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연극적 시대’ 속에서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다다이스트인 후고 발은 “1910년부터 1914까지 나에게는 모든 것이 연극이었다.
생활도, 사람들도, 사랑도, 모럴도. 연극은 형용하기 어려운 자유를 암시하고 있었다”5라고 말했다.
그의 지적대로 20세기 초 유럽은 연극적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문화 인류학자 야마구치 마사오도 이 시대만큼 유럽이 축제적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던 시대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6
낭만주의, 인상주의, 상징주의, 기계시대를 거친 이 시대야말로 사상적 예술적으로 20세기를 성격 짓는 기본적인 가치관과 새로운 감수성, 그리고 삶의 방식이 형성된 시기이다.
이 시기를 크게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해당하는 준비기와 대전 후의 절정기로 나눌 수 있는데, 지역적으로는 영국,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선진공업국과,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중동지역 등의 후진공업국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런데 20세기 예술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예술운동, 특히 사회적 의식을 지닌 예술운동인 표현주의, 미래파, 구성주의, 바우하우스, 데 스틸은 전부 후진지역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프로파간다와 그룹 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면서 그들의 이념을 사회적으로 어필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유럽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무수히 많은 모임과 전람회로 대표되는 데몬스트레이션을 행했다.
나아가서 기존의 예술장르를 넘어서는 사상적 또는 예술적 실험과 표현방법이 탐구되었다.
따라서 한 작가가 다양한 영역의 작품을 발표하는 것도 당연한 사실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 같은 몇 가지 특성을 고려한다면, 그들이 추구했던 예술상의 혁명이 궁극적으로는 연극적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학교’라는 형식을 빌어 예술운동의 형태를 갖추었던 바우하우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바우하우스는 발터 그로피우스를 구심점으로 여러 예술가들이 모여 교육 커리큘럼을 정하고 역할을 분담하고 있었는데, 미술학교였음에도 불구하고 연극에 대한 연구는 물론 각종 축제가 성행했다.
바우하우스보다 포괄적인 테마를 설정했던 그 밖의 예술운동들도 자유롭고 다양한 발표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혁명과 병행해서 전개된 러시아 구성주의는 예술혁명과 문화혁명인 동시에 사회혁명을 이룩하겠다는 목표를 지니고 있었는데, 연극상연의 장도 극장공간에 한정하지 않고 거리나 광장 등의 도시공간으로 확대해갔다.
마야코프스키는 좥예술 군대에의 지령좦(1918)에서 “거리는 우리들의 붓이며 광장은 우리들의 팔레트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다.7


또한 마야코프스키, 카멘스키, 블류크의 서명이 있는 1918년의 좥명령좦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화가나 작가는 지금 곧 화구통을 걸머지고, 그들이 좋아하는 붓으로 장식하고 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을과 역, 그리고 레일 위를 영원히 달릴 것만 같은 차량들의 모든 옆구리, 이마, 그리고 가슴을.


1920년 전후 러시아에서는 이같은 호소가 구호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현되고 있었다.
마야코프스키가 그린 포스터는 그의 동지들에 의해 전국에 유포되었다.8
또한 차량이나 선체에 프로파간다의 시나 그림을 가득 채운 ‘선전열차’ 또는 ‘선전 선(船)’ 등은 마치 이동하는 포스터와 같은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1920년 어느 날 비데부스크 거리의 전차, 쇼 윈도, 가옥 등이 눈부실 만큼 상큼한 색채로 채색되기도 했다.


낮선 지방도시. 서러시아의 마을들과 같이 거리는 붉은색 기와로 뒤덮여 있었다.
그을려 있고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 마을은 이미 변했다. 주요 도로 주변의 붉은 기와가 흰색 도료로 뒤덮여 있다.
그리고 흰색 바탕에 흩어져 있는 것은 녹색 고리. 거기에다 오렌지색의 정방형. 청색 장방형.9


1920년의 비데부스크. 카시미르 말레비치의 붓이 기와와 벽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에이젠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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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상연도 꼭 극장에 한정될 필요가 없었다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목재증산을 계몽하기 위한 거대한 프로파간다 패널을 도시의 도로 중앙에 설치하여 도시와 지방을 연결했다.
시민의식을 계몽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이 같은 거대한 스케일의 프로파간다 이미지는 일상적인 풍경의 도시나 시골마을에 시각적 충격을 주어, 궁극적으로 일정의 문맥을 지닌 일상적인 생활환경을 이질적인 것으로 변모시키는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최근에 볼 수 있는 슈퍼그래픽의 원류를 여기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연극상연도 꼭 극장에 한정될 필요가 없었다.
페트로그라드7)에서 상연된 <겨울궁전 습격>이라는 제목의 극에는 6천여 명이 참가했다고 하는데, 이때 관객은 놀랍게도 10만여 명이었다고 전해진다.
이것이야말로 ‘도시연극’이라 할 수 있는 규모의 초(超)연극적 상연의 좋은 예이다.8)


