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사의 대응방식은 많은 변수에 의해 좌우된다

『아동 미술치료 Child Art Therapy』, 주디스 아론 루빈(2010, 출판사 知와 사랑) 중에서

불확실한 초기 단계에 아이는 새로 만난 치료사를 시험testing해보고자 할 때가 많다.

시험은 여러 형태를 띨 수 있다.

아이는 추가적인 관심이나 치료 용품을 요구하거나, 자신이 어디까지 행동해도 되는지 시험해보려고 하거나, 치료 시간이나 장소에 대해 물어보려고 할 것이다.

치료사는 아동의 개인별 특성에 맞춰 치료 장소의 경계를 달리해야 한다.

아동 개개인이 편안하게 느끼는 장소의 한계나 분위기가 모두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미술치료사 개개인의 성향이나 기준도 다양할 수 있다.

따라서 치료사는 자신의 성향과 기준,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고, 어린이 내담자에게 그 사실을 정확히 인지시켜주어야 한다.

물론 그러한 내용을 전달할 때는 온화하고 공감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아동 미술치료』의 저자 주디스 아론 루빈은 자신의 경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규칙 혹은 한계가 사람이나 사물을 대상으로 공격성을 파괴적으로 표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개인치료에서이든 집단치료에서이든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아이가 공격적인 성향을 보일 경우, 치료사는 공격성을 허용되는 행동으로 표출하도록 유도한다.

예를 들면 점토를 공 모양으로 조그맣게 빚어 사람이 아닌 정해진 과녁에 맞히며 놀도록 해주는 것이다.

치료사는 한계나 규칙을 미리 말해주기보다는 아이가 특정 행동을 보이면 그때그때 대응하는 것이 좋다.

한계나 규칙을 설정할 때와 마찬가지로, 치료사의 대응방식은 많은 변수에 의해 좌우된다.

이를테면 사회적, 제도적 기준, 개인적인 선호, 그리고 어린이가 겪고 있는 문제의 특성에 따라 대응방식이 달라진다.

치료사는 아동의 특정 행동에 대응할 때도 명료하고 일관적이며, 단호하면서도 온화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즉 분명하고 일관적인 메시지를 단호한 태도로 전달하되 어린이가 의사나 요구를 표현하면 언제든 즉시 대응해줄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따금 아이가 한계나 규칙을 약간 어기더라도 관대하게 눈감아줌으로써 ‘좋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유혹이 생길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태도로는 절대로 안정적이고 안심되는 관계나 분위기를 만들지 못한다.

그 직후 잠시 동안은 만족감을 얻을지 모르지만, 아이는 그런 태도에 근본적인 위협을 느낀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마음껏 스스로를 드러내고 모험을 할 수 있는 안정적인 틀이다.

미술치료사라는 직업에 발을 내딛는 이유는 저마다 다양하겠지만, 공통적인 동기는 남을 보살피고자 하는 욕구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경험이 부족하거나 미숙한 치료사들은 종종 한계를 명확히 설정하지 못하거나, 아이의 즉각적인 요구나 필요에 늑장 대응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눈앞에 있는 상처받은 아이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명확한 한계를 긋지 않고 아이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는 행동은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안정적이고 신뢰 있는 치료사-내담자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이는 치료사로서 받아들이기 힘들지라도 명심해야 할 부분이다.

치료사는 처음부터 한계와 기준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평가를 할 때나 치료를 할 때 한계와 기준을 명확히 해두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아이들은 이 시작 단계에서 이 특별한 ‘놀이’의 규칙이 무엇인지, 즉 미술을 통해 어떤 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배운다.

치료사는 익숙하지 못한 상황에 맞닥뜨린 아이들에게 치료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 깨닫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아이와 신뢰를 형성하고 긍정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치료사로서 일관적인 태도를 보여야 할 뿐 아니라, 아이가 겁먹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아이의 미술작품이나 행동을 해석하고 문제와 대면하는 일은 나중 문제이다.

처음에는 우선 분위기를 가능한 한 즐겁고 온화하게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험 단계에서는 아이가 또 미술치료를 받으러 오고, 미술치료 활동에 참여하고 싶도록 만드는 것에 치중해야 한다.

