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종교를 부정하는 논쟁에 있어서도 극단적이었다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구성주의의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원리적인 측면에 주목하여 구성행위의 기술적 능력을 전부 체계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기술적 캐파시티는 공산주의 사상과 공업화의 복합에 의해 탄생하는 것이다.
이 같은 구성적 기술 또는 조직에 관한 선언을 살펴보면, 구성주의가 현실적 또는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에 기초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구성주의자들은 소재를 일반적인 물질 또는 사실에서 찾고, 그 고유의 성질과 생산방식을 의식적인 것으로 바꾼 후, 빛, 면, 공간, 색채, 볼륨과 같은 지적인 사실들을 유추해냈다.
생산주의자들은 오래된 형태의 건축을 새로운 과학적 사회주의적 양식으로 바꾸는 것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들의 주장은 묵시록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예술과 종교를 부정하는 논쟁에 있어서도 극단적이었다.4
프람프톤은 이상에서 인용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구성주의자들의 잡지 「레프 LEF」 1923년 호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구성주의는 부여된 물질의 텍토닉, 구조, 그리고 구성 원리를 체계화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형태는 대상물의 실용적인 목적에 주목한 창조과정을 통해서 결정된다.
실제로 생산자 그룹에 소속되어 있던 로드첸코, 타틀린, 알렉세이 간, 스테파노바 등은 실험적인 조형작품의 제작과 병행해서 건축적 프로젝트나 노동자들을 위한 클럽의 설계, 가구, 노동복 등을 디자인했다.
구성주의자들은 디자인을 통해 그들의 조형세계를 사회적으로 적용시켰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성주의의 이념을 따르는 건축가들은 농업 및 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생활환경을 개선시키기 위하여 집단주택, 가족용 주택, 개인적인 이용을 목적으로 하는 점포, 레스토랑, 공중목욕탕, 학교 등을 설계하기도 했다.
이것들은 문화적인 측면을 만족시키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쾌적함을 추구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노동자 클럽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이념을 상징하는 공공건물로서의 성격을 띠며 여러 곳에 세워졌다.
예를 들어 멜르니코프는 혼자서 모스크바에만 다섯 개의 클럽을 만들기도 했으며, 레오니도프도 노동자 클럽에 대한 몇 가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모스크바의 노동자 거주 지역에 있는 <문화관>프로젝트도 그 중 하나이다.
<문화관>은 가까운 장래에 일상생활 속에 사회문화의 복합체 역할을 할 건물을 건립한다는 계획 아래 행해진 프로젝트였다.
넓은 지역을 네 개의 섹터로 분할하고 있는데, 제1섹터는 신체문화와 휴식을 위해서, 스타디움, 경기장, 실내 풀, 체육시설 등, 제2섹터는 대규모 이벤트를 위한 다목적 홀과 로비 등, 제3섹터는 교육을 목적으로 박물관, 강당 등이 있었으며, 제4섹터는 전시공간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여기에 소개한 레오니도프의 <문화관> 프로젝트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도시의 커뮤니티 센터 건립을 시도한 선구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집단주택설계의 예로는 1920년에 라도브스키와 크린스키에 의해 디자인된 공공주택 프로젝트를 들 수 있다.
멜르니코프도 1923년에 공모에 참가하여 모스크바의 노동자 주택을 디자인했다.
이것은 최초로 시도된 현대적인 의미의 ‘공공의 집’이라 할 수 있다.
이 계획 이후 ‘공공의 집’은 공공적 또는 사회적 기준에 의해 지역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1928-30년에는 갠스브르그에 있는 건축가들이 몇몇 실험주택을 세웠다.
또한 1928-29년에는 거주 지역, 공공지역, 가사(家事)지역,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놀이지역으로 나뉜 네 개의 단위로 된 주택이 설계되기도 했다.
실험주택에서는 마지막 하나를 제외하고 세 개 지역만 만들었다.
거주 지역은 몇 가지 타입의 주거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각각은 높이와 내부 계단의 위치 등의 차이만 있었다.
2층 복도(코리드)에는 부엌과 식당-물론 거주 지역에서도 식사는 가능하지만-과 정원이 붙은 공공지역이 설치되어 있었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