다소 소규모의 예로는 1923년 트레차코프의 멜로드라마 <가스 마스크>의 상연을 들 수 있는데 이것도 극장무대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리펠리노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가스마스크>는) 모스크바에 있는 가스공장의 기계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파이프들의 중앙에서 행해졌다.
그러나 이것은 극의 내용과 무관한 것으로 기계를 직접 소품으로 사용하는 구체적인 연출은 개입되지 않았으며, 호감을 주는 일련의 연기는 현실의 배경과는 무관하게 분리된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에이젠슈타인은 “미묘한 극적 구조는 공장의 거대한 터빈 발전기에 압도되어 검게 빛나는 원통형의 장치와 함께 참혹하게 자신의 모습을 움츠리고 있었다.
아마도 극의 목적은 연극과 실생활간의 경계를 타파하는 데 있었던 것 같다.10


리펠리노는 이 같은 시도는 에브레이노프의 형식주의에 대응하는 것이기도 하다면서, “생활을 극화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예술가들의 의무이다.
새로운 종류의 연출가, 다시 말하면 생활의 예술가가 태어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구성주의는 생활의 예술화를 목표로 했다.
이 같은 극적 공간과 일상의 만남은 새로운 형태의 이화작용(異化作用)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유리 안넨코프의 저서 좥동시대인의 초상좦을 보면 1923년 3월 메이어홀드는 S. 트레티아코프의 <소란스런 대지>를 상연했는데, 공연 중 객석에 있던 트로츠키가 무대 위에 등장했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11


항상 그렇듯이 메이어홀드의 연출은 다양하면서도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었다.
희곡의 테마는 내전, 짜리즘9)의 붕괴, 백군의 괴멸이었다.
L. 포포바의 구성주의적 무대장치에는 스크린이 도입되었는데 주로 정치적인 슬로건이 영사되곤 했다.
예를 들어 “이 상연을 군사 인민위원회의 레후 타운드비치 도로츠키에게 바친다”라는 문자가 영사되고 이것을 읽은 관객들은 기립하여 박수를 치면서 “인터네셔널”을 외치기 시작했다.
트로츠키도 기립해서 박수를 쳤다.
이어서 그 앞에서는 실물의 장갑차, 오토바이, 트럭 등이 관객석을 횡단해서 무대 위로 올라가는데, 이것 또한 관객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붉은 군대 만세!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향해 전진!”등.


어떤 막의 도중에 우연히 트로츠키의 좌석을 뒤돌아보니 벌써 그는 자리를 뜨고 없었다.
그가 연극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가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게 트로츠키는 2-3분 지나자 무대 위에 등장했다.
그리고 배우들이 열어준 길 사이로 걸어 나와서는 붉은 군대 창립 5주년을 기념한다며 현재 진행 중인 연극의 내용과 연결되는 연설을 했다.
폭풍과도 같은 갈채를 뒤로하고 연극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진행됐으며 트로츠키는 다시 자신의 좌석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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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실생활을 융합하는 시도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연극과 실생활을 융합하는 이 같은 시도가 메이어홀드에게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미 1921년 벨바렌의 <새벽>에서 배우들이 객석을 향해 선전용 전단을 뿌린 적이 있다.
또한 모스크바에서 방금 도착한 아직 공개되지 않은 전보-크리미어의 페레코프스키 해협탈취에 관한 제5군 혁명군사 소비에트 멤버인 스미그리(후에 스탈린에게 총살된다)의 전보-를 무대 위에서 낭독하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구성주의의 연극은 종래의 연극 감상 구조의 타파, 다시 말하면 실제 생활과 연극을 구별하지 않음은 물론 ‘무대와 그것을 마주하는 객석’이라는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의미를 확장시켰다.
최종적으로는 연극적 환영과 현실세계 사이에 경계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각각의 목적을 일치시켜 나갔다.
논자에 따라서는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인식을 자극시키고, 증폭시키고, 개방해나가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이 같은 방법을 동원했다는 견해도 있다.
방법론적으로 보면 1960년대 미국에서 발생한 해프닝이나 이벤트의 무대나 퍼포먼스에 근접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회적 영향이라는 측면에서는 러시아 구성주의가 행한 일련의 시도에 좀더 비중을 두지 않을 수 없다.