이러한 우호적이면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려면 아이의 ‘친구’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론 아이와 친화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친구가 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일 때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치료할 때는 아이와 ‘친구’가 되는 걸 피해야 한다.

치료사는 지나친 친밀감을 내보이지 않으면서도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감정을 과장되게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온화하게 대하며,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으면서도 관심을 보여주어야 한다.

또한 치료사 자신의 사생활을 노출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다.

아이와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진정성’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정성이란 상대방에게 성실하고 정직하게 대하는 걸 의미한다.

굳이 상대에게 자신의 감정이나, 상상, 사생활에 대해 세세하게 말해줄 필요까지는 없다.

아이가 치료사 개인 신상에 물어볼 경우에는, 어떨 것이라 생각하는지 되물어보는 식으로 대응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러면 처음에는 아이가 실망할지 모르지만, 아이가 어떤 생각과 환상을 품고 있는지 알고 나면 아이를 더욱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다.

일단 아이가 어떤 생각이나 상상을 품고 있는지 듣고 그 의미를 해석한 후에는 신상에 대한 정보를 조금씩 알려주는 것이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치료사는 자신의 개인적인 정보 노출이 아이와 아이의 치료에 미칠 수 있는 파급력에 대해 뚜렷이 인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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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아동 가운데 5%가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아이브레인 iBrain』(2010, 출판사 知와 사랑) 중에서

새로운 디지털 기술이 사방에서 쏟아지고 있다. 이 기술은 지속적으로 뇌에 영향을 미치고 이에 의한 멀티태스킹은 우리의 집중력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40대 이상의 디지털 이주민들은 여러 가지 일을 나눠 주의를 집중하고, 혼란스럽게 세분화된 환경에 적응하는 걸 힘들어 한다. 그러나 뇌 신경망은 이 같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회로를 만들어낸다. 뇌는 정보에 대한 접근과 처리를 더 빠르게 하며 한 가지 과제에서 다른 과제로 빠르게 주의를 전환할 수 있도록 한다. 그 결과 우리는 기존의 방식을 대체하는 새로운 학습방법과 사고방식을 개발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익숙하지 않은 컴퓨터 프로그램의 사용방법을 익힐 때 잘 알 수 있다.

어느 정도의 뇌 자극은 건강에 유익하지만, 새로운 디지털 기술에 지나치게 노출되면 뇌의 적응 능력이 약화된다. 특히 유전적으로 이런 위험에 취약한 경우가 그렇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최신 기술이 요구하는 멀티태스킹을 잘 처리할 수 없어 주의력결핍장애ADD나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에 걸리고 있다. 주의력결핍장애ADD(Attention deficit disorder와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는 주의가 산만하고 과잉행동과 충동성, 학습장에 증상을 보이는 소아청소년기의 정신과적 장애이다.

미국 아동 가운데 5%가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를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최근에는 그 수치가 증가하고 있다. 그 원인은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 함께 작용하여 실제로 발병이 증가했거나 건강에 대한 인식이 크게 증대했기 때문이다. 아동의 뇌는 시각과 청각 자극에 민감하며, 이런 자극은 뇌신경의 초기 발달과 시냅스 성장을 촉진한다. 텔레비전, 비디오, 컴퓨터 같은 첨단 테크놀로지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에 걸릴 위험이 크다. 특히 생후 몇 년 동안 이런 기기에 노출되면 장애의 위험성은 더욱 커진다.

9-10학년 학생들의 인터넷 사용, 텔레비전 시청 및 비디오게임의 총시간을 측정한 결과 하루에 1시간 이상 비디오게임을 한 학생들은 그렇지 않은 학생들에 비해 주의력결핍장애나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의 증상이 더 심했다. 또한 게임을 많이 하면 할수록 학교생활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인터넷 중독에 빠진 초등학생들에게 주의력결핍장애와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증상이 현저하게 증가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2007년 타이완의 카오슝 의과대학의 연구자들은 2천 명 이상의 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해 인터넷 중독이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발생률과 높은 상관관계가 있음을 밝혀냈다. 이 연구 결과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증가율이 높을수록 인터넷 중독 증가율도 높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의 신경정신과 연구자들도 인터넷에 중독된 아동과 십대의 20%가 매우 심각한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증상을 보이고 있다고 발표했다.

