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인의 앞길을 막아선 것은 다름 아닌 마케도니아인이었

 

 

 

 

에사르하돈은 재위기간 동안 바빌론 시가와 신전 부흥에 노력하며 도시 재건에 힘썼다. 그는 아버지가 자행한 끔찍한 약탈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바빌론을 재건하기로 마음 먹었다. 특히 도시의 상징인 마르두크 사원의 재건에 열정을 쏟았다. 에사르하돈은 재위기간 내내 놀라운 승리의 행진을 보여준 정복왕이었다. 그는 북방의 외적을 물리
치고 아시리아의 세력을 이집트까지 확장했다. 아시리아의 영토는 나일 강 삼각주를 넘어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이집트까지 통치할 여력이 없었던 아시리아인은 이집트의 통치를 동맹세력에게 위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배은망덕한 동맹세력이 독립해버렸다. 이 좀도둑이나 다름없는 통치자들은 이집트의 네코 1세
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다. 네코 1세는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인 제26왕조(사이스 왕조)를 연 프삼티크 1세의 아버지다.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는 아시리아의 영토를 물려받은 대제국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기원전 525년에 몰락했다.
연이은 전쟁으로 아시리아의 국력이 몰라볼 정도로 쇠약해졌다. 점령지역의 거주민들을 이주시키는 대규모 이주정책으로 국력보강을 꾀했음에도 말이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던 아시리아는 사나운 기세로 몰려드는 단호한 적들에게 놀라울 정도로 싱겁게 무너져버렸다. 한때 막강했던 대제국은 기원전 612년을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
라졌다. 바빌로니아인은 아시리아의 몰락을 이용하여 네부카드네자르 2세(신바빌로니아의 2대 왕, 성경에는 느부갓네살)의 지휘 하에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전역을 손에 넣고자 발 빠르게 움직였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페르시아 만 유역에 살던 셈족의 나라 칼데아인의 후손이었다. 이때 유대 왕 여호야킴은 갑작스럽게 바빌론과의 동맹을 끊어버렸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다. 유대 왕의 결정에 반발한 네부카드네자르는 기원전 579년에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예루살렘 시민이 엄청난 벌금을 내는 것으로 도시의 파괴는 막았으나, 10,000명의 유대인이 인질의 신분으로 바빌론에 끌려갔다. 바빌론에는 예언자 다니엘이 살고 있었다.
『구약성경』의 「다니엘」에는 이 인질들의 ‘바빌론 유수’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다. 다니엘(벨테샤트르Beltshzzar)은 다른 세 명의 유대인 포로와 함께 궁정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 세 유대인의 바빌로니아 이름은 샤드라크(하나니아Hananiah), 메샤크(미사엘Mishael), 아벳느고(아사랴Azariah)였다. 이들에 관한 많은 일화들 가운데서도 단연 눈에 띄는 세 가지 일화가 있다. 첫 번째 일화는 샤드라크・메샤크・아벳느고가 네부카드네자르가 만들어 놓은 ‘황금 신상’ 앞에서 절하는 것을 거부한 이야기다. 이들의 보란 듯한 항명에 격분한 네부카드네자르는 그들을 “활활 타오르고 있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라”고 명한다. 하지만 이들은 그을림 하나 없이 불속에서 살아나왔다.
경악을 금치 못한 네부카드네자르는 신이 보낸 천사가 그들을 보호했다고 확신했다. 두 번째 일화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왕으로 행정조직가로서 후세에 명성을 남긴 다리우스 1세와 다니엘의 이야기다. 바빌론의 새 주인이 된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는 왕에게 절을 하라는 법을 반포했다. 유일신만을 섬기는 다니엘은 이를 거부해서 사자굴에 던져졌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다음날 아침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사자굴을 걸어 나온 다니엘의 모습에 놀란 다리우스는 하느님의 임재를 받아들인다. 세 번째 일화에서는 가혹행위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일화는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정복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과 관련된 것이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손자 벨샤자르가 주최한 연회에서 벽에 갑자기 신비한 글자가 나타난다. 아무도 해독해내지 못한 이 글귀를 다니엘이 해석해낸다. 그 의미는 바로 “왕국의 운이 다 되었다”는 것이다.「다니엘」에서는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키루스 2세(성경에서 고레스)를 다리우스 1세와 혼동하고 있다. 키루스 2세는 기원전 539년 바빌론에 무혈 입성했다. 바빌로니아는 그가 점령한 나라들 가운데 가장 문명화된 선진국이었다. 이 때문에 이 새로운 제국의 통치자는 지배계급을 학살하는 대신에 흡수하고자 했다. 그는 새로운 정권에 봉사할 용의가 있는 자들을 모두 요직에 기용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이들이 탁월한 국정운영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새로운 지배계급과 고대 서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자랑하는 지역 민간의 조화를 이끌어냈다. 한편 유대인 포로들은 바빌로니아를 침략한 관대한 키루스 2세를 신의 사자로 여겼다. 예언자 이사야는 페르시아의 등장이 예루살렘을 재건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안배해놓은 계획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바빌로니아인의 말은 달랐다. 바빌로니아인은 키루스 2세가 바빌로니아를 점령하게 된 건 마르두크 신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마르두크가 “모든 나라를 둘러보고 살펴보신 결과 신년의식에서 왕위를 이어받을 자로 키루스 2세를 점지하여, 그가 세계의 지배자임을 공표한 것”이라고 믿었다. 키루스 2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피점령국 사람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점령국 백성의 관습과 신앙을 존중했다. 뿐만 아니라 지역 성소에 기부금을 후하게 하사하기도 했다. 페르시아인은 귀향을 원하는 포로들을 고향으로 보내주었다. 관습처럼 답습되어온 대규모 이주는 페르시아가 다스리는 땅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시리아의 잔혹한 공포정치는 영원히 자취를 감췄다. 바빌론을 비롯한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에서 간헐적으로 반란이 일어나긴 했다. 승승장구하던 페르시아인의 앞길을 막아선 것은 다름 아닌 마케도니아인이었다. 다리우스 1세는 인도의 북서부 점령으로 동방 정복의 물고를 텄다. 하지만 서방으로의 진출은 난항을 겪었다. 그리스 이오니아인들의 예기치 못한 반격으로 소아시아 진출에 먹구름이 드리운 것이다. 다리우스 1세는 정벌 실패에 대한 보복으로 그리스를 공격했고, 이 사건으로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감정의 골이 패였다. 다리우스 사후 기원전 480년에 있었던 대규모 그리스 원정길에 마케도니아를 지나치면서 페르시아는 엄청난 수의 군사로 위세를 과시하며 동맹국이 될 것을 마케도니아에 강요했다. 이로부터 정확히 146년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엄청난 수의 군사를 이끌고 페르시아를 침략하여 이때의 수모를 그대로 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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