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통과 현기증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두통에 대한 행법

 

1. 눈을 감고 꿇어앉아 입으로 천천히 숨을 내쉰다.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쉰 뒤 오른손으로 코를 쥐고 콧구멍을 막는다. 코를 쥔 채로 눈동자만 왼쪽으로 가져갔다가 오른쪽으로 가져간다. 이때 시야가 흐려지고 눈물이 나올 만큼 세차게 움직이도록 한다. 눈동자를 좌우로 가져가는 시간은 숨을 멈추고 있는 시간의 절반씩이다. 숨이 차면 코에서 손을 떼고 입으로 크게 숨을 내쉰다.

두통에는 여러 원인이 있다. 그 중 청진에서 오는 두통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 변비나 축농증이 원인이다. 그리고 여성은 생리불순 등의 부인병으로 오는 경우가 많다. 청진이나 생리불순으로 생긴 어혈이 온 몸을 돌다가 머리에 오면 뇌를 둘러싼 혈관을 방해하기 때문에 두통이 생긴다. 변비의 경우 뱃속에 있는 변의 독이 온 몸을 돌게 되고, 축농증 역시 중증일 경우 코에만 고름이 괴는 것이 아니라 눈 안쪽이나 이마에까지 퍼져 머리를 아프게 한다. 당장 두통을 멈추게 하려면 이 행법을 하라.

 

 

현기증에 대한 행법

 

1. 쓰러진 사람의 두 눈에 손바닥을 대고 오른쪽으로 18회 돌려준다. 배꼽에 손바닥을 대고 오른쪽으로 18회 돌려준다.

현기증으로 쓰러진 사람의 눈을 열어보면 눈동자가 반드시 왼쪽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다. 이때는 좌회전을 하고 있는 눈동자를 반대로 우회전해주면 된다. 만에 하나 눈동자가 오른쪽으로 돌고 있다면 좌회전해주어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 낫지 않으면 배꼽에 손바닥을 대고 돌아가고 있는 눈동자의 반대방향으로 18회 돌려준다. 천천히 해주는 것이 요령이다. 현기증은 곧 낫지만 15-20분쯤 그냥 조용히 쉬게 해주어야 한다.

현기증은 과식 등으로 위가 약해졌을 때에도 일어나기 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페르시아인의 앞길을 막아선 것은 다름 아닌 마케도니아인이었

 

 

 

 