워싱턴 대학의 드미트리 크리스타키스Dimitri Christakis 박사와 그 팀은 텔레비전 노출에 대해 위와 유사한 연구를 진행했다. 1,300여 명의 학생들을 조사한 결과, 그중 10%가 주의집중에 문제가 있었다. 1세 유아는 평균 하루에 2시간 정도 텔레비전을 시청했고, 3세가 되면 시청 시간이 이보다 두 배가 넘는 3.6시간이었다. 또한 7세이 이르면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아이들이 더 많아지고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진단을 받을 위험이 더 커졌다. 이러한 연구는 텔레비전 시청의 어떤 면이 뇌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는지 정확히 밝혀내지 못했다. 몇몇 전문가들은 텔레비전 영상의 급격한 변화가 신경회로를 자극해 급작스럽게 변환을 일으킨 것을 원인으로 꼽는다. 이런 현상이 성장기 뇌에 장기간에 걸쳐 일어나면 신경회로의 정상적인 기능에 변화가 생기며 주의집중 능력을 손상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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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지의 인물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프레데릭 존 키슬러는 1890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인에서 태어나2) 1965년 뉴욕에서 사망했다.
75년이라는 세월은 평전을 쓰기 위한 대상인물의 생애로 결코 짧은 것이 아니다.
특히 미국 고문서관의 자료목록을 보면, 그의 작업에 관해 언급한 신문, 잡지, 서적 등은-막대하다는 표현은 다소 과장이더라도-적은 분량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가 시대를 대표하는 어떤 양식의 창조에 기여한 인물이라는 뉘앙스를 느낄 수 없다.
그는 작가 개인의 조형세계를 고정된 양식으로 정착시키기에 급급했던 20세기의 많은 예술가들과는 전혀 다른 타입의 인물이었다.
그러한 예술가의 생애를 통찰하여 평전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가를 언급하기에 앞서, 기억해야 할 좀더 중요한 사실은 키슬러가 평생을 아웃사이더의 입장을 고수한 몇 안 되는 예술가 중의 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키슬러는 ‘건축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르 코르뷔제, 발터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어 로에 등과 달리 지나치게 많은 건축을 설계하지는 않았다.
필립 존슨의 언급대로 키슬러만큼 건물을 짓지 않고 유명해진 건축가도 없을 정도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는 극장건축가, 무대디자이너, 전시디자이너, 가구디자이너, 조각가, 화가, 그리고 시인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3)
이처럼 그는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자신의 예술관을 전개시킨 인물이다.
그를 단지 건축가로만 규정할 수 없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키슬러에 관한 논고의 어려움은 그가 남긴 작업이 이처럼 다양한 영역에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편 키슬러는 자신의 모든 작품에 대하여 제작의도 등을 빠짐없이 문장으로 남겨놓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실현되지 않은 미완의 프로젝트를 포함하여 그가 남긴 자료 전부를 각각의 영역별로 분류하여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독자들에게 키슬러의 조형세계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런데 생애를 통한 그의 활동을 살펴보면 그에 관한 평전을 적기 위해서는 먼저 20세기 미술에 관한 다각적인 이해가 필요하다는 자조적인 반성과 함께, 그의 활동이 다양한 영역에 걸쳐 전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일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어떤 사실을 역사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너무도 단편적인 처리기준에 의존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가 어떤 사실을 판단하는 데 있어 지나치게 공식적인 기준에 얽매여 있지는 않은지도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20세기의 4분의 3이 지나자마자 20세기 건축사, 20세기 회화사, 20세기 연극사, 20세기 조각사, 20세기 디자인사 등을 준비해왔다.
이미 기정사실이 된 각종 예술운동과 주의주장을 요약한 선언들, 그리고 무슨 무슨 양식 등이 이제는 역사가나 평론가의 문장 속에 공공연히 등장하고 있다.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과거의 많은 예술가들이 그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양식’ 또는 ‘주의’ 등의 꼬리표가 붙여진 채 역사박물관의 정리대상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그것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오늘날 자신의 영역을 고수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분야별 전문가가 양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전공분야 이외에는 무지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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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를 통한 키슬러의 활동을 살펴보면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생애를 통한 키슬러의 활동을 살펴보면 지난 동안 우리들이 취해온 전문화의 경향이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의 활동을 구속해왔는지를 절감하게 된다.
여기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우리는 20세기가 시작되고 20여 년 간 유럽 각지에서 열병과도 같이 행해진 예술혁명의 동향에 관해서 다시 한 번 ‘역사박물관’의 정리함을 해체하여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만큼 실험적인 목적을 지닌 예술가가 국가나 도시를 초월해 나름의 주장을 펼치면서 유럽 대륙을 누빈 시대는 없었다.
물론 다양한 영역에 걸친 조형 활동을 전개했던 예술가들도 결국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말았으나, 그 이전의 그들은 다양한 영역에 걸친 실험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탐구했었다.
키슬러도 빈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을 자유롭게 왕래했던 예술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 소비에트 공화국의 체제강화와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로 유럽의 지적 환경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이 때문에 예술혁명의 범주를 넘어서 문화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운동들이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예술에 대한 진보적인 사상의 소유자들 중 어떤 이는 전사했고, 어떤 이는 전향했으며, 어떤 이는 추방당했고, 어떤 이는 숙청당했으며, 어떤 이는 망명했고, 심지어는 자살한 이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어렵사리 살아남은 예술가들 중 몇 명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 대부분은 미국의 자유로움과 풍요 속에서 1920년대 그들이 추구했던 사상을 구체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실험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전문화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완성’시키고자 노력했다. 전후의 상황은 그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들의 활동을 어떤 전문영역에 집중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은 곧 좋든 싫든 그들이 ‘인사이더’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예술가가 스스로의 세계를 일정분야에 한정시킨다는 것은 인사이더가 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4)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키슬러는 마지막까지 다양한 영역에 걸친 활동과 실험적인 자세를 버리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키슬러야말로 1920년대의 실험정신과 혁명의 실천이라는 20세기 미술 고유의 목적을 고수한 진정한 생존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인 경우와 같이 작가가 남긴 작업의 결과만 가지고는 충분한 평가가 불가능한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따라서 키슬러의 활동과 20세기 초 유럽의 지적 영역 사이에 중복된 부분을 가능한 한 생생하게 파악하는 것이 그의 평전을 적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나치의 유태인 말살계획으로 대변되는 유럽의 갈등과 이에 따른 지식인의 미국망명,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관해서는 미국의 20세기 건축에 대한 바우하우스 지도자들의 공헌에 대하여 적고 있는 윌리엄 H. 조디의 『미국에서의 바우하우스의 여파/그로피우스, 미스, 브로이어 The Aftermath of the Bauhaus in America: Gropius, Mies, and Breuer』가 상세하다.
유럽에서 망명한 현대건축의 거장들은 미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키슬러는 미국에서도 여전히 아웃사이더의 입장을 고수한 인물이다.
앞의 책에서 조디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므로 인용해둔다.


