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슬러와 데 스틸과의 역사적 만남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키슬러와 데 스틸과의 역사적 만남은 1923년 카렐 차펙크의 무대장치를 제작하기 위하여 비인에서 베를린으로 왔을 때 이루어졌다.
키슬러는 앞서 인용한 토마스 H. 크레이톤과의 대담에서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고 있다.15
어느 날 밤의 일이었습니다.
제2막이 끝나고 무대 뒤편의 대기실을 나오려고 할 때, 한 남자가 다가왔습니다.
키가 큰 남자였는데, 검은 셔츠에 흰 넥타이를 매고 한쪽 눈에 안경을 쓰고 있었다고 기억되는군요.
손에는 사슴가죽으로 만든 고급 장갑을 끼고 모자는 쓴 채로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반 뒤스부르크였습니다.
내게 다가와서 “키슬러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더군요.
나는 낯선 사람으로부터 불쑥 질문을 받은 터라 다소 놀라면서 “접니다.”라고 대답했지요.
그가 “당신이 키슬러군요!”라면서 뒤돌아 손짓을 하니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쿠르트 슈비터스, 한스 리히터, 모흘리-나기, 엘 리시츠키, 베르너 그라페 등이었습니다.
그날 밤 미스 반 데어 로에까지 합세하여 건축과 미래의 극장 <엔드리스 극장> 등에 관하여 밤새워 대화를 계속했다고 한다.
한편 당시의 경향들이 아직 과거흔적을 남겨놓고 있던 데 반하여, 의 무대장치는 기계시대의 새로운 구성요소인 완전한 추상적 형태에 의한 것이었다.
특히 카메라 셔터와도 흡사한 영사막의 개폐장치나 텔레비전 영사를 위한 장치를 포함하고 있었다.
무대공간의 연출에 영상과 그 확대 및 축소에 의한 효과를 도입한 것이다.
은 ‘시간적 구성주의’11)라고도 할 수 있는 독창성을 지니고 있었다.
다음해 키슬러는 비인에서 개최된 음악과 극장예술축제의 ‘새로운 극장기술 국제전’에 무대기술부문 디렉터로 참가하게 되는데,12) 그 이후 극장공간을 출발점으로 하는 그의 작업은 유럽 예술가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빈에서 발표된 <엔드리스 극장>은 1910년대 유럽에서 활성화했던 축제 공간의 연출과 동일선상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붕괴와 해체 이후에 등장한 구성에로의 지향, 다시 말하면 데 스틸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 원리의 발견과 맥락을 같이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특히 키슬러는 연극상연의 장을 새롭게 등장한 건축개념으로부터 유추했다.
이에 따라 공간구성에 있어서도, 건축공학적 구조에 있어서도 독창적인 것이었다.
<엔드리스 극장>은 상하로 납작하게 눌려진 타원구체이면서 2중의 유리로 된 곡면의 연속적인 각체구조로 되어 있다.
그것은 중력에 모든 하중을 두는 역학구조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장력에 의한 하중분산을 의도한 구석이 없는 독립된 구조체이다.16
보편적인 원리의 발견에 주력했던 데 스틸의 사상과 맥락을 같이 하는 이 같은 발상은 1925년에 파리 그랑 팔레에서 개최된 ‘국제 장식미술과 현대산업 박람회’에서 발표된 <공중도시>에서 다시 한 번 시도되었다.
"엔드리스’개념에 입각한 극장의 내부에는 바닥으로부터 솟아 있는 두 줄의 엘리베이터와 천장으로부터 내려뜨려진 또 다른 엘리베이터, 그리고 관객과 배우가 이동하기 위한 다리와 통로가 있다.
무대는 두 개의 교단식 무대와 또 하나의 ‘공간무대’로 되어 있고, 돔 전체에 영사할 수 있는 장치를 포함하고 있다.
건축의 밑 부분에는 호텔, 정원, 카페 등이 있다.
이 계획안의 일부에 대한 실물 크기의 모형이 비인에서 개최된 ‘새로운 극장기술 국제전’에 출품된 <공간무대>(1924)이다.
1923년부터 25년에 이르는 짧은 시기에 이러한 독특한 극장건축 프로젝트를 발표한 키슬러는 1926년 뉴욕의 스타인웨이 홀에서 개최된 ‘국제극장박람회’의 감독으로 초빙되어 유럽 극장에 관한 아방가르드들의 많은 자료를 갖고 뉴욕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