에사르하돈은 재위기간 동안 바빌론 시가와 신전 부흥에 노력하며 도시 재건에 힘썼다. 그는 아버지가 자행한 끔찍한 약탈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바빌론을 재건하기로 마음 먹었다. 특히 도시의 상징인 마르두크 사원의 재건에 열정을 쏟았다. 에사르하돈은 재위기간 내내 놀라운 승리의 행진을 보여준 정복왕이었다. 그는 북방의 외적을 물리
치고 아시리아의 세력을 이집트까지 확장했다. 아시리아의 영토는 나일 강 삼각주를 넘어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이집트까지 통치할 여력이 없었던 아시리아인은 이집트의 통치를 동맹세력에게 위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배은망덕한 동맹세력이 독립해버렸다. 이 좀도둑이나 다름없는 통치자들은 이집트의 네코 1세
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다. 네코 1세는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인 제26왕조(사이스 왕조)를 연 프삼티크 1세의 아버지다.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는 아시리아의 영토를 물려받은 대제국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기원전 525년에 몰락했다.
연이은 전쟁으로 아시리아의 국력이 몰라볼 정도로 쇠약해졌다. 점령지역의 거주민들을 이주시키는 대규모 이주정책으로 국력보강을 꾀했음에도 말이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던 아시리아는 사나운 기세로 몰려드는 단호한 적들에게 놀라울 정도로 싱겁게 무너져버렸다. 한때 막강했던 대제국은 기원전 612년을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
라졌다. 바빌로니아인은 아시리아의 몰락을 이용하여 네부카드네자르 2세(신바빌로니아의 2대 왕, 성경에는 느부갓네살)의 지휘 하에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전역을 손에 넣고자 발 빠르게 움직였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페르시아 만 유역에 살던 셈족의 나라 칼데아인의 후손이었다. 이때 유대 왕 여호야킴은 갑작스럽게 바빌론과의 동맹을 끊어버렸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다. 유대 왕의 결정에 반발한 네부카드네자르는 기원전 579년에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예루살렘 시민이 엄청난 벌금을 내는 것으로 도시의 파괴는 막았으나, 10,000명의 유대인이 인질의 신분으로 바빌론에 끌려갔다. 바빌론에는 예언자 다니엘이 살고 있었다.
『구약성경』의 「다니엘」에는 이 인질들의 ‘바빌론 유수’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다. 다니엘(벨테샤트르Beltshzzar)은 다른 세 명의 유대인 포로와 함께 궁정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 세 유대인의 바빌로니아 이름은 샤드라크(하나니아Hananiah), 메샤크(미사엘Mishael), 아벳느고(아사랴Azariah)였다. 이들에 관한 많은 일화들 가운데서도 단연 눈에 띄는 세 가지 일화가 있다. 첫 번째 일화는 샤드라크・메샤크・아벳느고가 네부카드네자르가 만들어 놓은 ‘황금 신상’ 앞에서 절하는 것을 거부한 이야기다. 이들의 보란 듯한 항명에 격분한 네부카드네자르는 그들을 “활활 타오르고 있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라”고 명한다. 하지만 이들은 그을림 하나 없이 불속에서 살아나왔다.
경악을 금치 못한 네부카드네자르는 신이 보낸 천사가 그들을 보호했다고 확신했다. 두 번째 일화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왕으로 행정조직가로서 후세에 명성을 남긴 다리우스 1세와 다니엘의 이야기다. 바빌론의 새 주인이 된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는 왕에게 절을 하라는 법을 반포했다. 유일신만을 섬기는 다니엘은 이를 거부해서 사자굴에 던져졌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다음날 아침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사자굴을 걸어 나온 다니엘의 모습에 놀란 다리우스는 하느님의 임재를 받아들인다. 세 번째 일화에서는 가혹행위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일화는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정복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과 관련된 것이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손자 벨샤자르가 주최한 연회에서 벽에 갑자기 신비한 글자가 나타난다. 아무도 해독해내지 못한 이 글귀를 다니엘이 해석해낸다. 그 의미는 바로 “왕국의 운이 다 되었다”는 것이다.「다니엘」에서는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키루스 2세(성경에서 고레스)를 다리우스 1세와 혼동하고 있다. 키루스 2세는 기원전 539년 바빌론에 무혈 입성했다. 바빌로니아는 그가 점령한 나라들 가운데 가장 문명화된 선진국이었다. 이 때문에 이 새로운 제국의 통치자는 지배계급을 학살하는 대신에 흡수하고자 했다. 그는 새로운 정권에 봉사할 용의가 있는 자들을 모두 요직에 기용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이들이 탁월한 국정운영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새로운 지배계급과 고대 서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자랑하는 지역 민간의 조화를 이끌어냈다. 한편 유대인 포로들은 바빌로니아를 침략한 관대한 키루스 2세를 신의 사자로 여겼다. 예언자 이사야는 페르시아의 등장이 예루살렘을 재건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안배해놓은 계획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바빌로니아인의 말은 달랐다. 바빌로니아인은 키루스 2세가 바빌로니아를 점령하게 된 건 마르두크 신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마르두크가 “모든 나라를 둘러보고 살펴보신 결과 신년의식에서 왕위를 이어받을 자로 키루스 2세를 점지하여, 그가 세계의 지배자임을 공표한 것”이라고 믿었다. 키루스 2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피점령국 사람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점령국 백성의 관습과 신앙을 존중했다. 뿐만 아니라 지역 성소에 기부금을 후하게 하사하기도 했다. 페르시아인은 귀향을 원하는 포로들을 고향으로 보내주었다. 관습처럼 답습되어온 대규모 이주는 페르시아가 다스리는 땅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시리아의 잔혹한 공포정치는 영원히 자취를 감췄다. 바빌론을 비롯한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에서 간헐적으로 반란이 일어나긴 했다. 승승장구하던 페르시아인의 앞길을 막아선 것은 다름 아닌 마케도니아인이었다. 다리우스 1세는 인도의 북서부 점령으로 동방 정복의 물고를 텄다. 하지만 서방으로의 진출은 난항을 겪었다. 그리스 이오니아인들의 예기치 못한 반격으로 소아시아 진출에 먹구름이 드리운 것이다. 다리우스 1세는 정벌 실패에 대한 보복으로 그리스를 공격했고, 이 사건으로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감정의 골이 패였다. 다리우스 사후 기원전 480년에 있었던 대규모 그리스 원정길에 마케도니아를 지나치면서 페르시아는 엄청난 수의 군사로 위세를 과시하며 동맹국이 될 것을 마케도니아에 강요했다. 이로부터 정확히 146년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엄청난 수의 군사를 이끌고 페르시아를 침략하여 이때의 수모를 그대로 돌려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리아인이 미탄니에 거주했다

