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 설립 당시의 목표가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의 교육목표에 기술직의 기초훈련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산업기술을 긍적적으로 수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는 기술직이 기존의 저급한 레벨에 머무르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예술가 리오넬 파이닝거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등을 교사로 초빙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의 발족 당시에는 예술과 산업기술의 통합이라는 그로피우스의 목적에 걸맞은 인재는 발견하지 못 했다.
따라서 기술직에 기초를 둔 교육과정을 표명하는 편이 그로피우스의 당면목적에 가까웠기 때문에 예술과 산업기술의 통합 프로그램은 뒤로 미루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바우하우스는 1923년 요하네스 이텐과 로타르 슈라이어의 사임과 함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이텐의 사임과 함께 바우하우스는 새로운 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새로운 노선의 기폭제가 된 것은 모홀리-나기였다.
초기에 독일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은 나기는 러시아 구성주의의 카시미르 말레비치나 엘 리시츠키의 활동을 알고 나서부터 점점 비대상 회화를 지향하게 된다.
나기를 통해 바우하우스에 구성주의 사상이 흘러들어간 셈이다.
1923년에는 바우하우스 창립 4주년을 맞이하여 바우하우스의 교육성과를 바이마르 정부에 발표하기 위한 바우하우스 전람회가 열렸다.
이미 1922년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의 새로운 향방을 대변하는 슬로건을 발표했는데, ‘예술과 기술 - 새로운 통합’이 그것이다.
이것이 바우하우스의 지표가 되면서 기계기술을 배경으로 탄생한 ‘산업미술(Industrial Art)’이 시민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특히 바우하우스 전람회 이후 주택설계는 물론, 가구나 집기 등 제품디자인 분야의 활동이 활성화되었다.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 설립 당시의 목표가 ‘건축적 형태’를 통한 기술직의 통합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바우하우스 전람회를 기념해서 실험주택의 설계와 건설이 행해졌는데, ‘한 세대가 살기 위한 표준주택’을 테마로 한 이것은 후에 바우하우스 최초의 건축물로 기록된다.
이 건물의 특징은 중앙에 거실을 두고, 주위에 침실, 어린이방, 식당, 부엌, 현관 등이 개별적으로 구분되어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바우하우스 공방의 오리지널 디자인이 양산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설비는 물론 인테리어디자인도 합리적인 설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바우하우스 초기의 실험주택은 평면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가정생활의 기능을 목적별로 분류하고 그에 따라 공간을 분할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단지 기능적 공간의 집합체가 되어버렸다.
여기에 키슬러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근대 기능주의의 맹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1923년 이후 바우하우스는 보다 적극적으로 제품디자인 분야의 활동을 전개한다.
이를 위해서 각 부문별 공방의 역할이 필요했다. 특히 도자공방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기능과 형태의 디자인은 베를린 국립도자기제작소의 양산대상이 되기도 했다.
또한 모홀리-나기, 마르셀 브로이어 등이 지도했던 금속공방은 금속을 가공한 조명기구나 가구 등의 새로운 디자인을 탄생시켰다.
1926년의 <매달린 램프>도 대량생산된 바우하우스 제품 중 하나이다.
또한 금속 파이프를 구부려서 가공한 의자도 기능적 형태를 고취시키고자 하는 바우하우스의 성격을 대변하는 예이다.
마르셀 브로이어의 <안락의자 B3>(1926)는 게리트 리트벨트의 <적과 청의 암 체어>(1918-1923)의 구조를 금속과 가죽을 응용해서 실현하고 있는데, 보다 세련되게 디자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이 충실한 성과를 보이던 바우하우스 내부와는 달리 외부상황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바이마르 바우하우스가 폐교되고 데사우로 이동한 1925년 이후에도 이 같은 생산 활동의 강화가 주요 목표였다.
1926년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 생산 활동의 원칙’을 발표한다.


바우하우스는 대단히 단순한 가구용품으로부터 이미 완성된 거주공간을 포함하는 오늘날의 주택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한다.


모든 일상생활용품에 대해 표준형을 만드는 것은 사회적 요청이다.


바우하우스 공방은 기본적으로 연구소와 같은 성격을 띤다.
여기서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제품의 대량생산에 적합한 프로토타입(prototype)이 신중하게 개발되고 끊임없이 개량되고 있다.7


그러나 바우하우스의 이 같은 개념이 현실사회에 얼마만큼 적용 가능한 것이었는지는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우하우스는 어디까지나 ‘학교’였으며, 그 지도적 이념을 실질적으로 실천하는 것도 학교라는 유토피아 내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을 배경으로 사회체제의 개혁을 실천목표로 삼았던 구성주의와는 달리 바우하우스는 이상의 제시와 실험에 그쳤다는 견해도 있는데, 그 원인은 그들의 이념을 받아들이는 사회에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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