이같이 새로운 사회와 문화의 형성을 궁극적인 목표로 했던 예술가들에게는 특정 예술분야에만 관여하는 전문화보다는 다방면에 걸친 활동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로드첸코는 화가인 동시에 조각가였으며, 추상적 구성주의의 방법론에 입각한 인테리어 디자인과 가구디자인, 그리고 노동자 복장의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활동했다.
또한 그것들을 학생들에게 지도하기도 했다.
타틀린의 경우도 조각으로도 볼 수 있는 구성물의 실험을 시작으로 유명한 <제3 인터네셔널 기념탑>(1920)을 설계했고, 의자 설계와 <레타틀린>(1929-32)이라고 명명된 개념적인 비행체의 모형을 제작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했다.
그들의 활동은 순수예술과 디자인을 구분하지 않으면서 폭넓게 전개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엘 리시츠키는 러시아 구성주의를 서방세계에 소개한 인물인 동시에 구성주의와 근접한 사상을 지닌 예술가들과 교류를 계속한다.
예를 들어 1922년의 바이마르에서는 <구성주의자와 다다이스트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리시츠키는 여기에서 반 되스브르그, 막스 파차츠, C. V. 에스테런, A. 케메니, 한스 리히터, L. 모홀리-나기, 한스 아르프 부부, 트리스탄 차라 등과 만났다.
이 회의에는 러시아로부터 에렌브르그, 나움 가보, 안톤 펩스너 등도 참가했다.
키슬러도 1923년 베를린에서 상연된 카렐 차펙크의 을 위한 무대장치를 제작하면서 리시츠키와 만난 바 있다.


리시츠키의 건축과 회화작품에 붙여진 개념인 ‘프로운(Proun)’10)은 후에 그래픽디자인 및 전시디자인 분야에까지 적용된다.
리시츠키도 단지 평면상에 전개되는 회화적 표현세계에 스스로의 영역을 한정하지 않았다.
리시츠키 자신도 “회화는 건축을 위한 예비단계에 불과하다”고 했다.
또한 그에게 예술성과 사회성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일한 목적을 지닌 것이었다.
리시츠키는 슈프레마티즘을 제창하고 환영을 완전히 배제한 회화적 실험을 행한 말레비치의 경우처럼 포스터, 타이포그래피 분야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러시아 구성주의자 중에는 다영역성과 사회적 전개를 의도하지 않고 가보나 펩스너처럼 순수한 조형성을 추구했던 인물도 있다.
이 두 사람이 1920년에 발표한 「리얼리즘 선언」은 공간과 시간의 구성에 의한 동적 조형세계에 관한 것이다.
러시아 구성주의자들 사이에는 몇 가지 서로 다른 목표와 방법론적 차이가 있었다.
가보나 펩스너는 결국 러시아를 등지고 서구세계로의 망명을 택했고, 러시아 구성주의의 위대한 사회적 실험도 스탈린 독재가 포악해진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활동을 중지하게 된다.


키슬러의 사상적 배경에는 장식의 배제를 주장했던 아돌프 루스의 사회주의적 시각과, 실천적인 사회문화혁명을 배경으로 예술가 및 디자이너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던 러시아 구성주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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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데 스틸과의 만남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키슬러는 데오 반 뒤스브르크가 주도한 데 스틸과의 접촉을 통해 그의 사상적 입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구성주의가 20세기 초 유럽에서 행해진 문화혁명의 일환으로 이해되는 데 반하여 데 스틸은 그만한 평가를 얻고 있지 못하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20세기에 노출된 유럽의 도시환경을 가장 시각적인 형태로 보여준 것은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의 입체파가 도입한 콜라주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직관적 인식에 기초하는 콜라주 기법은 다다이즘에 이르러서도 거의 동일한 형태를 유지하면서 계속되었다.