다음에 거론해야 할 인물로 오스트리아 태생의 프레데릭 키슬러를 들 수 있다.
그는 건축, 무대디자인, 조각, 회화를 포함하는 시각예술의 전 영역에 걸쳐 활동했으나, 그가 미친 영향은 생전에는 아직 결정적이지 못했으며 마치 갓 싹튼 새싹과도 같이 한정된 범위에 그쳤다.”1 (볼드체에 의한 강조는 저자에 의함)


키슬러가 미국에서도 아웃사이더의 입장을 고수한 이유는 무엇일까?
후에 논하겠으나, 그것은 기계기술문명 하의 예술에 관한 자성의 결과 취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결과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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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뉴욕에 도착해서 1주일 정도 지난 뒤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나는 지금 뉴욕에 있다. 3일 전 키슬러의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오랜 동안 연락하지 못한 것에 대한 예(禮)를 표하고, 다소 늦은 감이 있으나 내년 1월부터 일본의 잡지에 키슬러에 관한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오늘밤 8시에 그녀의 집을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호텔에서부터 지하철 IRT선을 타고 세븐스 애비뉴의 14번가에서 내렸다.
여기에 온 것도 벌써 3번째다. 처음 방문한 것은 키슬러의 생전인 1961년 12월이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아파트의 입구에 도착했다.
56이라는 번호가 매겨져 있는 현관에 이르자 14년 전 키슬러의 스튜디오를 방문하여 그의 환경조각을 처음으로 보았던 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당시의 뉴욕 여행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5)


