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과 실생활을 융합하는 시도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연극과 실생활을 융합하는 이 같은 시도가 메이어홀드에게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미 1921년 벨바렌의 <새벽>에서 배우들이 객석을 향해 선전용 전단을 뿌린 적이 있다.
또한 모스크바에서 방금 도착한 아직 공개되지 않은 전보-크리미어의 페레코프스키 해협탈취에 관한 제5군 혁명군사 소비에트 멤버인 스미그리(후에 스탈린에게 총살된다)의 전보-를 무대 위에서 낭독하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구성주의의 연극은 종래의 연극 감상 구조의 타파, 다시 말하면 실제 생활과 연극을 구별하지 않음은 물론 ‘무대와 그것을 마주하는 객석’이라는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의미를 확장시켰다.
최종적으로는 연극적 환영과 현실세계 사이에 경계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각각의 목적을 일치시켜 나갔다.
논자에 따라서는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인식을 자극시키고, 증폭시키고, 개방해나가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이 같은 방법을 동원했다는 견해도 있다.
방법론적으로 보면 1960년대 미국에서 발생한 해프닝이나 이벤트의 무대나 퍼포먼스에 근접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회적 영향이라는 측면에서는 러시아 구성주의가 행한 일련의 시도에 좀더 비중을 두지 않을 수 없다.
이같이 새로운 사회와 문화의 형성을 궁극적인 목표로 했던 예술가들에게는 특정 예술분야에만 관여하는 전문화보다는 다방면에 걸친 활동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로드첸코는 화가인 동시에 조각가였으며, 추상적 구성주의의 방법론에 입각한 인테리어 디자인과 가구디자인, 그리고 노동자 복장의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활동했다.
또한 그것들을 학생들에게 지도하기도 했다.
타틀린의 경우도 조각으로도 볼 수 있는 구성물의 실험을 시작으로 유명한 <제3 인터네셔널 기념탑>(1920)을 설계했고, 의자 설계와 <레타틀린>(1929-32)이라고 명명된 개념적인 비행체의 모형을 제작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했다.
그들의 활동은 순수예술과 디자인을 구분하지 않으면서 폭넓게 전개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엘 리시츠키는 러시아 구성주의를 서방세계에 소개한 인물인 동시에 구성주의와 근접한 사상을 지닌 예술가들과 교류를 계속한다.
예를 들어 1922년의 바이마르에서는 <구성주의자와 다다이스트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리시츠키는 여기에서 반 되스브르그, 막스 파차츠, C. V. 에스테런, A. 케메니, 한스 리히터, L. 모홀리-나기, 한스 아르프 부부, 트리스탄 차라 등과 만났다.
이 회의에는 러시아로부터 에렌브르그, 나움 가보, 안톤 펩스너 등도 참가했다.
키슬러도 1923년 베를린에서 상연된 카렐 차펙크의 을 위한 무대장치를 제작하면서 리시츠키와 만난 바 있다.
리시츠키의 건축과 회화작품에 붙여진 개념인 ‘프로운(Proun)’10)은 후에 그래픽디자인 및 전시디자인 분야에까지 적용된다.
리시츠키도 단지 평면상에 전개되는 회화적 표현세계에 스스로의 영역을 한정하지 않았다.
리시츠키 자신도 “회화는 건축을 위한 예비단계에 불과하다”고 했다.
또한 그에게 예술성과 사회성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일한 목적을 지닌 것이었다.
리시츠키는 슈프레마티즘을 제창하고 환영을 완전히 배제한 회화적 실험을 행한 말레비치의 경우처럼 포스터, 타이포그래피 분야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러시아 구성주의자 중에는 다영역성과 사회적 전개를 의도하지 않고 가보나 펩스너처럼 순수한 조형성을 추구했던 인물도 있다.
이 두 사람이 1920년에 발표한 「리얼리즘 선언」은 공간과 시간의 구성에 의한 동적 조형세계에 관한 것이다.
러시아 구성주의자들 사이에는 몇 가지 서로 다른 목표와 방법론적 차이가 있었다.
가보나 펩스너는 결국 러시아를 등지고 서구세계로의 망명을 택했고, 러시아 구성주의의 위대한 사회적 실험도 스탈린 독재가 포악해진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활동을 중지하게 된다.
키슬러의 사상적 배경에는 장식의 배제를 주장했던 아돌프 루스의 사회주의적 시각과, 실천적인 사회문화혁명을 배경으로 예술가 및 디자이너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던 러시아 구성주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