 

 

 

 

 

아시리아가 메소포타미아에서 빠른 속도로 두각을 나타낼 수 없었던 건 오랜 이웃인 미탄니 왕국과 관련이 있다. 메소포타미아 서북부에 자리한 이 호전적인 이웃은 ‘최고의 기수’ 쿠쿨리kukkuli의 훈련을 받은 막강한 전차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쿠쿨리의 훈련지침에는 산스크리트어와 유사성을 보이는 단어들이 다수 등장한다. 미탄니의 기록에 남아 있는 인도 아대륙을 침략한 아리아인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의 흔적은 전차군단이 고대 아시아의 영토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음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서아시아 전차와 인도의 전차 형태의 유사성에서 서아시아 국가들이 인도 아대륙을 침략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차가 최초로 발명된 지역은 러시아와 아시아의 중위도 부근에위치한 초원지대였다. 하지만 전차는 고대 서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전쟁장비로 사용되었다. 전차부대의 훈련사 쿠쿨리에 대한 기록은 현재 터키의 보가즈쾨이Bogazkale에 있는 고대 하투샤Hattusha 유적지에서도 발견되었다. 고대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 하투샤에 대한 미탄니어 점토판 기록을 히타이트어와 아카드어로 번역한 기록도 발견되었다. 미탄니의 기록이 실제로 꽤 광범위한 지역에서 읽힌 것이다.
미탄니 왕국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별로 없다. 그래서 후르리족의 언어를 사용하는 미탄니족과 한데 섞여 살았던 미탄니 내 아리아인의 숫자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여전히 분분하다. 쿠쿨리의 훈련지침에는 전차부대 훈련과 관련 있는 명칭과 기술적인 용어에 관한 내용 외에도 미탄니와 다른 권력 간의 협정을 맺을 때 언급되는 신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 신들의 존재가 바로 많은 수의 아리아인이 미탄니에 거주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자료다. 도덕적 질서를 관장하는 바루나 같은 인도 신들의 존재 말이다. 히타이트가 미탄니를 멸망시킨 건 기원전 14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그로부터 200년 후 히타이트족도 에게 해에서 몰려온 해양민족 때문에, 정점을 지난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서서히 붕괴되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아시리아인의 야망이 서서히 기지개를 켰다.
일명 ‘해양민족’으로 불린 사람들의 대규모 이주 원인은 아직 완전히 규명되지 않았다. 그 원인이 어찌되었든 이들의 이동으로 그리스・소아시아・시리아・팔레스타인의 도시와 궁전들은 완전히 파괴되어 흙으로 되돌아갔다. 아시리아는 유프라테스-티그리스 유역으로 넘어오려는 이 이주민들을 안간힘을 다해 물리쳤다. 같은 시기에 고대 이집트 제20왕조의 2대 왕으로 팔레스타인 땅 일부를 차지했던 람세스 3세도 국경지역에서 두 차례 힘겨운 전투를 벌인 끝에 이 해양민족의 대부분을 되돌려 보내는 데 성공했다. 기원전 1182년에 이르러서 이 끈질긴 파라오는 해양민족을 바닷가 부근에서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도 완전히 몰아냈다. 외세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낸 아시리아인에게는 고대 서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시리아 군사력도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였다. 기원전 9세기에 이르러서 아시리아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 60,000명의 군대를 배치했으며, 1세기 후인 기원전 8세기에는 정규 병력이 75,000명에 육박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기원전704~681년까지 아시리아를 통치한 왕 센나케리브(성경에는 산헤립)의 집권시기에 병력이200,000명으로 불어났다. 그의 군사력은 막강했으나 국내의 크고 작은 반란이 그칠 줄 몰랐다. 급기야 바빌로니아의 반란세력이 센나케리브의 아들이자 바빌론의 통치자였던 아슈르나딘슈미를 엘람족에게 넘기는 사건이 일어났다. 격노한 센나케리브는 보복조치를 단행하여 기원전 689년에 엘람 왕국을 무찌르고 바빌론을 수복했다.
센나케리브의 병사들이 아름다운 도시 바빌론을 무차별 약탈했다. 센나케리브의 명령 하에 이뤄졌을 이 약탈은 자승자박인 악수였다. 센나케리브는 몇 년 후 목숨으로 이 악업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바빌론 시민뿐 아니라 아시리아인도 그의 바빌론 파괴를 신성모독으로 여겼다. 왕위를 탐낸 센나케리브의 아들들은 이런 민심을 등에 업고 아버지를 살해한다. 사실 아시리아에는 분명한 왕위 후계자가 있었다. 가장 아끼던 아들 아슈르나딘슈미가 엘람족의 손에 목숨을 잃자 센나케리브는 에사르하돈을 황태자로 책봉해놓았다. 부왕의 살해 소식을 전해들은 에사르하돈은 골육상쟁의 진흙탕 싸움에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예감하고 비통해한다.
내 형제들은 이성을 잃고 신들이 끔찍하게 여길 악행을 저질렀다. 니네베에서 품은 악마 같은 계획을 가지고, 무력에 의존하여 손에 잡힐 것만 같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숫염소처럼 서로 치고받았다. 아시리아의 귀족들은 이미 충성을 맹세했던 선왕이 선택한 황태자에 대한 서약을 충실히 지켰다. 귀족들의 원조를 등에 업고 니네베로 진군한 에사르하돈은 내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니네베 시민이 “그의 발에 입을 맞추며” 신왕의 탄생을 경하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슬람주의와 민주정치가 양립할 수 있는가

