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러시아 구성주의와 디자인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유럽 각지에서는 많은 예술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데 스틸, 러시아 구성주의, 바우하우스는 예술과 일상생활의 접목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회화나 조각 등의 고정된 예술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건축을 중심으로 총체예술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거주 공간 및 공공건축에 관한 새로운 제안은 물론 그 안에서 사용되는 가구나 집기 등의 새로운 디자인을 다수 선보였다.
또한 혁명 후 러시아에서는 타틀린의 <제3 인터네셔널 기념탑>(1919∼1920)과 같은 기념비적인 건축이 등장하기도 했다.
타틀린은 새로운 건축 재료와 그것으로 가능해진 역학적인 구조의 아름다움을 살려 새로운 형태의 모뉴멘트 <제3 인터네셔널 기념탑>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밖에도 1920년대 러시아 구성주의의 특징을 대변해주는 예로 베스닌 형제의 <노동의 전당>(1923), 리시츠키의 <니키스키 관문의 마천루>(1924) 등을 꼽을 수 있다.
이것들은 철골, 유리, 콘크리트 등의 신소재를 이용해 처음으로 가능해진 건축적 구성물이다.
러시아 구성주의 사상은 후에 러시아를 떠나 서구로, 그리고 후에 미국으로 건너간 나움 가보와 그의 제자 안톤 페브스너의 「사실주의 선언」(1920)과, 그들과는 정반대의 도정을 걸었던 로드첸코, 타틀린, 스테파노바의 「생산자 그룹 프로그램」(1920)에도 반영되었다.
가보와 페브스너의 「사실주의 선언」은 주로 구성주의 미학에 이론적 기초를 두고, 공간과 시간개념의 변이에 주목했는데, 다음은 그 중 일부이다.2)
여러 종류의 공간과 시간개념 하에 인지하는 우리의 세계관을 실현시키는 것이 우리의 조형적 창작활동이 갖는 유일한 목표이다.(중략)
1. 우리는 그림에서 회화적 요소로서의 색채를 배제한다.
색채란 물체의 시각적 얼굴일 뿐이다. 외부로 나타나는 인상은 피상적인 것이다.
색채는 우연적이고 물체 내부에 존재하는 내용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물체의 색조, 즉 빛을 흡수해 들이는 그 질료적 물질만이 유일한 회화적 실체라고 주장한다.
2. 우리는 선에 부여되는 도형적 가치를 거부한다.
육체의 실제적 삶에는 도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선은 사람이 물체에 남긴 우연한 자취에 불과하다.
이는 사물의 본질적 삶과 그 영속적 구조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선은 순전히 도식적, 삽화적, 장식적 요소일 뿐이다.
우리는 선을 물체 속에 감추어진 움직이지 않는 힘과 그 힘의 리듬을 이끄는 ‘방향’으로서만 인정한다.
3. 우리는 공간이 차지하는 조형적 형태로서의 양감, 즉 볼륨을 부정한다.
액체를 줄자로 잴 수 없듯이 공간을 부피로 잴 수 없다.
우리의 실제공간을 보라. 그것은 지속되는 깊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깊이’를 공간의 유일한 조형적 형태로서 인정한다.
4. 우리는 조각에서 조각적 요소로서의 ‘덩어리’를 부정한다.
기술자라면 누구나 고체의 움직이지 않는 힘, 그 물질적 저항이 그 고체덩어리에서 나오는 기능이 아님을 다 아는 사실이다.
철로, 버팀벽, 대들보 등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조각가들이여. 당신들이 주장하는 모든 경향이나 나름의 차이점에도 상관없이 그대들은 모두, 덩어리만이 영감을 나타낼 수 있다는 케케묵은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
자 우리를 보라.
우리는 네 개의 평면만 가지고도 100킬로그램의 덩어리를 만들 수 있는 것과 같은 부피를 만들어낸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조각에 ‘방향’으로서의 선을 회복시켜준다.
이는 오래 묵은 선입견이 조각에서 앗아갔던 생각이다.
우리는 또한 이런 방법으로 공간의 유일한 형태로서의 ‘깊이’를 조각에 자리 잡도록 한다.
5. 우리는 형태적 리듬 안에서만 조형적 창조의 요소를 찾을 수 있다고 여겼던 고대 이집트 미술로부터 내려오는 수천 년 묵은 잘못된 생각을 배척한다.
우리는 조형예술에서 또 다른 새로운 요소를 주장하니, 그것은 우리가 실제시간을 인지함에 있어 본질적인 형태인 ‘운동의 리듬(키네틱 리듬)’이 바로 그것이다. 1
이상에서 소개한 가보와 페브스너의 구성주의 기본개념 또는 조형이론의 원리는 이후 모홀리-나기를 통해 바우하우스에 도입된다.
결국 구성주의 사상은 나기가 쓴 조형이론서의 기본개념으로 채택되면서 전 세계에 보급되어 이후 현대조형예술의 향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3)
그런데 「사실주의 선언」에는 구성주의 개념이 단지 순수 예술적 목적만 띠는 것은 아니라고 언급한 대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