건축분야의 동향에 대해서는 서두에서 언급한 키슬러에 대해서 적지 않을 수 없다.
뉴욕에 도착해서 1주일 정도 지난 뒤 ‘레오 카스텔리’화랑을 통하여 키슬러에게 전화를 걸어 화랑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소개를 주선했던 이의 말로는 키슬러는 ‘괴짜’인데다 이상한 말만 하고 시간약속도 잘 안 지키는 사람이라고 하며 나를 긴장시켰다.
약속 시간에서 1시간 반이나 지나서야 비서를 대동하고 키슬러가 나타났다.
150㎝정도의 작은 키에 백발인 남자가 선뜻 손을 내밀었다.
조금은 이상한 액센트의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분명히 70이 가까운 나이일텐데 건강한 목소리였다.
“이 세상의 모든 건축가들은 하나같이 ‘수컷의 건축’을 설계하고 있는데, 나는 ‘암컷의 건축’을 구상하고 있다.”6)라며 그의 아이디어인 <엔드리스 하우스>(1950, 1959)를 설명해주었다.
당신의 작품을 한번 보고 싶다고 하니 그럼 다시 연락하라고 했다.


얼마 후에 그의 집을 방문했다. 마침 이탈리아의 화가 피에로 도라지오와 키슬러의 대담을 정리하고 있던 비서가 그 일부를 읽어주었다.
키슬러의 조각에 관하여 언급된 부분이었다.
또 도라지오가 지적이면서 상당히 훌륭한 화가라고 칭찬하는 부분도 있었다.
옆방은 작은 스튜디오였는데, 천장에 조각작품으로 보이는 것이 걸려 있었다.
그것은 천장으로부터 내려뜨려져 있는 작은 부분과 벽으로 연결되어 걸쳐 있는 부분으로 되어 있었는데, 앞서 언급한 대담에 의하면 그것이 전부 연속된 하나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키슬러는 조각의 일부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꽃병처럼 생긴 것이었는데, 그 속에서 헝겊조각 같은 것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한참동안 만지작거리고 나서 성냥불을 붙였다.
그 안에는 기름이 들어 있는지 작은 불꽃이 타기 시작했다.
생각대로라면 4시간 정도는 계속 탈 것이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으나 15분 정도 지나자 불꽃이 꺼지고 말았다.
나 이외에도 2명 정도의 방문자가 있었는데, 키슬러는 한사람씩 데리고 다른 방으로 사라진다.
누군가가 그 방에 들어가면 다시 다른 사람과 또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방이 많은 것도 아닌 터라서 사람들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빙글빙글 돌기만 할 뿐이다.
왠지 키슬러의 <엔드리스 하우스>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엔드리스 하우스>는 1920년대에 새로운 타입의 극장공간에 대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그 즈음 그는 데 스틸 그룹의 몬드리안, 반 뒤스부르크 등과 교류를 가졌으며, 시그램 빌딩(1958)의 설계자 미스 반 데어 로에와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한편 초현실주의 운동에도 참가하여 1947년 파리에서 개최된 초현실주의 국제전에서 뒤샹과 함께 전시디자인을 담당하기도 했다.7)
또한 기둥이 없는 곡면의 건축 <엔드리스 하우스>를 통해 그의 독자적인 공간개념인 ‘엔드리스’를 제기했던 인물이다.
이 여행기를 통해 키슬러의 작업과 사상의 전모를 전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하다.
애석하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마지막으로 키슬러의 방에는 뒤샹의 등신대 데생이 있었다는 점을 기술해둔다.
뒤샹이 몇 년 전에 그린 것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도 뒤샹의 영향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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