 

 

 

 

이슬람주의와 민주정치가 양립할 수 있는지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은 알라 신의 통치(하키미야트 알라)에 기초한 신이슬람 질서라는 이슬람주의 사상에 달려 있다. 이슬람주의 이데올로기의 쟁점은 인간이 아닌 알라 신만이 세계를 통치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와는 무관한, 민주정치의 국민 주권이 그와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정치를 샤리아로 바꾸려는 의지를 갖는다면 민주정치가 어떻게 발전할 수 있겠는가? 이슬람세계에서는 권위주의 정권과 이슬람주의 야권 및 이슬람주의와 진보 민주정치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난다. 나는 수니파 이슬람교에 중점을 둘 것이다. 이슬람주의와 민주정치를 둘러싼 논쟁이 아랍 수니파 사상가들에 의해 규정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슬람교는 아랍 중동에서 처음 번성하여 외부로 번져나갔다.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및 이라크의 이슬람주의당을 살펴보더라도 이슬람주의자들이 정부에 합류한들 그들이 온건해진다는 보장은 없었다. 위 세 지역에서, 정치적인 이슬람주의 당은 선출된 의회와 정부에서 대표자 역할을 하면서도 반대세력을 위협하기 위해 테러리스트 민병대와 비국가 군대망을 거느리고 있다. 이슬람주의자들이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고 해서 온건한 민주주의 당으로 환골탈태한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이라크의 이슬람주의 다와당Da'wa party(교화당)은 이슬람주의가 지닌 제도적 다양성을 반영한다. 이는 시아파 지하드 조직체 둘과 공조하여 국가를 다스리고 있다. 첫째는 바드르 여단Failaq Badr을 둔 최고이슬람이라크위원회Supreme Islamic Iraqi Council(SIIC, SCIRI가 전신)와, 무크타다 알사드르 및 지하디스트 알마디 부대al-Mahdi army와 연합한 당파가 있다. 이라크에서는 제도적 이슬람주의와 지하디스트의 경계가 모호한 데다, 다수를 차지하는 시아파에 정권을 쥐게 한 “미국이 주도한 해방” 은 “외국인의 선물” 로 알려졌다 미국이 수니파 독재정권의 해방을 선사했다고는 하지만, 실은 사담 후세인을 이란에 망명했던 시아파 독재자로 갈아치운 것뿐이었다. 이는 민주정치화로 보기는 어렵다. 알사드르와 경합을 벌인다는 이유로 알마디 부대가 의회 선거에 출마한 후보의 사진을 게시하지 못하게 하는데도 이를 민주정치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조직체는 2006년 선거에서 압승했다. 이를 두고 『파이낸셜 타임스』지의 논평에서 칼 빌트와 안나 팔라치오는 각각 현역 스웨덴 외무장관과 스페인 전 외무장관으로서 이를 민주정치의 결실이라고 극찬했다. 독재적이면서도 종교와는 무관한 파타당Fatah과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축출해낸 하마스 이슬람주의자들의 태도는 권력 분담의 의지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보여주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입장은 정착지에서 기존의 이슬람주의와 세속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고, 결국 파타당은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사태가 반복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요르단 강 서안지구에서 하마스와는 손을 잡지 않기로 했다. 한편, 가자지구에서 하마스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상대로 테러를 자행하면서 선거를 실시했다. 그로부터 1년 후, 하마스는 민병대를 동원해 군사 쿠데타를 벌여 가자지구에서 권좌를 차지했다. 미국과 EU는 이를 “테러리스트” 조직체로 규정했고, 자유선거는 하마스를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정당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창설한 헌법재판소를 제거하고는 반체제인사를 재판 없이 투옥시켰다.
터키의 AKP는 총탄은 없으나 (AKP는 현지 경찰을 통제하지만 사립 민병대는 없다) 2006년 선거 이후 하마스에서 차출한 대표단을 수용하고 2008~09년에 치른 가자 전투에서 이를 지원한 제1대 정부였다. 아랍국가 중, 이란만이 그의 전철을 밟았다. AKP는 터키 헌법에 신앙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규정하지 않고 있는 데다, 세속 판사와 대학 총장을 당에서 차출한 이슬람주의자로 대체하고 있다.
