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층 맨 앞자리를 확보한 관객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은 장내의 어떠한 장소에서도 완벽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 같은 실용적인 면만을 충족시키면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어떤 극장 건축도 이처럼 당연한 사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천장에 가까운 좌석의 관객은 무대의 윗부분과 무대 안쪽을 볼 수 없었으며, 그 대신에 상연이 끝날 때까지 줄곧 무대의 바닥과 프롬프트 박스(Prompt Box)에 있는 프롬프터(Prompter)4)를 지켜 볼 수밖에 없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발생한다.
일층 맨 앞자리를 확보한 관객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그들도 무대 전체를 확인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양측에 튀어나온 객석 및 칸막이석의 관객은 무대의 우측이나 좌측을 단념할 수밖에 없다.
더욱 기막힌 것은 가운데에 앉은 관객에게조차도 배우나 무대장치, 또는 소도구 등이 전후로 겹치는데다가, 설사 본다고 해도 그것은 대부분 실루엣이거나 원경에 불과하다.1


이상과 같이 키슬러는 르네상스의 원근법에 의존한 프로세니엄 아치형 극장구조의 불합리성을 세련되고 냉소적인 표현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무대의 관계는 18∼19세기의 극장보다 셰익스피어가 활약하고 있었던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가무대가 훨씬 더 민주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프로세니엄 아치(proscenium arch)형 무대의 개구부(開口部)는 관객을 향하여 한 방향으로만 개방되어 있고, 그 주위는 마치 회화작품을 에워싼 액자와 같은 프레임에 의해 차단되어 있다.
프로세니엄 아치형 무대는 원근법에 근거하는 회화적 공간구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기 위한 이상적인 위치는 개구부의 중앙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 관객석에 한정된다.
프로세니엄의 바깥쪽은 벽면에 에워싸여 있고, 안쪽에는 눈속임을 위한 일루전의 배경막이 걸쳐 있다.
키슬러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은 감방과도 같은 폐쇄공간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는 달리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상연한 바 있는 <스완 좌>는 좌우의 벽도 천장도 없는 개방공간이었다.
게다가 숙사(宿舍)의 중정(中庭)에 임시로 설치된 것이므로 고정된 객석도 있을 리 없다.
사람들은 잘 보이는 자리를 찾아 그곳에 계속 서 있을 수도, 자유롭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감상할 수도 있었다.
때에 따라서는 중정이 있는 그대로 무대장치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무대와 객석을 대립시키는 공간의 이분화는 애초부터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또한 여기서는 프로세니엄 아치형 극장처럼 연극행위가 무대 위에 한정되는 일도 없다.
객석을 포함하는 주위의 공간도 극적 세계의 일부였던 것이다.


러시아 구성주의의 연극에서도 이 같은 공간구조를 찾아볼 수 있는데, 몇몇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은 객석에서의 해프닝은 물론 야외극과 같이 아예 극장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 공연을 통해 극장공간에 대한 보수적인 이해를 타파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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