기계기술문명의 발상지인 유럽의 도시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여전히 전통적인 미학체계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기계기술문명의 소산이라 할 수 있는 철골 구조물에 의해 창출되는 새로운 미의식의 등장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나아가서 철도와 자동차라는 2대 교통수단의 발전과 함께 움직임을 동반하는 각종 기계장치가 유럽의 도시와 전원풍경을 바꾸었다.
지상뿐만 아니라 하늘의 풍경에도 비행선이나 비행기가 등장했다.
이것은 동식물 형태에 기반을 두는 유럽의 시각적 문맥 속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요소-기계기술문명의 산물인 공업생산품-가 끼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과 도시로의 인구집중이 가속화되면서 유럽의 대도시는 고도화된 소비환경을 형성하게 된다.
발터 벤야민은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낸 도시 베를린에서 본 것-모든 대상물이 상품화되고 매력적인 장식을 한 쇼윈도가 나열되어 있는 양상-을 유려한 문장으로 남겨 놓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문화와 도시의 해체는 이미 20세기 초엽의 유럽 도시에서 조용하면서도 확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콜라주와 후의 아상블라주(Assemblage)는 이 같은 문명의 상황을 직감한 예술가가 한 장의 타블로(tableau)를 통해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회화라는 예술양식이 지니고 있는 전통적인 문맥에서 콜라주에 의한 구성 또는 이미지의 해체를 제시한다는 것은 일종의 도전이었다.
콜라주에 차용된 대상물이 이미 눈에 익숙해진 상투적인 것일수록 이미지의 해체는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 중에서도 쿠르트 슈비터스의 ‘메르츠’시리즈는 이 같은 이미지의 해체를 보다 격렬한 방법으로, 또한 다양한 영역에 걸쳐 실천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회화적인 ‘메르츠’와 언어나 문자에 의한 ‘메르츠’, 그리고 3차원 상에 구성된 건축적인 ‘메르츠바우’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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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의 해체상태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론의 모색은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이 같은 이미지의 해체상황을 좀더 적극적으로 인식한 지식인 중 한사람인 벤야민은 전부가 인용문만으로 된 작품을 계획하기도 했다.12
한나 아렌트가 말한 바와 같이 벤야민은 ‘그의 생전에 발생한 전통의 파산과 권위의 붕괴가 회복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인식하고, 과거를 논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기서 말하는 ‘과거와의 소통가능성’은 ‘인용을 통한 소통의 가능성’으로 바꾸어 생각할 수도 있다.
벤야민은 에이젠슈타인이 그러했듯이 놀랄 정도의 장서벽 (藏書癖)을 가지고 있었다.
인용문에 의한 콜라주의 가능성은 그의 주요 관심사 중의 하나였던 장서벽에서 유래한 것이다.
벤야민은 ‘더없이 체계적이고 명료하게 배열된 600년 이상의 인용문’의 수집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관해서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수집가는 언제인가 그가 선택한 것들-과거에 거대하게 생성되고 있는 전체의 작은 부분에 불과했던 것-이 애초에 놓여 있는 위치의 전후관계를 파괴한다.
뿐만 아니라 독자성을 지닌 진짜만이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때문에 그들이 선택한 대상을 그 주변에 있는 일반적인 것으로부터 떨어뜨려 생각해야 한다.
수집가라는 인물의 성격은 산책가들과 마찬가지로 유행에는 뒤진 사람이겠으나, 벤야민에게 그들이 현대적으로 보여지는 이유는 역사 자체가 이미 그를 이 같은 파괴 작업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그는 단지 분쇄되어버린 조각들이 쌓인 곳에서 귀중한 단편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벤야민에게 중요한 것은 그 같은 문맥으로부터 단편을 걸러내어 그것들을 상호간에 예증될 수 있게, 또는 자유롭게 부유하는 상태에서도 각각의 존재이유를 증명할 수 있도록 새로운 방법으로 배열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초현실주의적인 몽타주의 일종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환경의 해체상태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론의 모색은 디아킬레프의 주도하에 여러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1909년 파리에서 시작된 디아길레프가 주도하는 러시아 발레단의 활동은 1929년경까지 파리에 체재하던 선구적이면서도 예리한 시각을 지닌 예술가들이 동참한 일종의 운동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들의 활동은 사회적 혁명에 밀착된 러시아 아방가르드와는 다른 방법으로 예술세계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무용은 극장공간에서 전개되는 종합예술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무용가 이외에도 무대장치가, 안무가, 음악가 등이 필요했다.
라벨이나 스트라빈스키의 음악뿐만 아니라, 극장공간을 장식하는 무대장치와 의상은 20세기 초 미술의 단면을 보여주는 데몬스트레이션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초창기에는 레온 박스트의 동양적 신비주의를 연상시키는 이미지와 색채에 의해 구성된 무대가 대부분이었으나, 후에 에콜 드 파리 예술가들이 참가하여 국제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그중 장 콕토의 발레극 <빠라드>(1917)는 시간적 공간적 콜라주를 성공한 예로 평가할 수 있는데, 여기서 에릭 사티의 음악은 피카소의 무대장치 및 의상과 함께 센세이션한 반응을 일으켰다.
사티의 음악은 타자기의 기계음이나 소방차의 사이렌 등 도시의 소음을 있는 그대로 음악적 소재로 선택하고, 여기에 전통적인 방법에 의한 음악과 재즈의 즉흥연주가 덧붙이는 형태였다.
피카소의 무대디자인은 서커스 텐트나 음악당을 옮겨 놓은 듯했고, 의상은 콜라주를 입체화한 듯했다.
또한 자전거를 탄 곡예사와 천방지축의 슬랍스틱 코미디(slapstik comedy)가 전통적인 무용의 문맥에 돌연 삽입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을 앞서 언급한 러시아 구성주의의 무대와 동일선상에 위치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방법은 달랐지만 여기서도 현실세계와의 만남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뮤직 콩크리트 소음음악, 해프닝 등의 예술적 실험이 유행되었다.
그런데 이 같은 실험의 선구적인 사례가 이미 <빠라드>에서 시도되었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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