2008년 당시 헤즈볼라46는 레바논 의회에서 128석 중 14석을, 내각에서는 30개 중 11개 직책을 차지했으나 헤즈볼라가 장악한 지구에서 민병대로 활동하는 비정규군을 계속 거느리고 있었다. 2008년 7~8월, 이스라엘 방위군은 민병대를 해체할 수 없었다. 사실, 헤즈볼라는 이스라엘과의 분쟁에서 사기가 충천해졌다. 레바논 공군은 헤즈볼라가 통제하는 군사 지역을 비행할 수 없고 육군도 진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 구역은 국가 내의 또 다른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현재 헤즈볼라는 민주적인 실세일까, 지하드 조직일까? 결론을 어떻게 내려야 할까? 여러분의 입장에 따라 결론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당은 (적어도 정권을 쥐기 전까지는) 선거에 참여하지만, 흔히들 알고 있거나, 민주정치다운 의미를 살리기 위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민주정치를 실시하는 당은 전혀 없다.
민주정치와 민주화가 이슬람세계의 미래를 비추는 최선의 약속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슬람세계의 민주정치의 위기를 감안해볼 때, 이슬람식 민주정치의 모범 사례는 중동 밖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30년간, 나에게는 아랍 중동뿐 아니라 그 밖에서도 이슬람교와 민주정치를 연구한 덕분에 아랍중심주의의 울타리에서 벗어날 기회가 있었다. 서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서 연구와 교육을 병행하던 나는 이슬람교와 민주정치가 “유럽에서 만난다” 는 주장을 뒤엎는 “민간 이슬람교” 와 맞닥뜨리게 되었다.서방세계에서 이슬람 소수집단은 폐쇄적인 공동체에 자리 잡은 정체성 정치의 전매특허인 변명과 변호 문화에 빠져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이슬람식 민주정치의 다른 원천은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인도네시아의 민간 이슬람교는 민주정치에 호감을 갖고 있으나 아랍세계의 사상에 영향력을 행사한 적이 없다. 나는 인도네시아에서도 연구를 했는데, 현지인들에게 그들이 신봉하는 이슬람교가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는 아랍 선교사들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학자도 일부 포함하여)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중동에서 민간 이슬람교를 설파하는 인도네시아 무슬림은 한 사람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카이로의 알아즈하르 대학에서는 민간 이슬람교를 저해하는 살라피 이슬람교Salafi Islam[교리와 관행을 충실히 따르는 이슬람교]를 고국에 전파하기 위해 이를 배우고 있는 인도네시아인도 보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 돕는 의무와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지금까지 우리는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았다. 연못가 어른의 사례에서, 그는 도와주는 것을 외면했기에 모든 이에게 비난받았다. 그렇지만 나의 신장에 연결된 환자의 사례에서는 적어도 경우에 따라 도와주기를 거부할 권리가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이들 두 사례는 무엇이 다르기에 다른 반응을 불러오는 것일까? 거기에는 두 가지 뚜렷한 차이가 있다. 환자의 사례에서는 환자가 나에게 강제된 부담이지만, 연못에 빠진 어린이의 사례에서는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나에게 나쁜 일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환자의 사례에서, 그 모든 상황은 의사들이 나의 신체를 부당하게 침해하면서 시작되었다. 그건 환자의 잘못이 아니라고 가정해두자(강간으로 임신한 것이 태아의 잘못은 아니듯). 그러나 나와 환자의 연결이 고의적으로 일어난 일이라면, 나는 이 일에 대해 동의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 이 문제를 고려하는 데 타당성이 있는 또 하나의 차이는 도와주는 비용의 차이다. 연못의 사례에서는 도와주는 비용이 고작 옷을 적셔야 한다는 것과 바지를 갈아입어야 한다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환자의 사례에서는 상당기간에 걸쳐 신체의 자유를 포기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 일에 동의하거나 거부하는 건 나의 선택에 달린 일이다.
이제 두 가지 차이점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그것만으로 두 사례에 대한 반응의 차이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고의적인 침해가 있었다는 사실은 도와주기를 거부할 권리가 과연 나에게 있는지 없는지를 검토하는 데 중요하다. 이런 사실이 정말 결정적인 타당성을 지니는지 알아보기 위해, 주어진 사례를 조금 수정해보자. 그 환자가 나에게 강제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사전에 의사가 찾아와서 저 환자를 위해 앞으로 아홉 달 동안 나의 신장을 쓰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하자. 이런 경우라면 고의적 침해는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상황에 따라 나는 여전히 나의 권리로 이를 거부할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시나리오를 가상할 수 있다.


