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의 해체상태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론의 모색은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이 같은 이미지의 해체상황을 좀더 적극적으로 인식한 지식인 중 한사람인 벤야민은 전부가 인용문만으로 된 작품을 계획하기도 했다.12
한나 아렌트가 말한 바와 같이 벤야민은 ‘그의 생전에 발생한 전통의 파산과 권위의 붕괴가 회복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인식하고, 과거를 논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기서 말하는 ‘과거와의 소통가능성’은 ‘인용을 통한 소통의 가능성’으로 바꾸어 생각할 수도 있다.
벤야민은 에이젠슈타인이 그러했듯이 놀랄 정도의 장서벽 (藏書癖)을 가지고 있었다.
인용문에 의한 콜라주의 가능성은 그의 주요 관심사 중의 하나였던 장서벽에서 유래한 것이다.
벤야민은 ‘더없이 체계적이고 명료하게 배열된 600년 이상의 인용문’의 수집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관해서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수집가는 언제인가 그가 선택한 것들-과거에 거대하게 생성되고 있는 전체의 작은 부분에 불과했던 것-이 애초에 놓여 있는 위치의 전후관계를 파괴한다.
뿐만 아니라 독자성을 지닌 진짜만이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때문에 그들이 선택한 대상을 그 주변에 있는 일반적인 것으로부터 떨어뜨려 생각해야 한다.
수집가라는 인물의 성격은 산책가들과 마찬가지로 유행에는 뒤진 사람이겠으나, 벤야민에게 그들이 현대적으로 보여지는 이유는 역사 자체가 이미 그를 이 같은 파괴 작업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그는 단지 분쇄되어버린 조각들이 쌓인 곳에서 귀중한 단편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벤야민에게 중요한 것은 그 같은 문맥으로부터 단편을 걸러내어 그것들을 상호간에 예증될 수 있게, 또는 자유롭게 부유하는 상태에서도 각각의 존재이유를 증명할 수 있도록 새로운 방법으로 배열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초현실주의적인 몽타주의 일종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환경의 해체상태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론의 모색은 디아킬레프의 주도하에 여러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1909년 파리에서 시작된 디아길레프가 주도하는 러시아 발레단의 활동은 1929년경까지 파리에 체재하던 선구적이면서도 예리한 시각을 지닌 예술가들이 동참한 일종의 운동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들의 활동은 사회적 혁명에 밀착된 러시아 아방가르드와는 다른 방법으로 예술세계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무용은 극장공간에서 전개되는 종합예술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무용가 이외에도 무대장치가, 안무가, 음악가 등이 필요했다.
라벨이나 스트라빈스키의 음악뿐만 아니라, 극장공간을 장식하는 무대장치와 의상은 20세기 초 미술의 단면을 보여주는 데몬스트레이션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초창기에는 레온 박스트의 동양적 신비주의를 연상시키는 이미지와 색채에 의해 구성된 무대가 대부분이었으나, 후에 에콜 드 파리 예술가들이 참가하여 국제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그중 장 콕토의 발레극 <빠라드>(1917)는 시간적 공간적 콜라주를 성공한 예로 평가할 수 있는데, 여기서 에릭 사티의 음악은 피카소의 무대장치 및 의상과 함께 센세이션한 반응을 일으켰다.
사티의 음악은 타자기의 기계음이나 소방차의 사이렌 등 도시의 소음을 있는 그대로 음악적 소재로 선택하고, 여기에 전통적인 방법에 의한 음악과 재즈의 즉흥연주가 덧붙이는 형태였다.
피카소의 무대디자인은 서커스 텐트나 음악당을 옮겨 놓은 듯했고, 의상은 콜라주를 입체화한 듯했다.
또한 자전거를 탄 곡예사와 천방지축의 슬랍스틱 코미디(slapstik comedy)가 전통적인 무용의 문맥에 돌연 삽입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을 앞서 언급한 러시아 구성주의의 무대와 동일선상에 위치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방법은 달랐지만 여기서도 현실세계와의 만남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뮤직 콩크리트 소음음악, 해프닝 등의 예술적 실험이 유행되었다.
그런데 이 같은 실험의 선구적인 사례가 이미 <빠라드>에서 시도되었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