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아인이 미탄니에 거주했다

 

 

 

 

 

아시리아가 메소포타미아에서 빠른 속도로 두각을 나타낼 수 없었던 건 오랜 이웃인 미탄니 왕국과 관련이 있다. 메소포타미아 서북부에 자리한 이 호전적인 이웃은 ‘최고의 기수’ 쿠쿨리kukkuli의 훈련을 받은 막강한 전차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쿠쿨리의 훈련지침에는 산스크리트어와 유사성을 보이는 단어들이 다수 등장한다. 미탄니의 기록에 남아 있는 인도 아대륙을 침략한 아리아인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의 흔적은 전차군단이 고대 아시아의 영토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음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서아시아 전차와 인도의 전차 형태의 유사성에서 서아시아 국가들이 인도 아대륙을 침략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차가 최초로 발명된 지역은 러시아와 아시아의 중위도 부근에위치한 초원지대였다. 하지만 전차는 고대 서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전쟁장비로 사용되었다. 전차부대의 훈련사 쿠쿨리에 대한 기록은 현재 터키의 보가즈쾨이Bogazkale에 있는 고대 하투샤Hattusha 유적지에서도 발견되었다. 고대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 하투샤에 대한 미탄니어 점토판 기록을 히타이트어와 아카드어로 번역한 기록도 발견되었다. 미탄니의 기록이 실제로 꽤 광범위한 지역에서 읽힌 것이다.
미탄니 왕국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별로 없다. 그래서 후르리족의 언어를 사용하는 미탄니족과 한데 섞여 살았던 미탄니 내 아리아인의 숫자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여전히 분분하다. 쿠쿨리의 훈련지침에는 전차부대 훈련과 관련 있는 명칭과 기술적인 용어에 관한 내용 외에도 미탄니와 다른 권력 간의 협정을 맺을 때 언급되는 신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 신들의 존재가 바로 많은 수의 아리아인이 미탄니에 거주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자료다. 도덕적 질서를 관장하는 바루나 같은 인도 신들의 존재 말이다. 히타이트가 미탄니를 멸망시킨 건 기원전 14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그로부터 200년 후 히타이트족도 에게 해에서 몰려온 해양민족 때문에, 정점을 지난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서서히 붕괴되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아시리아인의 야망이 서서히 기지개를 켰다.
일명 ‘해양민족’으로 불린 사람들의 대규모 이주 원인은 아직 완전히 규명되지 않았다. 그 원인이 어찌되었든 이들의 이동으로 그리스・소아시아・시리아・팔레스타인의 도시와 궁전들은 완전히 파괴되어 흙으로 되돌아갔다. 아시리아는 유프라테스-티그리스 유역으로 넘어오려는 이 이주민들을 안간힘을 다해 물리쳤다. 같은 시기에 고대 이집트 제20왕조의 2대 왕으로 팔레스타인 땅 일부를 차지했던 람세스 3세도 국경지역에서 두 차례 힘겨운 전투를 벌인 끝에 이 해양민족의 대부분을 되돌려 보내는 데 성공했다. 기원전 1182년에 이르러서 이 끈질긴 파라오는 해양민족을 바닷가 부근에서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도 완전히 몰아냈다. 외세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낸 아시리아인에게는 고대 서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시리아 군사력도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였다. 기원전 9세기에 이르러서 아시리아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 60,000명의 군대를 배치했으며, 1세기 후인 기원전 8세기에는 정규 병력이 75,000명에 육박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기원전704~681년까지 아시리아를 통치한 왕 센나케리브(성경에는 산헤립)의 집권시기에 병력이200,000명으로 불어났다. 그의 군사력은 막강했으나 국내의 크고 작은 반란이 그칠 줄 몰랐다. 급기야 바빌로니아의 반란세력이 센나케리브의 아들이자 바빌론의 통치자였던 아슈르나딘슈미를 엘람족에게 넘기는 사건이 일어났다. 격노한 센나케리브는 보복조치를 단행하여 기원전 689년에 엘람 왕국을 무찌르고 바빌론을 수복했다.
센나케리브의 병사들이 아름다운 도시 바빌론을 무차별 약탈했다. 센나케리브의 명령 하에 이뤄졌을 이 약탈은 자승자박인 악수였다. 센나케리브는 몇 년 후 목숨으로 이 악업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바빌론 시민뿐 아니라 아시리아인도 그의 바빌론 파괴를 신성모독으로 여겼다. 왕위를 탐낸 센나케리브의 아들들은 이런 민심을 등에 업고 아버지를 살해한다. 사실 아시리아에는 분명한 왕위 후계자가 있었다. 가장 아끼던 아들 아슈르나딘슈미가 엘람족의 손에 목숨을 잃자 센나케리브는 에사르하돈을 황태자로 책봉해놓았다. 부왕의 살해 소식을 전해들은 에사르하돈은 골육상쟁의 진흙탕 싸움에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예감하고 비통해한다.
내 형제들은 이성을 잃고 신들이 끔찍하게 여길 악행을 저질렀다. 니네베에서 품은 악마 같은 계획을 가지고, 무력에 의존하여 손에 잡힐 것만 같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숫염소처럼 서로 치고받았다. 아시리아의 귀족들은 이미 충성을 맹세했던 선왕이 선택한 황태자에 대한 서약을 충실히 지켰다. 귀족들의 원조를 등에 업고 니네베로 진군한 에사르하돈은 내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니네베 시민이 “그의 발에 입을 맞추며” 신왕의 탄생을 경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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