 

◆ 나는 임신 중이고, 환자가 나의 신장에 연결되면 태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

◆ 혹은 노부모를 모셔야 하는데, 환자와 연결되면 해야 할 일을 할 수 없다.

◆ 혹은 바로 얼마 전부터 어느 달동네 학교에서 수석교사로 일하게 됐으며, 열심히 봉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다. 그 환자와 연결되면 이 일을 할 수 없다.

◆ 혹은 카리브 해로 한 달 정도 휴가를 떠날 참인데, 여러 해 동안 기다려온 여행이고 많은 돈을 지불했다. 그 환자와 연결되면 이 여행을 할 수 없다.

◆ 혹은 단순히 나의 일상을 침해받고 싶지 않다. 아홉 달이나 그 환자에 매달려 있으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

 

내가 돕기를 거부하면 환자가 죽는데도, 그리고 환자와 연결하도록 나를 강압하지 않았어도 위 시나리오 중에는 돕기를 거부하는 데 이용할 만한 시나리오가 적어도 몇 개쯤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의 도움이 없다면 환자가 죽는다 해도, 그리고 환자에게 생명의 권리가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 요구에 동의해야 할 의무가 없다고 할 수 있다.그래서 이번에는 두 가지 경우를 구별하는 결정적이면서 타당한 기준을 비용에서 찾아보려는 것이다. 연못에 첨벙거리며 들어가야 한다면 그 시간과 노력의 비용(옷을 갈아입는 비용도 포함해서)은 어린이의 목숨을 살리는 것과 바꿀 만하다. 하지만 아홉 달을 바쳐야 한다면 짐은 훨씬 무거워진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일반적인 도덕원칙을 다음과 같이 세우기에 이른다.

