(案)12)이나 빌모스 후자르의 <선전용 키요스크>(1927) 등이 있다.
또한 아우트는 많은 건축물을 설계했으나 반 뒤스부르크나 리트벨트와 같이 데 스틸의 조형원리 실험에 주력하기보다는 ‘국제양식’에 근접한 작업 성향을 보이고 있다.


데 스틸과 바우하우스의 관련은 반 뒤스부르크와 그로피우스 사이의 개인적인 친분을 포함해서 다소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흘리-나기는 초기의 바우하우스에 결핍되어 있던 조형이론을 보충하는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나기의 역할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기는 하나 데 스틸도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서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에 몇 가지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1920년에 리트벨트가 디자인한 4개의 튜브로 된 램프의 상관적인 구성은 후에 바우하우스 공방에서 제작되어 그로피우스의 방에 걸려 있는 4개로 된 튜브램프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나아가서 바우하우스에 미친 데 스틸의 영향을 좀더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 것으로 마르셀 브로이어의 <안락의자 B3>(1925)을 들 수 있는 데, 이것은 리트벨트의 <적과 청의 암체어>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어쨌든 유럽에서 디자인에 관한 새로운 개념이 탄생하고 있던 1920년대에 주목해야 할 활동을 전개했던 세 가지 운동이 러시아 구성주의, 바우하우스, 데 스틸이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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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공간주택>의 실현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키슬러가 유럽을 떠난 것은 1926년이다. 이 시기에 러시아 구성주의는 조형적 실험기를 지나 사회적 실천의 와중에 있었으며, 바우하우스도 모흘리-나기의 참가를 기폭제로 본격적인 조형이론에 기초한 교육과 바우하우스 제품의 양산에 돌입했다.
또한 프랑스의 르 코르뷔제는 독자적으로 산업사회에 필요한 주택설계를 통해 입체파로부터 파생된 모던 스타일의 건축원형을 제시하고 있다.
뉴욕에 있던 키슬러도 이 같은 유럽의 동향을 주시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피력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의 기본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엔드리스’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는 건축이론이기도 하다.


키슬러의 건축이론은 ‘국제양식’과 그 이론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근대기능주의에 대한 맹렬한 비난으로부터 탄생했다.
1933-34년 뉴욕의 모던에이지 가구회사(Modernage Furniture Company)의 의뢰로 설계된 <공간주택>을 통해 키슬러는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면서 근대기능주의를 비판하게 된다.
<공간주택>은 키슬러가 설계한 최초의 주택으로, 모델타입이기는 하나 실제로 제작된 것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간주택>과 같은 주택설계 중 하나인 <엔드리스 하우스>가 아직도 건설되지 못한 채 모형으로만 남아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작품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키슬러는 <공간주택>을 통해 제기한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1. 사회성(the social)

2. 기술성(the tectonic)

3. 구조성(the structural)


<공간주택>의 설계에 구성적 개념을 반영한 것은 단편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그것보다는 사회적 요청에 대해서 좀더 심각하게 고려해야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관습이라는 조건으로부터 파생된 가정생활의 한계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기계적인 노역의 경감을 위한 서비스는 다음 문제이다.


적정한 부모와 자식들의 관계, 남성과 여성의 관계, 어른과 미성년자의 관계에 대한 상호교육을 통해 가족구성원의 개인적 격리를 실현하는 것이 당면과제였다.


그룹을 위한 주택에서의 반 격리.

가족 전체를 위해 외부 세계로부터의 프라이버시 보호.

개인 또는 그룹의 옥외와 옥내에서의 생활방식.8


여기서도 키슬러 특유의 주택에 대한 기본적인 사고방식이 언급되고 있다.
예를 들어 가족을 구성하는 멤버의 사회적 조건으로부터 주택의 개념을 정립하고자 했던 그에게 가사노동의 경감이라는 기능적인 서비스 문제는 일반적인 경우처럼 최우선 과제는 아니었다.
또한 바우하우스와 같이 개인별 ‘방’을 기준으로 분할하는 방법을 부정하고, 그룹으로서의 가족의 삶을 중요시했다.
나아가서 제3자에 대한 가족 전체의 프라이버시를 중시해서 대형유리로 된 개방적인 건축을 부정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르 코르뷔제나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주택설계에서 볼 수 있는 개념과 상반되는 키슬러만의 독자적인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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