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뉴욕에 도착해서 1주일 정도 지난 뒤
야마구치 가쓰히로의 <공간연출 디자인의 원류>(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나는 지금 뉴욕에 있다. 3일 전 키슬러의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오랜 동안 연락하지 못한 것에 대한 예(禮)를 표하고, 다소 늦은 감이 있으나 내년 1월부터 일본의 잡지에 키슬러에 관한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오늘밤 8시에 그녀의 집을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호텔에서부터 지하철 IRT선을 타고 세븐스 애비뉴의 14번가에서 내렸다.
여기에 온 것도 벌써 3번째다. 처음 방문한 것은 키슬러의 생전인 1961년 12월이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아파트의 입구에 도착했다.
56이라는 번호가 매겨져 있는 현관에 이르자 14년 전 키슬러의 스튜디오를 방문하여 그의 환경조각을 처음으로 보았던 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당시의 뉴욕 여행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5)
건축분야의 동향에 대해서는 서두에서 언급한 키슬러에 대해서 적지 않을 수 없다.
뉴욕에 도착해서 1주일 정도 지난 뒤 ‘레오 카스텔리’화랑을 통하여 키슬러에게 전화를 걸어 화랑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소개를 주선했던 이의 말로는 키슬러는 ‘괴짜’인데다 이상한 말만 하고 시간약속도 잘 안 지키는 사람이라고 하며 나를 긴장시켰다.
약속 시간에서 1시간 반이나 지나서야 비서를 대동하고 키슬러가 나타났다.
150㎝정도의 작은 키에 백발인 남자가 선뜻 손을 내밀었다.
조금은 이상한 액센트의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분명히 70이 가까운 나이일텐데 건강한 목소리였다.
“이 세상의 모든 건축가들은 하나같이 ‘수컷의 건축’을 설계하고 있는데, 나는 ‘암컷의 건축’을 구상하고 있다.”6)라며 그의 아이디어인 <엔드리스 하우스>(1950, 1959)를 설명해주었다.
당신의 작품을 한번 보고 싶다고 하니 그럼 다시 연락하라고 했다.
얼마 후에 그의 집을 방문했다. 마침 이탈리아의 화가 피에로 도라지오와 키슬러의 대담을 정리하고 있던 비서가 그 일부를 읽어주었다.
키슬러의 조각에 관하여 언급된 부분이었다.
또 도라지오가 지적이면서 상당히 훌륭한 화가라고 칭찬하는 부분도 있었다.
옆방은 작은 스튜디오였는데, 천장에 조각작품으로 보이는 것이 걸려 있었다.
그것은 천장으로부터 내려뜨려져 있는 작은 부분과 벽으로 연결되어 걸쳐 있는 부분으로 되어 있었는데, 앞서 언급한 대담에 의하면 그것이 전부 연속된 하나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키슬러는 조각의 일부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꽃병처럼 생긴 것이었는데, 그 속에서 헝겊조각 같은 것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한참동안 만지작거리고 나서 성냥불을 붙였다.
그 안에는 기름이 들어 있는지 작은 불꽃이 타기 시작했다.
생각대로라면 4시간 정도는 계속 탈 것이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으나 15분 정도 지나자 불꽃이 꺼지고 말았다.
나 이외에도 2명 정도의 방문자가 있었는데, 키슬러는 한사람씩 데리고 다른 방으로 사라진다.
누군가가 그 방에 들어가면 다시 다른 사람과 또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방이 많은 것도 아닌 터라서 사람들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빙글빙글 돌기만 할 뿐이다.
왠지 키슬러의 <엔드리스 하우스>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엔드리스 하우스>는 1920년대에 새로운 타입의 극장공간에 대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그 즈음 그는 데 스틸 그룹의 몬드리안, 반 뒤스부르크 등과 교류를 가졌으며, 시그램 빌딩(1958)의 설계자 미스 반 데어 로에와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한편 초현실주의 운동에도 참가하여 1947년 파리에서 개최된 초현실주의 국제전에서 뒤샹과 함께 전시디자인을 담당하기도 했다.7)
또한 기둥이 없는 곡면의 건축 <엔드리스 하우스>를 통해 그의 독자적인 공간개념인 ‘엔드리스’를 제기했던 인물이다.
이 여행기를 통해 키슬러의 작업과 사상의 전모를 전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하다.
애석하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마지막으로 키슬러의 방에는 뒤샹의 등신대 데생이 있었다는 점을 기술해둔다.
뒤샹이 몇 년 전에 그린 것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도 뒤샹의 영향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2