 

◆ 심각한 상태에서 도움이 필요할 경우, 도움을 주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다면 도와줄 의무가 있다.

 

이 논의에 참여한 사람은 누구나 이에 동의하리라. 이것은 또 급진주의자들과 견해를 같이하는 결과가 된다. 말하자면 누구나 무엇으로건 도움을 주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생명이 지닌 가치에 비추어)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셈이다. 급진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돕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죽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옥스팜에 기부하지 않으면서 사치품이나 유명 디자이너의 옷을 사는 건 나쁜 일이라는 급진주의자들의 결론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위의 새로운 원칙은 다만, 상대적으로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비용을 들여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마땅히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사실상 이 원칙은 세계의 가장 빈곤한 사람들을 도우려고 활동하는 이들이 대체로 받아들일 만한 견해다. 그들은 수입의 일부분을 기부한다. 물론 급진주의자들의 기준을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하지만, 위에서 새로 설정해 놓은 원칙을 만족시키기에는 충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원칙마저 논란의 소용돌이에 빠질 수 있다. 도울 의무를 그렇듯 인색하게 제한하려는 건 무슨 까닭일까? 우리가 문제 삼는 두 가지 해악의 결과를 비교해볼 때, 아홉 달 동안 움직일 자유를 포기해서 한 생명을 살리는 게 낫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전히 객관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시 바라보며 가져올 결과들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해악인지 그것만 저울질하는 사람은 그 요청을 들어줘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단순히 해악을 최소화하려고 한다면, 얼마의 기간이 걸리더라도 환자를 연결해 놓으라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비슷한 것만을 비교하여 결론을 내리는 것은 이 일을 너무나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와 달리 톰슨의 사례는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의 이해보다는 도움을 주는 사람들의 이해를 우선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자신의 이해를 앞세운다면 이기적으로 비칠 것이고 따라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도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지만 톰슨의 이론이 그토록 자기 중심적인 것은 아니다. 곤궁한 사람들을 도와야 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을뿐더러 돕는 것이 좋은 일임을 인정하더라도,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돕도록 요청하거나 요청받는 범위에 한계가 있음을 강조한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요청할 수 있는 범위는 자신의 의사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의사를 바탕으로 더 도우려한다면 그건 그만큼 더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요청하는 도움은 한정적이어야 한다.
톰슨의 기준에 따른다고 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요청하거나 제공하는 도움의 한계를 어떻게 정할까? 톰슨이 내놓은 것과 같은 이론은 대체로 개인에게는 살아가는 방법을 선택할 기본 권리가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남을 돕는 것 역시 순전히 개인의 결정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설령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요구하거나 도와주도록 예를 들자면, 돕지 않으면 비난하거나 벌을 주는 방법으로 강제할 수 있다 해도, 오직 제한된 범위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요청 앞에 완전히 개방되면, 그는 자신의 삶을 제어할 권리를 잃은 것과 다름없다. 스스로 결정하고 길을 잡아 나아가는 능력을 잃은 채, 오직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도와야 할 일이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도울 것을 가졌는지에만 매달려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삶을 이끌어나갈 능력은 우연히 그 능력을 되찾지 않는 한, 더는 자신의 권리에 속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신만의 보호된 영역이란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오직 남들의 요청에 따라 움직여야 할 것이다. 톰슨의 말처럼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돕기로 자발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뿐더러 또 그렇게 할 만한 이유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돕는 일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으로 톰슨의 결론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톰슨은 다만 도덕의 한계를 밝히려 했을 뿐이다. 톰슨의 설명에 따르면, 어떻게 행동할지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면, 이는 곧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데도 일정한 한계가 설정되어야 함을 뜻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