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돕는 의무와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지금까지 우리는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았다. 연못가 어른의 사례에서, 그는 도와주는 것을 외면했기에 모든 이에게 비난받았다. 그렇지만 나의 신장에 연결된 환자의 사례에서는 적어도 경우에 따라 도와주기를 거부할 권리가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이들 두 사례는 무엇이 다르기에 다른 반응을 불러오는 것일까? 거기에는 두 가지 뚜렷한 차이가 있다. 환자의 사례에서는 환자가 나에게 강제된 부담이지만, 연못에 빠진 어린이의 사례에서는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나에게 나쁜 일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환자의 사례에서, 그 모든 상황은 의사들이 나의 신체를 부당하게 침해하면서 시작되었다. 그건 환자의 잘못이 아니라고 가정해두자(강간으로 임신한 것이 태아의 잘못은 아니듯). 그러나 나와 환자의 연결이 고의적으로 일어난 일이라면, 나는 이 일에 대해 동의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 이 문제를 고려하는 데 타당성이 있는 또 하나의 차이는 도와주는 비용의 차이다. 연못의 사례에서는 도와주는 비용이 고작 옷을 적셔야 한다는 것과 바지를 갈아입어야 한다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환자의 사례에서는 상당기간에 걸쳐 신체의 자유를 포기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 일에 동의하거나 거부하는 건 나의 선택에 달린 일이다.
이제 두 가지 차이점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그것만으로 두 사례에 대한 반응의 차이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고의적인 침해가 있었다는 사실은 도와주기를 거부할 권리가 과연 나에게 있는지 없는지를 검토하는 데 중요하다. 이런 사실이 정말 결정적인 타당성을 지니는지 알아보기 위해, 주어진 사례를 조금 수정해보자. 그 환자가 나에게 강제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사전에 의사가 찾아와서 저 환자를 위해 앞으로 아홉 달 동안 나의 신장을 쓰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하자. 이런 경우라면 고의적 침해는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상황에 따라 나는 여전히 나의 권리로 이를 거부할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시나리오를 가상할 수 있다.
◆ 나는 임신 중이고, 환자가 나의 신장에 연결되면 태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
◆ 혹은 노부모를 모셔야 하는데, 환자와 연결되면 해야 할 일을 할 수 없다.
◆ 혹은 바로 얼마 전부터 어느 달동네 학교에서 수석교사로 일하게 됐으며, 열심히 봉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다. 그 환자와 연결되면 이 일을 할 수 없다.
◆ 혹은 카리브 해로 한 달 정도 휴가를 떠날 참인데, 여러 해 동안 기다려온 여행이고 많은 돈을 지불했다. 그 환자와 연결되면 이 여행을 할 수 없다.
◆ 혹은 단순히 나의 일상을 침해받고 싶지 않다. 아홉 달이나 그 환자에 매달려 있으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
내가 돕기를 거부하면 환자가 죽는데도, 그리고 환자와 연결하도록 나를 강압하지 않았어도 위 시나리오 중에는 돕기를 거부하는 데 이용할 만한 시나리오가 적어도 몇 개쯤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의 도움이 없다면 환자가 죽는다 해도, 그리고 환자에게 생명의 권리가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 요구에 동의해야 할 의무가 없다고 할 수 있다.그래서 이번에는 두 가지 경우를 구별하는 결정적이면서 타당한 기준을 비용에서 찾아보려는 것이다. 연못에 첨벙거리며 들어가야 한다면 그 시간과 노력의 비용(옷을 갈아입는 비용도 포함해서)은 어린이의 목숨을 살리는 것과 바꿀 만하다. 하지만 아홉 달을 바쳐야 한다면 짐은 훨씬 무거워진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일반적인 도덕원칙을 다음과 같이 세우기에 이른다.
◆ 심각한 상태에서 도움이 필요할 경우, 도움을 주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다면 도와줄 의무가 있다.
이 논의에 참여한 사람은 누구나 이에 동의하리라. 이것은 또 급진주의자들과 견해를 같이하는 결과가 된다. 말하자면 누구나 무엇으로건 도움을 주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생명이 지닌 가치에 비추어)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셈이다. 급진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돕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죽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옥스팜에 기부하지 않으면서 사치품이나 유명 디자이너의 옷을 사는 건 나쁜 일이라는 급진주의자들의 결론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위의 새로운 원칙은 다만, 상대적으로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비용을 들여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마땅히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사실상 이 원칙은 세계의 가장 빈곤한 사람들을 도우려고 활동하는 이들이 대체로 받아들일 만한 견해다. 그들은 수입의 일부분을 기부한다. 물론 급진주의자들의 기준을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하지만, 위에서 새로 설정해 놓은 원칙을 만족시키기에는 충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원칙마저 논란의 소용돌이에 빠질 수 있다. 도울 의무를 그렇듯 인색하게 제한하려는 건 무슨 까닭일까? 우리가 문제 삼는 두 가지 해악의 결과를 비교해볼 때, 아홉 달 동안 움직일 자유를 포기해서 한 생명을 살리는 게 낫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전히 객관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시 바라보며 가져올 결과들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해악인지 그것만 저울질하는 사람은 그 요청을 들어줘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단순히 해악을 최소화하려고 한다면, 얼마의 기간이 걸리더라도 환자를 연결해 놓으라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비슷한 것만을 비교하여 결론을 내리는 것은 이 일을 너무나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와 달리 톰슨의 사례는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의 이해보다는 도움을 주는 사람들의 이해를 우선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자신의 이해를 앞세운다면 이기적으로 비칠 것이고 따라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도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지만 톰슨의 이론이 그토록 자기 중심적인 것은 아니다. 곤궁한 사람들을 도와야 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을뿐더러 돕는 것이 좋은 일임을 인정하더라도,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돕도록 요청하거나 요청받는 범위에 한계가 있음을 강조한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요청할 수 있는 범위는 자신의 의사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의사를 바탕으로 더 도우려한다면 그건 그만큼 더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요청하는 도움은 한정적이어야 한다.
톰슨의 기준에 따른다고 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요청하거나 제공하는 도움의 한계를 어떻게 정할까? 톰슨이 내놓은 것과 같은 이론은 대체로 개인에게는 살아가는 방법을 선택할 기본 권리가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남을 돕는 것 역시 순전히 개인의 결정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설령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요구하거나 도와주도록 예를 들자면, 돕지 않으면 비난하거나 벌을 주는 방법으로 강제할 수 있다 해도, 오직 제한된 범위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요청 앞에 완전히 개방되면, 그는 자신의 삶을 제어할 권리를 잃은 것과 다름없다. 스스로 결정하고 길을 잡아 나아가는 능력을 잃은 채, 오직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도와야 할 일이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도울 것을 가졌는지에만 매달려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삶을 이끌어나갈 능력은 우연히 그 능력을 되찾지 않는 한, 더는 자신의 권리에 속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신만의 보호된 영역이란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오직 남들의 요청에 따라 움직여야 할 것이다. 톰슨의 말처럼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돕기로 자발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뿐더러 또 그렇게 할 만한 이유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돕는 일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으로 톰슨의 결론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톰슨은 다만 도덕의 한계를 밝히려 했을 뿐이다. 톰슨의 설명에 따르면, 어떻게 행동할지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면, 이는 곧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데도 일정한 한계가 설정되어야 함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